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에서 이어짐) 간판도 없는 선술집에서 의기투합한 박계완, 황영원은 밴드 결성의 꿈을 키웠다. 한국적 느낌이 나는 자신들만의 음악을 제대로 해보자고 방향타를 잡았다. “영원이가 시조새나 아이돌스타 시절에 공연하는 걸 보고 마음에 들어 그때부터 함께 밴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박계완) 아시안체어샷 결성 이전에 펑크 밴드 시조새, 아이돌스타 등 다양한 밴드를 거친 리드보컬 황영원도 상처로 얼룩진 지난한 무명시절을 보냈다. “예전에는 그냥 폼을 잡으려고 밴드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계완 형을 만난 거죠. 하지만 결성 초기에는 1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함께 술만 마셨습니다.“(황영원)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해 뒤늦게 보컬리스트가 된 황영원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미완의 기대주다. 폭발적인 에너지는 기본이고 뽕필이 살짝 스며있는 그의 보컬에는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애절함이 있다. 본인은 ‘노래를 못한다’고 말하지만 드럼 박계완도 무대에서 만만치 않은 노래 실력을 들려준다. 두 사람 중에 리드보컬을 어떻게 결정했는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두 사람은 ‘노래 실력은 자신이 한 수 위’라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였기 때문. 서로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의 가창력을 내세우는 두 사람의 뻔뻔한 모습에 배석한 모든 사람들은 웃음보가 터졌다.



사연은 이렇다. 밴드 결성에 합의한 박계완, 황영원은 리드보컬을 누가할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팽팽하게 맞섰다. 결론이 나질 않았다. 결국 친구 3명을 참관인 자격으로 산울림 소극장 옆 ‘땡땡이 노래방’으로 불러 진검 노래대결을 벌였다. “점수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죠. 누가 봐도 심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제가 잘했으니까요. 계완 형도 노래는 잘 부르지만 너무 깔끔하게 부르는 스타일이라 록 음악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저랑은 그냥 급이 달랐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저는 보컬을 별로 하기 싫었고 형은 은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워낙 급이 달라 만장일치로 제가 보컬로 결정되었습니다.(웃음)”(황영원) 이에 박계완은 황영원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사실 노래실력은 영원이보다 제가 월등했지만 그냥 동생에게 양보를 했던 거죠.”라고 맞받아쳤다.

리드보컬 황영원은 1983년 5월 15일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자마자 서울 태릉으로 올라왔다. 아버지 3형제가 함께 운영한 공릉동의 샤시 공장과 그 주변은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였다. “당시 공장 주변 계곡에는 물고기가 참 많았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근처 양어장에 탈출한 잉어들을 잡느라 학교에 빼 먹기도 했습니다.”(황영원) 그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공릉초등학교 2학년 때. 당시 유행했던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스텝 바이 스텝’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꿈은 뮤지션이 아닌 축구선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완도에서 올라와 함께 살았던 대학생 사촌형은 그에게 메탈음악을 경험시킨 음악 메신저였다. 그 덕에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건즈 앤 로지스, 보스톤, 메탈리카 등 다양한 밴드음악을 섭렵했다.

황영원 어린 시절

태릉중학교에 진학하자 매일 같이 드럼을 치고 방에다 엑스재팬 사진을 붙여 놓은 고달순이란 이상한 아이가 있었다. 2학년까지 같은 반이 되어 친해졌다. 수련회 때 고달순이 반대표로 장기자랑대회에서 한 여자아이가 ‘소양강 처녀’를 부를 때 멋지게 드럼을 쳤다. 여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당시 남녀공학이었던 태릉중학교는 한 학급에 남자는 10명 정도였지만 여자는 30명이 넘을 정도로 성비가 불균형했다. 그래서 숫자가 부족한 남자 아이들의 인기는 대단했단다. “드럼 치는 친구 모습이 좀 멋있더군요. 수련회 이후 고달순 책상에 여자아이들이 ‘사랑해요’라는 쓴 스티커를 가득 붙여놓더군요. 이거다 싶었죠. 저도 인기남이 되고 싶어 3학년이 되면서 기타를 잡기 시작했습니다.”(황영원)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교실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2달 만에 기타 교실이 없어졌다. 자신감도 없고 기타를 잘 치지는 못했지만 밴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살짝 생겼다. 그래서 태릉고에 진학하면서 5인조 스쿨밴드 일루션에 들어갔다. 한 번도 쳐보지 않은 베이스를 맡았다. “그때 제가 키가 크고 나름 반항한다는 마음으로 두발 자율도 아닌데 머리를 길게 길러 인기가 많았습니다. 보통 학교 축제 무대는 2학년 형들이 나가는데 실력이 딸려 1학년들이 싸워 같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꽉 찬 학교 체육관에서 했던 첫 무대에서 객석의 환호성을 들으니 밴드 하는 것이 이런 맛이구나 싶더군요.”(황영원) 사춘기가 된 그는 공부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2000년 고2때 학교를 자퇴하고 아현산업정보학교 실용음악과에 들어갔다. “당시 음악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베이스도 한 음만 잡고 치는 정도였고 수업시간은 거의 자는 시간이었죠. 그래도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라 학교친구가 클럽공연하자고 제의해 다른 학교 친구들과 무슨 로즈인데 이름이 가물가물한 밴드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공연 2번 하고 리더 친구가 잠수를 타 밴드는 땡 쳤죠(웃음). 첫 밴드인데 시작부터 불길했습니다.”(황영원) 그래서 고3 형, 누나들과 함께 6인조 밴드 스캣의 멤버가 되었다. 멤버 중 4명이 여자였던 스캣은 여자보컬의 탁월한 가창력 덕에 서울시 고교 창작가요제, mbc 청소년 창작가요제는 물론이고 각종 청소년 가요제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선배들이 졸업하면서 밴드 스캣은 자동으로 해체되었다. 3학년이 된 황영원은 남자아이들과 4인조 밴드를 결성해 mbc 청소년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았다. “대회만 3번 나가고 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저는 스스로 음치라 생각해 노래는 부르지 않았습니다.”(황영원) 졸업을 앞두고 첫 밴드에서 잠수를 탔던 친구가 연락을 해 드럼 치는 고달순을 불러 4인조 펑크밴드 피즈(fiz)를 결성했다. “리더 친구가 갑자기 저와 달순이를 잘라버리더군요. 충격이었죠. 2개월 후 다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와 들어갔는데 1년 후, 보컬을 또 자르더군요. 나머지 멤버들끼리라도 해보자고 만든 밴드가 아이돌스타입니다. 그런데 3개월 후 저는 또 잘렸는데 밴드활동도 하지 않더군요.”


