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과 2012년은 대형 상업영화들 속에서 독립영화가 크게 선전한 해로 기억된다. 그 중심에 ‘무산일기’의 박정범, ‘밍크코트’의 신아가&이상철,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이 있다. 이들은 주류 상업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문법의 연출을 선보이며 ‘작은 영화들’의 저력을 보여줬다. 그들이 어떤 차기작을 들고 나올까 궁금하던 찰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하는 ‘시선 프로젝트’로 뭉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옴니버스영화가 그렇지만, 각기 다른 감독의 개성과 취향을 음미할 수 있다는 건 ‘어떤 시선’의 가장 큰 장점이다. 박정범, 신아가&이상철, 민용근 감독은 ‘장애인’, ‘노인’,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소재를 통해 당신들의 시선을 살핀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들의 편견은 어디 즈음에 서 있냐고. 만약 인권영화는 지루하다는 생각을 지닌 관객이라면, 당장 ‘어떤 시선’을 만날 것을 권유한다. 그 역시 당신의 편견임을 ‘어떤 시선’이 알려줄 테니 말이다.

Q.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영화라는 점에서 따분한 홍보영화라는 태생적 낙인을 지닐 수밖에 없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
박정범: 워낙 쟁쟁한 분들이 참여했던 프로젝트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단편치고는 예산이 적지 않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좋기도 했다.(웃음) 단편이든 독립장편이든 스태프들에게 수당을 못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오야지’급들의 수당을 모두 챙겨 줄 수 있었다. 출연해 준 어린 친구들에게도 회식하라고 돈도 주고. 심적으로는 뭔가 풍요로운 현장이었다.
이상철: 인권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안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전작 ‘밍크코트’에 인권적인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인권보다는 드라마를 생각하면서 찍은 거였고. 이번에는 역으로 주제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기에 말씀하신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기존 작품들을 찾아보니 문제의식을 강조한 것보다 그 안에 인권을 자연스럽게 녹여 낸 작품들이 더 많더라. 사소한 것 하나도 인권이 될 수 있구나, 하면서 편하게 접근했다.
민용근: 나는 이 프로젝트에 가장 늦게 합류했다. 원래 예정된 감독님이 못하게 되면서 ‘땜빵’으로 들어온 거다.(웃음) 담당하시는 분이 항상 강조한 게 “인권영화라는 게 너무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주제보다는 이야기가 먼저고, 사람이 먼저”라고 하셔서 작품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Q. 탈북자를 그린 ‘무산일기’, 종교적 신념과 갈등을 이야기한 ‘밍크코트’, 미혼모 이야기의 ‘혜화,동’ 모두 넓은 의미에서 인권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었던 분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지 않나 싶은데 소재선택은 자유였나?
박정범:
‘무산일기’가 그랬듯, ‘두한에게’도 내가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영화다. 중학교 1학년 때 뇌병변 장애가 있는 친구와 짝이었다. 인권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 친구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사실 시나리오 쓰는데 큰 고민이 없었다.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날로 먹은 기분이랄까.(웃음) 자꾸 내 경험을 이야기로 쓰니까, 어떤 분은 “그게 너의 한계야!”라고 하더라.
민용근: 제안을 받고 뭘 할까 고민하는데 병역거부로 감옥에 갔다 온 분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군 입대 때 본 장면도 생각났는데, 보충대에 입소할 때 병역 거부자들은 바로 열외가 된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분들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영상위원회에서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팸투어(사전답사여행)를 진행했다. 교도소/정신병원/남영동 등 평소 가보기 힘든 장소를 찾아가는 투어였다. 그때 영등포 교도소를 갔는데 함께 있던 감독이 병역거부를 앞두고 있는 분이었다. 교도소를 돌아보면서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을 가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를 느끼는데, 그 분은 오죽했겠나. 당시만 해도 ‘병역거부로 감옥에 가는 분들이 계시다’ 정도만 알았지 자세히는 몰랐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평화주의적 신념에 의해서 병역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설정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나도 배제를 시켜놨었던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면서 우리나라 병역거부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게 그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도 말 그대로 선입견이라는 걸 깨달았고.

