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르고 만주로 갈 때도, 온전히 나는 살아있었네, 그 지옥 같던 좁은 방에 있을 때도, 온전히 난 살아있었네

전기흐른 ‘살아있었네’ 中

Various Artists ‘이야기 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
작년에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는 두 가지 면에서 유의미한 시도였다. 하나는 일군의 뮤지션들이 자진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아픔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열다섯 명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야기해주세요’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임과 동시에 동시대 한국 여성 뮤지션들의 다양한 면모와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상징적인 앨범으로 남았다. 후속편인 ‘이야기해주세요 - 두 번째 노래들’은 그 의미 있는 시도들을 이어가고 있다. 전작에 주로 인디 신의 뮤지션들이 참여했다면 이번 앨범에는 이효리, 호란, 소이 등의 참여가 눈길을 끈다. 활동반경에 따라 이야기의 경중이 나뉘지는 않는 법. 이들의 목소리는 여성이 여성을 위로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강한 울림을 들려준다. 1991년 1월에 시작된 위안부할머니들의 ‘정기수요집회’는 어느덧 1100회째를 맞이했다고 한다. 중요하고, 당연한 이야기일수록 반복해서 해야 한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제이슨 므라즈의 말을 인용해본다. “어떤 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도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분명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종종 잊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단순히 들려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임팩트가 사람들의 세포로 하나하나 전해져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프롬 ‘Arrival’
사실 프롬의 공연을 처음 봤을 때는 여타 예쁘장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기존 ‘홍대 여신’들이 들려준 귀여운 목소리와는 달리 굵고 성숙한 톤의 노래를 구사한다는 점은 달랐다. 이러한 음색의 차이는 상당한 위력을 가진 무기다. 목소리는 바꿀 수 없으니까.(물론 바뀌는 경우도 있더라) 데뷔앨범 ‘어라이벌(Arrival)’에서 프롬은 자신의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다양한 악곡을 펼쳐 보이고 있다. 어쿠스틱 편성이 중심을 이루지만, 전자음들이 여백을 살며시 채우면서 다양한 색을 불어넣고 있다. 각 레이어의 배치가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파스텔 톤으로 끝날 수 있는 그림에 유화적인 느낌을 가미했다고 할까? 초반에 배치된 ‘도착’, ‘마음셔틀금지’에서는 상큼한 미국 인디 팝을 듣는 느낌이 드는데, ‘너와나의’, ‘달, 말하다’에서는 꽤 고즈넉한 감성을 선사하기도 한다.

김한얼 트리오 ‘Clouds’
얼마 전 문을 닫아 재즈계를 아쉽게 했던 재즈클럽 워터콕(전 솔라)이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2002년 문을 연 워터콕(중간에 ‘솔라’로 이름이 바뀜)은 김수열, 최선배, 이동기 등 재즈 1세대를 비롯해 이정식 SAZA최우준, 송영주, 서영도 등 베테랑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곳은 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연주자들이 실전 경험을 쌓는 인재양성소로도 알려져 있다. 신인을 과감하게 무대에 올리는 주인장 차현 덕분. 한국 재즈계의 주목할 만한 새 얼굴인 재즈 피아니스트 김한얼은 워터콕 주인장이자 한국 재즈계의 원로인 베이시스트 차현을 비롯해 다양한 연주자들과 협연을 하며 성실한 연주활동을 펼쳐왔다. 데뷔앨범 ‘Clouds’에서는 평소 함께 해 왔던 드러머 이소월, 베이시스트 전제곤과 함께 트리오를 이뤘다. 김한얼 트리오의 매력이라면 멜로디가 선명한 테마, 그리고 단정하고 매끄러운 임프로비제이션을 들 수 있다. ‘Prelude’, ‘Clouds’와 같은 곡에서는 동양풍의 멜로디로 테마를 잡아가면서도 비밥의 기본에 충실한 임프로비제이션을 들려준다. 이외에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M?lodies pour Hegi’, 고향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Summer, Jeju’에서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작곡에 있어서 일관적인 감성을 보이고 있어 앨범이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차기작이 더 기대되는 뮤지션.

