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왼쪽) 정진열, 김형재의 ‘이면의 도시’

2012년이 저무는 날, 성기웅의 연극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을 봤다. 극에서 소설가 구보는 1934년 여름 무렵에 느지막이 집을 나선 후 경성을 배회한다. 이 연극을 보고 나면 구보처럼 서울을 돌아다니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구보의 발걸음을 흉내 내며 익숙한 종로를 거닐었다. 안타깝게도 벗삼을 지팡이는 없었다. 다음날, 좀 더 걷고 싶다는 마음에 박태원 단편소설을 헌책방에서 구입해서 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추운 겨울에도 가끔은 도시를 느긋하게 걷고 싶어진다.

얼마 전, 서점에서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구입했다. 단지 벤야민을 떠올리는 제목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젠체하는 제목에 약간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도시에 이끌려 방황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책을 골랐다. 놀랍게도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모티프를 얻은 서울 탐방기였다. 벤야민과 구보의 만남이라! 인문학과 짝사랑에 빠져있다면 누구나 질투할 기획이었다. 저자는 경성 시내를 주유했던 구보 씨를 2013년 지금의 서울로 소환해 서울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탐사한다. 소설, 시, 회화, 조각 등의 문화 텍스트를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벤야민식 도시 읽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 산책자 페르소나를 에세이처럼 창조한 것이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좋아하는 도시 산책로를 떠올리면서, 이 책에서 소개하지 못한 장소들을 추가로 그려봤다. ‘나만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원한다면, 가볍게 훑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서울도 꽤 걷고 싶은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좀 실험적인 것을 원한다면 정진열, 김형재의 ‘이면의 도시’를 추가해도 좋다. 우리 일상에서 쉽게 사라지는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 등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그래픽, 도표, 지도 등 시각언어로 재현함으로써 도시의 감춰진 욕망(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도시와 개인의 관계, 도시의 기능 변화 등에 대한 질문이 도시의 지형도(도시 관상학?)로 완성된다는 측면에서 신선하다.

Annie Leibovitz, Susan Sontag, Mexico, 1989 (C) Annie Leibovitz from A Photographer’s Life 1990~2005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소 중에 꼭 가야할 곳을 하나만 고르자면, 예술의 전당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애니 레보비츠 사진전이 진행 중이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레보비츠의 작품을 모은 이 전시는 2008년 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본 적이 있다. 국내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전시다. 그녀의 사진을 많이 본 적이 없는 분이라면 스타나 배우들의 패션 사진만 봐도 눈이 즐거울 수 있다. 그런 사진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베니티 페어나 보그 같은 패션지에서 찍은 사진들에 꽤 익숙하기 때문에, 레보비츠의 사진을 다시 볼 때는 개인 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보비츠의 사람들이 더 궁금하기 때문이다. 특히 수잔 손택(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딸(생명의 탄생)에 대한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 전시는 그녀의 상업사진과 예술사진을 나란히 같이 배치하고 있다. 다분히 레보비츠의 다양한 사진을 즐기도록 유도하는 동선이다. 사진의 경계를 무너뜨린 차원에선 의미 있는 구성이지만, 집중도에서는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수잔 손택의 모습(우정과 죽음)만 한 번에 모아도, 훨씬 다른 감성이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레보비츠가 자연을 닮은 사진들이 전시장의 한계로 다소 위축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올 겨울에 절대 놓칠 수 없는 전시다.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4일까지, 전설적인 사진들과 만날 수 있다.

뮤지컬 ‘아가사’

끝으로 공연 추천이다. 뮤지컬 ‘셜록 홈즈’에 흠뻑 빠진 분들이라면, 올 겨울에는 뮤지컬 ‘아가사’와 만나도 좋을 듯하다. 이 작품은 여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1890~1976)의 실종사건을 다루고 있다. 30대 중반의 젊은 아가사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및 이혼 요구로 인해 그녀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더불어 신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이 도를 넘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받으면서 아가사는 돌연 실종되고 만다. 즉 그녀의 숨겨진 열하루를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뮤지컬이다. 실종 11일째, 아가사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근교의 호텔에서 남편의 내연녀 이름으로 숙박 중이던 그녀가 발견됐다. 발견 당시, 사라진 열하루 동안의 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인적 기억상실로 추정되었다. 그 후 그녀의 자서전에서도 이 날의 일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작가 아가사의 실제 삶과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관성을 느슨하게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참신하다. 하지만 창작 뮤지컬이다 보니, 아직 음악(뮤지컬 넘버)이 익숙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아직 성장해 가는 뮤지컬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내가 괴물이었어!”라고 외치는 아가사나 미스터리한 로이의 존재는 다분히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가사 역에 배해선, 양소민, 로이 역에 김수용, 진선규, 박인배가 출연한다. 아가사의 절규는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2월 23일까지 울려 퍼진다.

굴. 전종혁 대중문화 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정시우 siwoorai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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