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홍대 인디씬에서 핫한 밴드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3인조 록밴드 아시안 체어샷(Asian Chairshot)이다. 국악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한국적 한의 정서를 기막히게 표출하는 개성 넘치는 이들의 노래들은 과연 루키밴드가 맞는지 귀를 의심해야 할 정도.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이들의 음악은 거칠고 야성적인 멤버들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처음 듣는 청자의 가슴에 생치기를 남길 정도로 치명적인 음악은 다시 듣지 않고는 배겨낼 재주가 없다. CJ 튠업 9기 출신인 이들은 최근 6팀이 자웅을 겨루는 EBS 헬로 루키 연말최종결선에 진출하며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지난 5월 말, 한지 느낌이 나는 3단 게이트폴더 재킷의 이미지가 강렬한 이들의 데뷔음반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개인적으로 한국 록의 정점이라 생각하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공개 음반에 수록된 몽환적인 음악들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3인조 구성도 그렇고 한국적 이미지를 록에 접목한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구사하는 것까지 마치 엽전들이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무한 감동이 회오리쳤다. 실제로 이들은 외국 유명밴드보다 들국화나 산울림 같은 국내 밴드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다. 호기심이 발동해 홍대 클럽 스트레인지플룻에서 열렸던 공연에 찾아갔다. 라이브 사운드를 직접 들어보니 음반으로 접한 감흥을 뛰어넘는 생동감 넘치는 무대에 홀딱 반해버렸다. 9월 말에 이들의 인터뷰를 진행해 칼럼을 쓰기까지 무려 4개월 넘게 공을 들인 셈이다.
지난 6월 아시안체어샷은 싱가포르 ‘베이비츠 페스티벌(Baybeats Festival)’에 초대받아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돌아왔다. 특히 열정적으로 내달리며 한이 배어나오는 추임새와 코러스가 인상적인 ‘탈춤’은 외국인이 더 좋아하는 곡이다. “서서 보는 관객들이 있었을 정도로 전석이 매진되었는데 공연을 끝난 후 저희 음반을 사려고 길게 줄을 서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한류스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공연 후 유튜브 영상까지 찾아내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찾아와 ‘좋아요’를 누르고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아주는 것을 보고 내년에도 초대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박계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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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체어샷 멤버들의 사진촬영은 경기도 파주시 금촌시장 인근에 있는 오래 된 마을로 선택했다. 마치 60-70년대에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빈티지 분위기로 가득 찬 공간이다. 멤버들의 피쳐사진과 인터뷰는 금방이라도 가을비가 내릴 것 같은 날에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우중충했던 날씨도 걱정스러웠는데 리드보컬 황영원이 전 날 공연에서 베이스 기타에 발가락을 찧는 사고에다 주문했던 의상과 소품도 없이 멤버들이 나타나 살짝 멘붕이 왔다. “저희들도 어떤 이미지로 갈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저희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평상시 모습 그대로 왔습니다.”(박계완)
멤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체샷이 생애 마지막 밴드가 될 것”이라 말한다. 결성된 지 불과 2년 남짓 된 루키밴드이건만 마지막 밴드라니? 이들에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황영원(보컬, 베이스), 박계완(드럼), 손희남(기타)은 10년 이상 홍대 인디음악씬에서 다양한 밴드를 거치며 음악내공을 쌓아온 중고 신인들이다. 공식적으로 리더 시스템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실질적 리더는 연장자인 드럼 박계완이다. 그는 강원도 태백에서 교육자 집안의 2남 중 막내로 1979년 11월 27일 태어났다. 2살 터울인 그의 형 정완은 아시안체어샷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뮤직비디오 감독이다. 부모님의 러브 스토리는 흥미롭다. 정식 등단한 시인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강릉에서 태백으로 전근을 갔다. 그때 막내 이모의 담임이 되어 장난삼아 처제, 형부라 부른 인연으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태백에서 옷가게를 운영했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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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완 어린시절
어린 시절 장난 끼가 넘쳤던 박계완의 주위에는 늘 친구가 많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고 석탄을 나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놀고, 산에서 친구들과 본부놀이를 했던 추억으로 덧칠되어 있다. 박계완은 황지국민학교 1학년 때 다녔던 피아노 학원 정기발표회 때 합창을 지휘했을 정도로 음악성이 남다른 아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강릉으로 전학을 가면서 친구가 사라졌다. 이후 중학교 때까지 외톨이로 지냈던 그가 음악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강릉 경포고에 들어가 40인조 관악 브라스 밴드에 타악기 주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하교 길에 흘러나오는 합주소리를 듣고 반했습니다. 무작정 밴드부로 찾아가 드럼을 치고 싶다고 했죠. 그때 저희 학교는 강릉에서 음악을 제일 못하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군복을 입고 나타난 음악선생님이 올해 목표는 금상이라며 말도 안 될 정도로 합숙까지 하며 맹연습을 시켜 전국 관악경연대회에 나가 금상도 받고 은상도 받았습니다. 그 바람에 제 드럼 실력도 부쩍 늘게 되었죠.”(박계완)1995년 당시, 강릉에는 고등학생이 주축이 된 록밴드가 하나도 없었다. 기타를 쳤던 학교친구 조성훈이 그에게 밴드를 하자고 제의했다. 마음이 동했다. 속전속결로 경포고 2명, 명륜고 1명, 강릉상고 1명, 강릉농고 1명 등 강릉시내 각 고등학교에서 참여한 5인조 록밴드 ‘천명아’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리더 격인 조성훈이 중학교 때 지어놓은 이름인데 ‘하늘을 울리는 아이들’이란 의미입니다. 밴드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이름을 넣으면 기에 눌러 좋지 않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멤버들 중에는 정말로 몸이 아픈 친구들이 생겨나 겁이 났었습니다.”(박계완) 주로 엑스저팬이나 메탈리카 음악을 카피했던 강릉 고교연합밴드 천명아는 조성훈이 창작한 ‘거짓 이데아 공장’이란 창작곡도 발표했다. 고3때는 단독공연은 물론이고 대학 축제에까지 초대 받아 영동지역에서는 나름 유명세를 날렸다.
음악이 좋았지만 전문음악인이 될 생각이 없었던 박계완은 1999년 6월, 원통 12사단에 공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밴드 활동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를 했던 멤버들은 제대를 하고 2001년 함께 상경했다. 홍대 앞 라이브 클럽 프리버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자체적으로 싱글을 만들었는데 정식 발매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 곡도 2개 정도 만들었는데 멤버들 반응이 좋지 않아 스스로 창작에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3년 정도 열심히 활동했지만 반응이 없어 활동이 시들해 졌습니다.”(박계완)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고 싶었던 박계완은 2003년 재즈아카데미 드럼과에 들어가 14기로 졸업을 했다. 밴드 청명아 활동을 하면서 4인조 밴드 코스믹4 활동을 병행했던 박계완은 2007년 4곡이 수록된 EP를 발표했지만 쫄딱 망했다. 이어 4인조 펑크 밴드 비비럭키타운을 거쳐 3인조 밴드 배다른 형제에 참여했다. 별다른 활동이 없어 의기소침해진 그는 결국 고향 강릉으로 낙향해 반년 정도 백수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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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박계완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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