“자본주의에서는 가난이 가장 큰 장애다”

‘두한에게’ 박정범 감독. 뇌병변 장애를 가진 두한과 집안 형편이 어려운 철웅의 이야기. 이들의 우정은 두한이네 집에 놀러 간 철웅이 두한이 형의 최신 아이패드를 훔치면서 시험이 든다

Q. 30분 남짓한 단편으로 담으면서, 장편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났을 것 같다.
민용근:
맞다. 지금은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사례가 굉장히 다양하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가 혹은 한 가족 중 형제 모두가 똑같은 이유로 징역형을 산 경우도 많다. 이 문제는 비단 군대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종교를 가진 분들은 예비군 훈련을 또 거부한다. 그럼 계속 벌금이 나온다. 1,000만원 2,000만원… 벌금을 물다가 감당이 안 되면 다시 감옥에 가는 거다. 그 외에도 전과기록으로 인해 공기업 취업 기회가 원천적으로 박탈되는 등 너무나 많은 사회적 불이익을 당한다. 유신시대 때는 더 심했다. 그때는 7년이나 복역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더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왜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일반 사람들이 낯설어 하는 그들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도 영화에 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이상철: 우리의 경우 강요는 아니었지만 “감독님들만 괜찮으시다면 노인문제를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몰랐는데, 이제까지 시선 프로젝트에서 노년세대를 다룬 게 없었다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아가: 사실 노인문제는 단편영화 쪽에서 많이 나온 소재다. 정년퇴직 문제의 경우 ‘어바웃 슈미츠’에서 워낙 잘 다루기도 했고. 그런 좋은 사례들이 많은 터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 우리가 그 나이 때 분들의 고민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 겉핥기에 그치기보다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가장 원론적인 ‘소통의 단절’에 대해 다루게 된 거다.

Q. 세 작품 중 전작과 가장 느낌이 다른 게 ‘봉구는 배달중’이다. 캐릭터의 힘이 상당하다는 점은 ‘밍크코트’와 유사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코믹장르에 소질이 많을 줄 몰랐다.(웃음)
이상철:
코미디에 관심이 많다.(웃음) 기존 시선 프로젝트 중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코믹하게 풀어낸 작품들이고. 인권영화는 무겁다는 선입견을 깨보고 싶었다.
신아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캐릭터가 중심을 잡고 있어야 이야기가 탄력을 받아 앞으로 나간다고 믿는다.

Q. ‘두한에게’는 시선의 전복이 신선한 작품이다. ‘무산일기’에서 탈북소재를 전형적이지 않게 다루더니 이번에도 인권에게 가장 흔하게 다뤄지는 장애를 색다른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더라. 자주 사용되는 소재를 흔하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신아가:
나도 ‘두한에게’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흔히들 장애를 가진 친구가 비장애인 친구보다 더 가난할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걸 뒤집은 시선이 신선했다.
박정범: 두한이 집이 (서울 강남구)압구정동에서도 부자에 속했다. 놀러갔는데 벽에 금이 발라져 있고, TV 위에 황금소가 놓여 있고 그랬다.(웃음) 그런 시절을 추억했을 때 나는 내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난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한 거다. 그런 ‘마음의 장애’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물건(영화 속에서는 태블릿 PC)을 훔친 거고.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내가 장애인을 캐어해 준다며 칭찬했다. 그게 나에게는 큰 죄의식이었다. 그래서 훔친 물건을 들고 집에 오자마자 옷장에 들어가서 ‘엉엉’ 울었다. 왜냐하면 돌려줄 수가 없으니까. 아마 내가 훔쳤다는 걸 그 친구는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말을 안 했다. 왜? 내가 떠날까봐. 이 관계가 굉장히 슬픈 거지. 결국 장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문제였던 거다. ‘무산일기’때도 그렇고.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다”

‘봉구는 배달중’ 이상철&신아가 감독. 실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71세 봉구가 혼자 길에 남겨진 6세 행운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다가 졸지에 유괴범으로 몰린다.

Q.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건가?
박정범:
내 유년 시절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훔치고, 싸우고, 뺏고, 뜯고, 이유 없이 맞고!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배경이 압구정동이다. 그래서 (‘돼지의 왕’ 감독) 연상호와 친해졌는데, 어제도 함께 술 마시면서 그 얘기를 했다. 사람들은 압구정이라고 하면 부자들의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이주해 온 사람들 얘기다. ‘사’자 돌림의 사람들이 한양과 현대 아파트를 점령하면서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가난한 사람처럼 돼 버렸다. 당시 그 역심리가 어마어마했다. 부잣집 친구들이 폴로, 게스 이런 거 입고 다닐 때 나는 일년내내 추리닝 세 벌로 버텼다. 거기에서 계급이 나뉘고 끼리끼리 뭉치게 되고. 그때 그 중간에 아이러니하게 존재했던 게 두한이다. 두한이는 오히려 가난한 애들에게 베풀었다. 나하고 짝하고 싶다고 막 그러고. 그 시절의 기억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투영됐다.