제쉬 ‘마중’
이승희(건반), 이제이(보컬)로 이루어진 여성듀오 제쉬의 데뷔앨범. 이승희가 곡을 쓰고 이제이가 가사를 붙였다. 요즘 인디 신을 살펴보면 보컬과 건반 등으로 이루어진 여성 듀오가 참 많다. 이들은 대개 음악스타일이 유사해(심지어 이름도) 마니아가 아니면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 제쉬(Je’she)는 불어의 Je(나)와 영어의 she(그녀)를 합성한 팀명으로 ‘나와 그녀, 나와 불특정다수, 나아가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제쉬는 청자에게 위안을 주는 멜로디와 감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까지는 기존 여성 듀오들과 닮은 점,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제쉬의 특징이라면 곡들의 호흡이 유난히 길다는 점이다. 곡이 긴 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화자 내면의 이야기를 점진적으로 끌어내는 끈기 있는 구성을 들려주고 있다. 각각의 곡들이 마치 짤막한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첫 곡 ‘마중’부터 마지막 곡 ‘안녕’에 이르기까지 차분하지만, ‘소심하게 드라마틱’한 구성을 들려준다. BGM으로 듣기보다는 곡에 집중해 감상해보길 바란다.

끝내주는 오빠들 ‘Prelude: The Rise of Penguins’
최철수(보컬, 베이스), 김캐빈(기타), 고기(드럼)의 3인조 밴드 ‘끝내주는 오빠들’의 데뷔EP. 도대체 얼마나 끝내주기에 팀 이름이 끝내주는 오빠들일까? 세 멤버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갑내기 친구 사이로 각자 다른 밴드를 하다가 만난 지 십 년 만에 의기투합해 밴드를 결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로커빌리에 기반을 둔 흥겨운 록을 들려준다. 로큰롤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는 로커빌리는 겉보기엔 단조로워 보이지만, 연주의 내공이 딸리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장르이기도 하다. 끝내주는 오빠들은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로커빌리의 경쾌함을 구현하고 있다. 앨범에 실린 ‘펭귄 行進曲’, ‘모르겠네’, ‘오늘 같은 밤’, ‘콜린 이대로 멈춰’는 모두 단순명쾌한 음악으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불금’에 불을 붙여줄만한 음악.

마호가니 킹 ‘Memorandum’
이말씨, 문득, 아라, 제이신 네 명으로 구성된 보컬 그룹이자, 프로덕션 팀인 마호가니 킹의 두 번째 앨범. 마호가니 킹의 공연을 처음 봤을 때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R&B에 대한 꽤 심도 있는 이해도를 지닌 음악이 반가웠고, 이러한 스타일은 3인조 체제로 발매된 첫 앨범 ‘이말씨 아라 문득’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여기서 말하는 R&B는 가요 화된 R&B가 아닌 미국 본토의 정서를 구현한 R&B를 말한다) 전작이 R&B를 나름대로 해석한 장르 음악에 가까웠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일렉트로 팝부터 어쿠스틱 편성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보다 다채로운 악곡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블랙 필은 여전하지만, 보다 수려해진 팝을 들려준다. 앨범 곳곳에 보이는 재미난 아이디어들은 보컬그룹을 넘어선 프로덕션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보컬그룹이 노래만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음악이 제한적인데, 마호가니 킹은 음악적 아이디어로써 기존의 관성을 살짝 비껴가고 있다.

머쉬룸즈 ‘One Game Wonder’
20년 지기 친구들인 완, 식보이, 준서가 모인 3인조 밴드 머쉬룸즈의 정규 1집. 이들은 모던포크에 기반을 둔 어쿠스틱 편성의 음악을 들려준다. 강점은 청자에게 위안을 주는 섬세한 사운드와 멜로디. 머쉬룸즈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몸이 나른해지고,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한다. 이는 어쿠스틱 기타의 통 울림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 머쉬룸즈를 듣고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머쉬룸즈는 오히려 포크의 질감을 잘 살리고 있다. 그 외에 일렉트릭 기타가 들어간 곡들에서는 브리티시 록을 연상케 하는 안개 자욱한 음악을 들려준다. ‘It’s Over’와 ‘Mr. Receipt’에는 스웨덴의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고즈 투 도쿄(Katie Goes To Tokyo)가 피처링했는데 고즈넉한 감성이 잘 어울린다.

