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대중음악계의 키워드는 ‘만개’다. 올해에는 음반 발매부터 공연, 페스티벌까지 대중음악계가 풍성했다. 수많은 가수들이 컴백하는 좋은 앨범들이 쏟아져 나왔다. 요 몇 년 새 강세를 보였던 아이돌그룹부터 오랜만에 등장하는 중견가수까지 앞 다퉈 음반을 발매하는 통에 매주가 컴백 음반들의 전쟁일 정도였다. 록페스티벌, 내한공연을 비롯한 공연시장도 커져 거의 매주 대형 음악행사들이 즐비했다. 더불어 한국 음악인들의 해외 진출은 케이팝에서 록으로 확산되는 움직임도 보였다. 안과 밖에서 ‘만개’한 2013년 대중음악계 중요한 흐름들을 돌아본다.
록페스티벌 ‘슈퍼소닉’에서 공연하고 있는 조용필. 20대 젊은 관객들은 첫 곡 ‘미지의 세계’부터 마지막 앵콜 곡 ‘여행을 떠나요’까지를 열정적으로 합창했다. 이날 조용필은 노장이 아닌, 젊은 록 스타에 다름 아니었다
조용필과 소녀시대로 시작된 파격의 물꼬올 한해 가요계에는 유난히 파격적인 행보들이 이어졌다. 조용필, 나미와 같은 중견가수들이 최근의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한편 훈육된 아이돌그룹들은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프로덕션팀과 함께 음악적인 향상을 꾀하기도 했다. 록 뮤지션, 싱어송라이터들도 실험적인 시도를 한 이들이 주목받는 한해였다.
파격의 단초는 조용필이었다. 10년 만의 새 앨범인 ‘헬로’에서 조용필의 화법은 1980년대 히트곡 ‘단발머리’, ‘나는 너 좋아’보다 오히려 젊었다. 랩 피처링을 하고 놀랍게도 오토튠을 통한 보컬 이펙팅까지 시도했으며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가미하는 등 과감함이 돋보였다. 아마도 한국 가요사를 통틀어 환갑을 넘긴 뮤지션이 시도한 가장 젊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마치 임권택 감독이 ‘건축학개론’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이것이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상반기 대중음악계 이슈의 8할이 조용필을 중심으로 회자됐다. 최근 몇 년간 한국 대중음악계 이슈의 패러다임은 ‘케이팝 한류’를 중심으로 다뤄져왔는데, 이를 깬 것이 바로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왕’ 조용필이었다.
걸그룹의 신세계를 연 소녀시대. 이제 SM의 새로운 지향점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소녀들의 다음은 어디일까?
아이돌그룹 중에서는 1월 1일 정규 4집 ‘아이 갓 어 보이(I Got A Boy)’를 발표한 소녀시대를 필두로 음악과 퍼포먼스에서 있어서 성장하는 모습들이 엿보였다. ‘아이 갓 어 보이’는 소녀들의 수다로 시작해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뮤지컬을 보는 듯한 곡이다. 이런 복잡하고 극적인 구성의 악곡을 걸그룹의 음악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중에게 널리 소비돼야 하는 걸그룹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는 다분히 파격이었고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소녀시대를 통해 선보인 SMP(SM Music Performance)의 실험은 샤이니의 ‘와이 소 시어리어스? – 더 미스콘셉션스 오브 미(Why So Serious? - The Misconceptions of Me)’로 이어졌고 아크로바트를 연상케 하는 대담한 무대 연출은 엑소를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올해 가요계 화제의 중심이었던 엑소의 거대한 ‘팬덤’은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올 한해 국내외에서 지드래곤의 활약은 대단했다. 솔로 월드투어부터를 성황리에 마치고 솔로앨범으로 자신의 음악을 선보이며 빅뱅이 아닌 솔로 뮤지션으로서 존재감을 공고히 했다. 이제 아이돌그룹 중 지드래곤 앞에 그 누구도 없다
지드래곤은 1인자로, 이효리는 트렌드 밖으로지드래곤은 올해 아이돌그룹 출신 솔로가수 중 1인자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지드래곤은 테디 등 YG 프로덕션 팀과 힘을 합쳐 만든 정규 2집 ‘쿠데타(COUP D’ETAT)’로 앨범판매량, 차트를 통해 나타나는 ‘인기’와 아이돌 뮤지션을 대표한다는 ‘상징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아이돌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지드래곤은 미시 엘리엇, 디플로, ‘할렘 쉐이크’ 열풍의 주인공 바우어 등과 공동작업을 통해 참여로 인해 지드래곤은 동시대 팝 트렌드까지 소화했다. 아이돌그룹 출신이라고 해도 음악을 하는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양껏 드러낸 것이 팬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한 것. 이와 함께 아이돌그룹 중에는 팀의 리더들이 곡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비원에이포(진영), 비에이피(방용국), 방탄소년단(랩몬스터), 블락비(지코) 등이 특히 각광받았다.
홍대 라이브클럽 오뙤르에서 열린 김태춘 단독공연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한 이효리. 이효리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한 김태춘이 직접 이효리에게 전화해 게스트 출연을 부탁해 둘의 듀엣 무대가 성사됐다. 이효리의 첫 라이브클럽 공연.