밴드활동에 회의감이 든 황영원은 아현정보산업학교를 3기생으로 졸업한 후, 미디로 벨소리를 만들고 노래방 반주를 찍는 회사에 들어갔다. 밴드를 그만둔 후, 온라인 게임에 빠져 살았던 그는 돈을 벌면서 여유가 생기자 다시 음악을 하고 싶었다. 성공해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현지에서 밴드 아이돌스타를 재건해 처음으로 보컬을 맡았다. 2년 동안 열심히 연습하고 내공을 쌓던 중, 리더 친구가 같이 밴드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다시 통화를 하자 분노가 가득했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일본 클럽에서 나름 인정을 받았지만 비자연장이 쉽지 않았고 돈도 떨어진 그는 한국에 가서 다시 해보자는 마음으로 2008년 귀국을 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5만원하는 합주실을 개조해 3개월 정도 리더 친구와 밴드 결성을 준비하던 도중 또 밴드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 친구와는 애증의 관계입니다. 그 친구는 곡도 잘 쓰고 음악적 재능은 천재라 생각합니다. 다른 밴드 멤버로 록 페스티발 무대에 서는 모습이 부러웠지만 원래 성격이 이렇구나 싶어 함께 밴드 할 생각을 확실하게 접었습니다.”(황영원)

2007년 황영원 일본 동경에서 활동한 밴드 아이돌스타 공연 모습

밴드 아이돌스타를 재건해 활동을 시작했을 때 황영원은 박계완을 처음 만났다. 그 후 밴드가 깨져 2인조 펑크밴드 시조새 활동을 시작했을 때 박계완이 밴드결성을 제안해 왔다. “연주보다 얼굴을 보고 뽑았다고 하더군요(웃음). 형이 직접 전화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은 회까지 사주더군요.”(황영원) 당시 박계완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강원도 동해 바닷가에서 열린 해변축제 무대에 출연한 밴드 배다른 형제의 공연을 보여줬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충격을 먹었기 때문. “밴드 하는 사람에게 공연은 마지막 무기입니다. 여자친구가 아무런 감흥을 보이지 않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내 음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영원에게 연락했던 거죠.”(박계완) 밴드 결성에 의기투합했지만 두 사람은 만나면 술만 마셨다.

새로운 밴드는 3인조 구성을 염두에 뒀다. “멤버가 많은 게 싫어 심플한 3인조 구성을 택했습니다. 보컬만 하는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았던 적이 없어 보컬은 뽑지 말자고 했죠.”(박계완) 32살, 28살이 되어 나이백이가 된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자신들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담보한 한국적인 록. 밴드 이름과 음악적 방향이 정해지자 리드기타가 필요했다. 박계완은 10년 지기 손희남에게 연락했다. 마침 밴드를 쉬고 있었지만 손희남은 밴드 활동에 부정적이었다. 그 역시 여러 밴드를 거치며 상처를 입어 혼자 일렉트로닉 음악 작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래서 세션 개념으로 잠시 도와줄 생각으로 참여했지만 밴드 합이 너무 잘 맞아 결국 정식 멤버가 되었다. 2010년 6월 탁월한 연주력을 지닌 리드기타 손희남이 가세하면서 비로소 3인조 아시안체어샷의 라인업이 구축되었다. (part3으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황영원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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