TLC ‘20’ 中
90년대를 풍미했던 3인조 걸그룹 TLC(티엘씨)의 결성 데뷔 20주년 앨범. 서로 다른 소울 창법을 지닌 보컬리스트 티보즈와 칠리, 그리고 래퍼 레프트아이의 앞 글자를 모아 TLC라 이름을 지은 이들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했다. 솔트 앤 페퍼, 엔 보그에서 이어지는 여성 R&B 그룹 전성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앨범재킷만 보면 TLC의 대표작이면서 1994년 최고의 히트앨범으로 꼽히는 ‘Crazysexycool’의 20주년 앨범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넉 장의 앨범을 간추린 베스트앨범. 전형적인 뉴 잭 스윙인 데뷔 싱글 ‘Ain’t 2 Proud 2 Beg’부터 베이비페이스, 댈러스 오스틴, 저메인 듀프리, 퍼프 대디 등 90년대 대표 흑인 프로듀서들이 매마진 곡들까지 듣다보면 9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R&B 유행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새삼 2002년에 레프트아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최근 미국에서 TLC를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크레이지섹시쿨’이 방영 중인데 그거라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련다.

린킨 파크 ‘Recharged’
린킨 파크의 세 번째 리믹스 앨범. 최근 유행하는 록과 일렉트로니카, 덥스텝을 결합하는 본격적인 움직임은 린킨 파크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린킨 파크는 콘, 림프 비즈킷과 같은 뉴 메탈 밴드들이 인기가 한풀 꺾일 무렵인 2000년 벽두에 혜성과 같이 등장해 뉴 메탈에 일렉트로니카가 가미된 데뷔앨범 ‘하이브리드 씨어리(Hybrid Theory)’를 빅히트시키며 하이브리드 록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밴드에 DJ 한 명 넣는 것이 장식과 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DJ 이상이 밴드 이상으로 관객을 출렁이게 하는 위력을 지니게 됐으니 격세지감이다. 린킨 파크는 초지일관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융합을 해왔을 뿐이고, 이는 대세를 이룬지 오래. ‘리차지드(Recharged)’는 전작 ‘리빙 씽즈(Living Things)’를 리믹스한 앨범으로 일렉트로 팝, 덥스텝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첫 싱글 ‘어 라이트 댓 네버 컴즈(A Light That Never Comes)’에는 EDM의 슈퍼스타 스티브 아오키가 참여했다. 과거 콘과 스크릴렉스가 협연한 적도 있는데, 린킨 파크와 스티브 아오키의 만남이 더 밀접한 느낌을 준다.

케이티 페리 ‘Prism’
이제는 최고의 팝스타 중 한 명으로 떠오른 케이티 페리의 세 번째 앨범. 2010년에 나온 전작 ‘틴에이지 드림(Teenage Dream)’이 워낙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캘리포니아 걸스(California Gurls)’, ‘틴에이지 드림(Teenage Dream)’, ‘파이어 워크(Fire Work)’ 등 다섯 개의 1위곡을 배출하며 마이클 잭슨의 <배드(Bad)>와 함께 단일 앨범 최다 빌보드 1위곡 타이기록을 세운 것. ‘캘리포니아 걸스’ 뮤직비디오에서 스눕 독에게 크림총(?)을 쏘는 장면이라니! 낙천적인 음악부터 통통 튀는 섹시함까지 여러모로 미국이 원하는 여가수였다.(이런 그녀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가스펠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2집을 통해 최고 인기 여가수 자리에 오른 페리는 새 앨범에서 음악적인 욕심을 보이고 있다. 페리는 앨범 전 한 인터뷰에서 신보는 ‘전과 다른 질감의 음악’, ‘어두운’ 곡들을 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앨범을 들어보니 ‘다른 질감’은 ‘다채로움’, ‘어두운’은 ‘성숙함’을 말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전작의 ‘캘리포니아 걸스’와 같은 ‘킬링 트랙’은 보이지 않지만, 완성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롱런으로 가는 순조로운 행보.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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