Q. ‘두한에게’는 친구 두한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영화라고 들었다. 두한에게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나.
박정범:
이 영화를 보고 빨리 전화나 했으면 좋겠다. “정범아 난 다 알고 있었어. 용서한다!”하면서.(웃음)
민용근: 전화번호를 공개해야 하는 거 아닌가. GV때 ‘영화는 사랑을 싣고!’ 이런 게 연출될 것 같다.(웃음)
박정범: “드디어 만났습니다!” 이런 거?(웃음) 사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 친구 아버지가 대기업 수준의 어마어마한 재벌이셨거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왜 안 찾고 있느냐…. 내가 올해 서른여덟이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사회복지사 몇 명을 알고 있는데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죽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 얘길 듣고, 겁이 나는 거지. 그동안 친한 친구들을 많이 보냈다. 자살한 친구도 있고, 병으로 죽은 친구도 있고, (‘무산일기’ 속)승철이도 있고. 그런 일을 너무 많이 겪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방어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 좋겠다.

Q. 아까 “경험을 써 먹는 것이 너의 한계야!”라는 말을 듣는다고 했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한다. “너의 얘기를 진실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계를 뛰어넘는 거”라고. 어느 쪽이 맞는 걸까. 자기 얘길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창작의 시작일까, 한계일까.
박정범: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얘기처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부럽기도 하다. 그래서 준비 중인 차기작은 최대한 나를 배제하고 써보려 했는데, 다 쓰고 나서 봤더니 결국은 내 얘기였다. 나는 그게 본능적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러가 싶기도 하고.(웃음) 이게 안 좋은 게 뭐냐면 내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거다. ‘무산일기’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어머니가 ‘두한에게’를 보시고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가난했던 그 시절이 다시 올라오신 거다. VIP 시사회가 끝나고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셔서 나도 상심했다. 어머니의 응원을 듣고 싶었는데. 지금 시나리오 퇴고를 하면서 내 경험을 최대한 빼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민용근: 대학 처음 들어갔을 때 찍은 영화가 ‘주말’이라는 제목의 단편이었다. 신혼부부의 하룻밤을 담은 영화인데 ‘신혼부부의 주말’ 이라고 하면 뭔가 있을 것 같잖아?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통이 부재한, 권태로움으로 가득한 무료한 주말이 있을 뿐이다. 결혼도 안 한 21살짜리가 왜 그런 걸 찍었나 생각해 보면, 그게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었던 것 같다. 억눌려 지내던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교에 들어왔는데, 대학이 너무 무미건조했다. 삶의 형태가 바뀌면 인생도 바뀔 줄 알았는데, 본질은 바뀌지 않았던 거다. 그걸 대학생 인물을 내세워 하기에는 너무 오글거린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내 감정을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표현했던 것 같다. ‘얼음강’은 내가 반영될 여지가 적은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소통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을 내가 느껴보지 못했다면 시나리오를 쓰지 못했을 거다. 이야기를 쓸 때 외적으로는 다른 상황으로 치환하지만, 결국에는 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복무제에 대한 공약이 지난 대선 때 있었다”

‘얼음강’ 민용근 감독. 군입대를 앞두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택한 아들과 아들을 감옥에 보낼 수 없는 엄마의 갈등이 그려진다.

Q. ‘어떤 시선’은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하다. 스스로가 그런 차별 혹은 편견의 시선에 갇힌 경험이 있다면?
박정범:
영화 찍은 후에 홍금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웃음) 외모로 인한 에피소드가 많은 편이다. 여담인데 멕시코 영화제를 갔을 때였다. 동행한 지인들 사진을 찍어 주고 있는데, 멕시코 사람들이 다가오더니 얼마냐고 묻더라. 내가 현지 ‘찍사’인 줄 알고 촬영비를 물어본 거다. 옆에 있던 동료들 모두 ‘빵’ 터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신아가: 우리도 인종차별…
방정범: 잠깐만, 잠깐만! 인.종.차.별↗?(일동 폭소) 인종차별까지는 아니고! 난 외모차별을 얘기 했을 뿐이다~
신아가: (웃음) 우리는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있다. 폴란드 갔을 때였는데 고등학생 애들이 상철이에게 맥주를 ‘딱’ 주고 갔다. 애는 좋아라하면서 받았는데, 뒤늦게 그게 동양 사람을 무시할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독일방문 때는 어떤 독일 놈이 나를 딱 보더니 동양원숭이 보듯 ‘꺄르르르’ 웃고 간 적도 있다.
민용근: 나는 해외에 가면 사람들이 그런다. “곤니치와!”
신아가: 그건 약간 자랑 같은데? 애(상철이)는 하물며 나에게 ‘연변스타일’이라고 한다. 비행기를 타면 스튜어디스가 중국말로 물어보기도 하고.
박정범: 중국사람 같다는 소리야 내가 정말 많이 듣지. 한번은 나를 중국인으로 오해한 사람에게 “내가 정말 중국 사람처럼 생겼냐?”고 물었다. 그때 그분의 대답이 최고였다. “아니요… 중국 사람은 아니고… 약간 대만 사람?”(일동 웃음) 중국사람 같다는 말을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했나봐. 그런데 우리 인터뷰 기사에 이런 것만 나오는 거 아니야? “인종차별 받았던 감독들! 이제야 인권 영화로 말한다!” 이런 거?
일 동: 하하하하.

