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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밖으로 나온 웬디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KBS2 ‘굿 닥터’는 그야말로 한 편의 동화에 가까웠다. 경쟁으로 점철된 세상 속을 사는 어른들을 위한 가슴 따뜻한 이야기.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만 같았던 ‘굿 닥터’ 속 피터팬 박시온(주원)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던 이유다. 그리고 피터팬이 세상 밖을 나오자 주변인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배우 문채원이 연기한 차윤서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던 것도 그즈음이다.

배우 문채원에게 ‘굿 닥터’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극 속에서 서번트 신드롬(자폐증이나 지적장애를 지닌 이들이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겪고 있는 주원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간 남성 중심으로 그려졌던 메디컬 드라마에서 주체적인 여성을 맡아 연기하는 일은 배우로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데뷔작 SBS ‘달려라 고등어’ 이후 SBS ‘바람의 화원’ ‘찬란한 유산’, 영화 ‘최종병기 활’, KBS2 ‘착한남자’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문채원은 ‘굿 닥터’를 기점으로 새로운 도전을 앞뒀다. 차기작을 놓고 고심 중이라던 그녀는 우리에게 또 어떤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Q. ‘굿 닥터’의 차윤서로 5개월을 살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유독 신이 나서 연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문채원: 작년에 ‘착한남자’를 찍을 때는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내가 까부는 느낌이었다(웃음). 이번에는 분위기 메이커 주상욱을 중심으로 배우들 간에 유머코드가 잘 맞아서 현장에서도 신이 났던 것 같다.

Q. 작품이 끝나고 ‘굿 닥터’에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는 수식도 붙었다.
문채원: ‘굿 닥터’ 대본 1, 2부를 읽고 난 뒤에 문뜩 ‘커피프린스 1호점’이 떠올랐다. 의학 드라마인데도 기분 좋은 설렘과 캐릭터들의 소소한 느낌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서번트 증후군을 겪고 있는 시온이 의사가 되고 윤서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언뜻 보면 판타지 같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굿 닥터’에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겼다. 실제로 작품을 준비하며 의사들을 만나 보니, 드라마처럼 어두운 세계는 아니더라(웃음). 동화라는 수식도 다 상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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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작발표회 때 남성 중심의 메디컬 드라마의 틀을 깨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의도했던 바가 잘 표현됐나.
문채원: 항상 한 번쯤은 의사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의학드라마는 매년 한 두편씩은 제작이 되니까. ‘굿 닥터’의 차윤서는 이미 집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의학드라마에서 여성이 맡았던 역할과는 차이가 있다. 멜로 부분도 마찬가지다. 시온의 선배의 입장에서 멜로를 풀 수 있다는 점이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매력을 느꼈다.

Q. 시청자 입장에서는 ‘자폐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일반인이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일었다. 물론 그런 사례가 왕왕 있다고 하지만, 드라마에서 다뤄진 적이 없었기에 연기로 풀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문채원: 사실 처음에는 ‘굿 닥터’를 하면서 의학드라마가 나에게는 낯선 장르이기 때문에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만 골몰했다. 특히 이런 식으로 사내 커플이 되고 멜로 라인이 확장될 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웃음). 중반부에 작가가 나에게 “시온과의 멜로 구도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으면 좋겠냐”고 물어서 “희망적으로 끝나면 좋겠다”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나도 조금 망설여졌던 거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차윤서가 사랑을 주는 이야기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드릴 수도 있는 건데, 내가 그 지점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더라. 곧장 전화해서 “써주면 써주는 대로 표현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 후 아니나 다를까, 후반부에 갑자기 멜로의 비중이 커졌다(웃음). 이런 방식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가 없어서 연기하며 스스로 ‘이게 공감대를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도 많이 했다. 사랑은 둘째로 치고 윤서가 시온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인지하기 까지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Q. 그런 우려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실제로 화면에는 두 사람의 사랑이 정말 아름답게 그려졌다. 특히 베란다 세레나데에 이은 시온의 환상 신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더라(웃음).
문채원: 베란다 신은 정말 별 생각없이 찍은 신이다(웃음). 전날 밤샘 촬영을 마치고 예쁜 그림을 담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던 장면이다. 자연광을 이용해 찍었다는 점도 그렇고 신 자체를 어렵게 해석하려 하지 않아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그것과 별개로 시온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톤 조절이었다.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 그리고 시온이 내 마음을 잘 알 수 있도록 가르쳐주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표현됐던 게 주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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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굿 닥터’ 수많은 의학드라마 중에서도 소아외과를 다룬 독특한 케이스다. 그에 따른 어려움도 있었겠다.
문채원: 처음부터 의사라는 직업적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지는 않았다. 가운을 입고 의사처럼 보이는 것보다도,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더운 여름날 수술신이 몰려 있어서 힘들었다는 점?(웃음)

Q. 시온의 성장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윤서와 김도한(주상욱)의 성장이었다. 윤서에게 그 계기를 만들어준 에피소드는 무엇이었을까.
문채원: 테이블 데스(table death, 수술 중 사망)다. 물론 윤서가 테이블 데스를 경험하고 슬픔을 느끼고 그 상처가 아물어가면서 성장하는 것도 있었지만, 테이블 데스는 나 스스로도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수술신을 촬영할 때 의사 선생님이 옆에서 지켜보시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 의사 선생님이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리신 듯 눈물을 보이시더라. 그리고 내 손을 꽉 잡아주시는데 그때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아픔을 겪고 일어나야만 다음에 같은 아픔을 겪게 되도 견딜 수 있다는 것. 윤서로서도, 나로서도 변화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Q. ‘굿 닥터’는 특히 현업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반응이 좋았던 작품으로 안다.
문채원: 소아외과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조명된 적이 없었기에 의사 분들이 호응을 해주신 것 같다. 또 아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힐링이 되는 측면이 있을 거고. 처음에 작품에 들어갈 때부터 ‘대한민국의 환자들뿐만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좋은 드라마로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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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굿 닥터’가 배우 문채원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물론 차윤서 캐릭터에는 ‘착한 남자’의 서은기와 같은 진취적인 모습도 담겼지만, 당신이 이전에 선보인 연기와는 질감이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문채원: 작품을 선택할 때 나는 내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 캐릭터에 욕심이 많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여배우는 남자 배우들에 비해서 배역 선택의 폭이 좁지 않나. 또 한국 정서상 멜로가 빠질 수 없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고. 이왕이면 작품 속에서 내가 주체가 돼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캐릭터를 맡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는 것은 앞으로도 할 기회가 많을 것 같으니까(웃음). 그런 측면에서 차윤서 캐릭터는 나의 의도가 나름대로 잘 반영된 인물이었다.

Q. 그럼 ‘굿 닥터’가 당신의 행보를 이어나갈 성공적인 디딤돌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문채원: ‘굿 닥터’를 찍으면서 다시 한 번 시청자의 힘을 느꼈다. 좋은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지는 데는 제작진과 배우의 노력만큼이나 시청자들의 사랑이 크게 작용한다. 시청자들이 마음을 열고 ‘굿 닥터’를 봐주셨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기에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하고 더 공을 들여 작품을 찍을 수 있었다. 어떤 배우라도 퇴보하는 배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슬럼프는 겪을 수 있다. 배우의 성장이라는 것은 딱 잘라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착한 남자’로 성장한 부분이 ‘굿 닥터’에 반영됐을 거고, 그 이후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배우로서 앞으로의 행보가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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