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갈게요!” 촬영 스텝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현장은 일순 조용해졌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던 10월의 어느 날, KBS2 ‘왕가네 식구들’ 현장에서는 가을날 안방극장을 훈훈하게 덥힐 가족드라마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별관 세트장. 어두침침한 세트장 한편에서는 허세달(오만석)네 가족의 둘째 딸 허영달(강예빈)과 호시탐탐 며느리 왕호박(이태란)의 돈을 노리는 극성맞은 시어머니 박살라(이보희)의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기 전에는 실제 모녀사이처럼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이내 촬영 스텝의 외침과 함께 호흡을 다잡았다. NG 한 번 없이 단번에 자신들의 분량을 소화 내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니 ‘왕가네 식구들’의 인기 이유를 단박에 깨닫게 했다.
지난 8월 31일 처음 방송된 ‘왕가네 식구들’은 연어족, 처월드, 캥거루족 등 현대가족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를 현실적으로 풀어내 첫 회부터 19.7%(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 전국시청률 기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말극 1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나문희, 김해숙, 이병준, 조성하, 오현경, 이태란 등의 연기파 배우들과 이윤지, 한주완 등의 신인배우들이 대거 등용된 ‘왕가네 식구들’은 ‘역지사지 드라마’라는 새로운 가족드라마의 수식을 탄생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왕가네 식구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적인 단어보다도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식구’라는 단어에 방점을 뒀다. 두런두런 식탁에 둘러앉아서 찌개에 같이 숟가락을 넣어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집에 살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왕가네 식구들’이 식구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유독 드라마 속에서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트장 한편에 마련된 임시 주방에서는 밥 먹는 신에 필요한 소품 준비가 실시간으로 이뤄졌다.
빈틈없이 적힌 촬영 일정표를 바라보던 조리 담당은 “오늘은 다 같이 밥 먹는 신이 없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이것(준비한 음식)의 두 세배는 더 준비해야 한다”며 가족드라마의 고충을 털어놨다. 마침 다음 신을 위한 음식 준비에 분주하던 조리 담당은 “이 음식들은 다 촬영 전에 미리 만들어 오는 건데, 촬영이 끝나면 배우들과 제작진이 모두 먹어치워서 남는 게 없다”며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같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왕가네 식구들’에 등장하는 왕봉(장용)과 허세달(오만석) 두 집안의 마음의 거리는 멀었지만, 실제 세트장의 거리는 지척이었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사로잡았던 부분은 세트의 디테일.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은 두 집 안의 거실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개인 공간에도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명품샵에 근무하며 월급 타면 자기치장 하기에 바쁜 허영달의 방에는 이름만큼이나 허영스러운 구두, 화장품 등이 널려있었고, 아이들의 방에는 유아용 도서와 장난감이, 허세달의 집안에는 결혼사진을 비롯해 가족사진, 가계부 등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소품이 놓여있었다. 허세달이 거실 벽면에 자랑스레 걸어놓은 ‘아파트 매매계약서’조차도 날짜, 금액, 주소 등이 빼곡히 적혀 있을 정도라니, 정말 말 다했다.
“엄마! 이거 내꺼야!” 어느샌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타난 이윤지는 촬영장을 거니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영화 ‘깡철이’ 속 유아인의 어머니 순이 역으로 눈물의 연기를 선보인 김해숙은 촬영 전 이윤지와 리허설을 하며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주방에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광박이’ 이윤지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의상이 바뀐 채 ‘왕가네’ 마당 샌드백 앞에선 그녀는 ‘왕가네 식구들’을 통해 재발견한 몸개그 실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실제 녹화를 방불케 하는 액션으로 바닥을 굴렀다. NG 한 번 없이, 일말의 어색함도 없이 ‘나름의 액션신(?)’을 소화해낼 수 있었던 데는 끊임없는 리허설과 본인의 노력이 컸다.
얼마 뒤 왕호박 역의 이태란과 이윤지가 세달내 거실에서 만났을 때는 촬영장에 정적이 흘렀다. 눈물 연기가 포함된 중요한 감정 신이 있는 순간이었기에, 촬영장의 스텝들도 숨소리라도 들릴까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감정선을 잡는 배우들이 서로 촬영 전 대사를 주고받기를 5분. “자, 갑니다!”라는 액션 사인과 함께 연기에 돌입한 두 배우는 한 쇼트에 모든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던 것은 물론이고, 마주한 배우뿐만이 아닌 주변을 서성이던 스텝들과 기자의 마음마저 뭉클하게 하는 눈물 연기를 펼쳤다. 두 사람의 신이 끝나고 “오케이, 컷!” 소리가 정적을 깨며 세트장에 울려 퍼졌고 지켜보던 제작진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들의 연기에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연기에 몰입했던 두 배우는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을 훌쩍여야 했다. 신이 끝나도 멈추지 않는 눈물은 그들이 배역에 얼마나 몰입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오후 7시,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될 때까지 ‘왕가네 식구들’의 세트장은 쉴 틈 없이 분주했다. 촬영이 지체될까 다음 신의 의상을 준비하기 위해 촬영장을 달리는 배우와 그런 배우들이 애써 잡은 감정이 깨질까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에 임하는 제작진의 태도에서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읽혔다. 드라마의 메시지만큼이나 따뜻했던 ‘역지사지’의 태도 촬영에 임하는 배우와 제작진들, 그 뜨거운 열정이 브라운관을 넘어 시청자의 마음에 가닿는 일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일일 것만 같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