걸그룹 출신으로 트렌디한 여성가수의 아이콘이었던 이효리의 변신도 눈길을 끌었다. 이효리는 정규 5집 ‘모노크롬(MONOCHROME)’의 16곡 중 무려 9곡을 작사하며(1곡 작곡) 음악적인 욕심을 드러냈다. 새 앨범에 예전처럼 파격적이거나 섹시함을 내세운 곡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김태춘, 빈지노, 고고보이스 등 활동반경이 다른 뮤지션들과 협연을 하면서 예전에 하지 않았던 장르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인디 신에서도 드물게 정통 컨트리, 블루스를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욕설도 서슴지 않는 강골인 김태춘과 함께 한 ‘사랑의 부도수표’, ‘묻지 않을게요’는 이효리의 편안한 변신을 잘 유도해냈다. 이효리의 사례는 어디까지나 걸그룹 출신 여가수의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가요계에서 걸그룹이 갖는 비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일단 효리의 변신에 우리의 머리는 놀랐다. 가슴을 울릴지는 두고 볼 일.새앨범에서 아이유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스물한 살이라고 하기에는 ‘애늙은이’처럼 능청스럽게 소화해냈다. 이제 노래하면서 교태를 부리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더라. 아직 섹시함까지는 아니지만.
아이유 김예림의 변신…여가수+프로듀서, 그 최상의 조합아이유와 김예림의 변신에는 프로듀서, 작곡가들과의 조화가 큰 힘을 발휘했다. 둘은 대중에게 친숙하면서 동시에 웰메이드 음악으로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이로써 동년배 아이돌가수들과 달리 다양한 연령층에 어필했다. 또한 윤상, 정석원, 김광진, 고찬용, 이규호 등 90년대를 수놓은 대표적인 작곡가들과 좋은 궁합을 보인 것도 공통점.
특히 아이유는 정규 3집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를 통해 ‘국민 여동생’에서 ‘여성’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기존의 곡들이 아이유의 귀염성을 부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신곡들은 성숙한 느낌이 물신 풍긴다. ‘분홍신’에서는 예전의 율동 수준이 아닌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고난이도의 안무를 추면서 노래를 했다.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음악적인 면에서는 스윙리듬, 브라질리언 뮤직 등을 차용해 아이유의 목소리를 빼고 악곡만 보면 성인들이 향유하는 어덜트 컨템퍼러리 뮤직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대중음악 주 소비층인 10대의 구미에 음악 스타일을 맞추는 주류 가요의 관성이 한 꺼풀 벗겨진 셈이다.
훌륭한 작곡가와 괜찮은 가수가 만난다고 좋은 곡이 탄생하리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김예림이 윤종신을 비롯해 김광진, 고찬용, 김창기, 이규호 등 살아온 시대가 다른 작곡가들과의 작업에서 좋은 결과를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꽤 성공적이었다
김예림의 정규 1집 ‘굿바이 20’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가수를 통틀어 최고라 할 만한 완성도를 보였다. 음색으로 주목받은 김예림의 장점을 잘 캐치한 프로듀서 윤종신의 힘이 컸다. 오디션 출신 가수들이 기존의 가요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면 김예림은 90년대 풍의 가요를 매끄럽게 소화하면서 다양한 청자를 만족시켰다. ‘굿바이 20’는 두 장의 EP ‘어 보이스(A Voice)’와 ‘허 보이스(Her Voice)’를 합친 앨범이다. 김예림은 시간차를 두고 발매된 ‘어 보이스’와 ‘허 보이스’에서 성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정된 기간과 곡으로 효과적인 프로모션도 펼칠 수 있었다. 덕분에 김예림은 올 한해 가장 많이 들려진 목소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킨 셈이다. 이는 화제를 등에 업고 세상 밖으로 나온 오디션 스타라 하더라도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올 한해 크레용팝의 활약은 대단했다. 한해에 전국노래자랑과 MAMA 두 곳에서 공연하는 걸그룹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전국노래자랑부터 MAMA까지 간 유일무이한 걸그룹은?올해 가요계에서 가장 파격의 순간은 바로 크레용팝의 출현이었다. ‘직렬 5기통 춤’이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 모았으니 말이다. 올 한해 크레용팝 만큼 넓은 반경에서 활동한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길거리 공연부터 시작해 전국노래자랑, 그리고 홍콩에서 열린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Mnet Asian Music Awards)’까지 갔으니 말이다. ‘잔다리 페스타’를 통해서는 인디 1세대 뮤지션들이 뭉친 프로젝트 밴드 에로디(L.O.D)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팝저씨’(크레용팝을 따라하는 아저씨 팬)들로 시작된 크레용팝의 소소한 팬덤은 대국민적인 화제 거리로 회자됐다. 지금은 ‘따까치 원’이라고 외치는 ‘빠빠빠’ 노래 첫 소절만 들어도 머릿속에 철모 쓰고 교차로 점프하는 씩씩한 소녀들이 떠오를 정도. 이는 섹시함과 귀여움 중 택일하는 걸그룹 관성을 박살내버린 독특한 콘셉트 덕분에 가능했다. 만약 소속사 크롬엔터테인먼트가 기존의 걸그룹 트렌드를 따랐다면, ‘직렬 5기통 춤’이라는 전대미문의 퍼포먼스는 아예 탄생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디어의 승리인 셈이다. 내년에는 또 어떤 새로운 콘셉트의 음악들이 우리를 즐겁게 할까?
글,사진.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임슬기,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로엔엔터테인먼트, 미스틱89, 액세스엔터테인먼트, 크롬엔터테인먼트 슈퍼소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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