Q. 인권 영화를 보면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을 다룬 에피소드가 많은데, 이건 살짝 번외편 같다.(웃음)
민용근:
조금 다른 경우인데, 외주 프로덕션에서 조연출로 일할 때 해외불법체류자들의 힘든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네팔 사람을 찍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분 같은 경우 불법체류자이긴 했지만 주5일 근무에 월 150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이 나를 자꾸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거다. KBS 마크 달린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까 멋있어 보였나보다. “너는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고, 참 부럽다”고 하는데, 그때 내가 80만원을 받고 있었거든. 원천징수 빼면 70만원 조금 넘는?(웃음)
박정범: 180이라고 얘기 했어야지! 혹시 코리안드림을 깬 거야?
민용근: 아니.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일 것 같아서 순간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그 형이 부럽기도 했거든. 알다시피 조연출은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하잖아. 얘기하다 보니, 그때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Q. 조금 거창한 이야기인데, 영화가 세상을, 혹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민용근:
‘얼음강’을 준비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영화에서처럼 여호와의 증인인 아들 셋을 둔 어머니도 있었다. 첫째 아들은 감옥을 3년 살고 나오고, 둘째 아들은 복역 중이고, 막내 아들은 영장이 나온 상태였다. 그 어머니는 첫째 아들을 감옥에 보낸 후 갱년기가 오셨다고 하더라. 그 얘길 하면서 방에서 우시는데, 그날이 마침 대선이었다. TV에서 “개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하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하는데… 당시 박근혜 후보만 빼고 나머지 후보들은 인권에 대한 공약과 대체복무제에 대한 공약이 있었거든. 박근혜 후보당선 소식에 “아, 우리 아들 가야겠네…” 이러시는데, 그 상황이 굉장히 묘했다.
일 동: 아…
민용근: ‘얼음강’ 모니터링을 할 때 여호와의 증인 분들도 오셨다. 그 중에 변호사 한 분이 계셨다. 여호와의 증인 병역 관련 변호를 하기 위해 사법고시를 패스한 분이신데, 본인이 처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이 사안이 논리적으로 옳고, 명명백백하면 언젠가 법과 제도가 바뀔 것이다’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두 차례나 합헌 결정을 내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 대통령의 지시로 채택된 대체복무제가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되고… 그러니까 이 분은 10년 가까이 싸우면서 계속 꺾인 거다. 그 분이 “법과 논리와 제도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가 선행되지 않으면 바위에 계란 치기라는 걸 느꼈다”고 했는데,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얼음강’이 ‘부러진 화살’처럼 와일드하게 개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의 생각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두한에게’, ‘봉구는 배달중’, ‘얼음강’(위에서 아래로)

Q. 이번 프로젝트를 통과하면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신아가:
많다. 이전에 참여했던 다른 감독님들이 그러셨다. 찍기 전에 몰랐던 부분을 많이 알게 됐고, 그것이 이후 작품에도 많이 반영됐다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노인세대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 분들이 말씀이 많으시다.(웃음) 사람을 한명 딱 잡으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기도 하시고. 예전에는 그게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외로워서 그런 거였더라.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은 많은데 주위에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외로운 거지. 이 영화를 하기 전에는 ‘어버이연합’ 분들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초였나?

Q. 올해 초라면 대선을 치른 후 세대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신아가:
맞다. 그 시기에 우연히 SBS에서 방영한 다큐를 보게 됐다. ‘어버이연합’에 계신 분과 진보 쪽 청년이 상대의 공간에 가서 서로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보면서 사람의 옷을 벗기려면 햇볕을 따뜻하게 내려야지 바람을 내리면 더 꽁꽁 싸맨다는 걸 느꼈다. 저 분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귀를 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봉구는 배달중’에 이런 것까지 잘 담아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느끼신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박정범: ‘무산일기’도 그렇고 이번 영화도 그렇고 반성문 쓰듯 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내 죄를 스스로 사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치유 받았다는 느낌도 들고. 나에겐 결국 미안함을 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찍는 영화 모두가 인권영화가 아닌가 싶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Q. 동의한다. 결국 모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니까. 마지막 질문이다. ‘어떤 시선은 OO다’ 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신아가:
‘어떤 시선은 옥수수다!’ 옥수수 알들을 봤을 때 색들이 조금씩 다르잖아. 검은 색도 있고, 노란 색도 있고. 그런데 어쨌든 결국에는 모두 옥수수다. 어떤 시선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상철: ‘어떤 시선은 찜질방이다’ 맥반석방, 황토방, 얼음찜질 방 등 다양하게 있으니, 취향에 따라 담아가길 바란다.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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