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왕가네 식구들’ 포스터(위쪽), SBS ‘결혼의 여신’ 포스터
추석은 가족이다. 귀경길에 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긴 차량행렬을 견디는 사람들, 열차 입석도 마다치 않는 귀경객들 모두 저마다 가슴 속에 고향을 품는다. 힘든 여로의 끝엔 보름달처럼 환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미소가 기다리고 있고, 아들, 손주, 며느리가 한데 모인 시골집에는 음식 익어가는 향기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처럼 추석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오순도순 송편을 빚어 나눠먹는 가족의 따스한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현실 속 추석을 보도하는 뉴스는 때로는 피곤하고 때로는 차갑다. 가족이라는 존재가 가진 양면성도 그러하다. 나를 품어주는 더 없이 따뜻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남보다 못한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여하튼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사회인 가족은 인간의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올해 추석에도 우리는 가족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할 것이다. 취업이나 결혼 스트레스를 주는 친척들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라거나, 시월드 혹은 처월드와 가장 크게 충돌하는 명절에 대처하는 방식 등 인터넷을 통해 유행어처럼 회자되는 것들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2013년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민족 대명절 추석을 맞아 SBS ‘결혼의 여신’과 KBS2 ‘왕가네 가족들’, 두 편의 가족드라마로 2013년 가족의 현실을 짚어봤다.
드라마가 묻는다 // ‘왕가네 식구들’의 처월드 vs ‘결혼의 여신’의 시월드
KBS2 ‘왕가네 식구들’(왼쪽), SBS ‘결혼의 여신’ 방송화면 캡쳐
‘왕가네 식구들’ : 여자들에게 시월드가 있다면, 남자들에게는 처월드가 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다”는 글귀는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 ‘왕가네 식구들’은 한동안 고부관계에 치중했던 가족이야기를 처월드로 끌어왔다. ‘왕가네 식구들’에는 처월드를 살고 있는 한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왕씨 집안의 장녀 왕수박(오현경)과 맏사위 고민중(조성하) 부부는 처월드의 실체를 보여준다.잘 나가던 사업가이자 장모의 자랑거리였던 민중은 사업이 망하고 나서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민중은 철없는 아내 수박과 유난스러운 장모 이앙금(김해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황금알을 낳지 못하는 사위를 바라보는 앙금의 표정은 표독스럽다. 민중은 사업이 망한 후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감에도 무너진 가정을 되살려보고자 택배 상자를 들고 백방으로 뛰지만, 장모를 등에 인 수박은 마치 호화로운 생활과 외제차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투정만 부린다.
민중-수박 부부의 이야기는 비단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왕가네 가족들’은 이들을 통해 근래 두드러지는 이혼율에 장서갈등이 한 몫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물론 시월드가 사라지고 처월드가 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한 발짝 늦게 현실을 반영하는 드라마가 처월드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놓았다는 사실은 그 만큼 장서갈등 문제가 대다수 가족에게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증거일 터. 조만간 장인, 장모에게 시달리는 사위가 드라마의 중심에 서는 작품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결혼의 여신’ : 유구한 역사의 시월드는 KBS2 ‘사랑과 전쟁’의 단골소재, 유부녀들로 하여금 네이트판에 눈물 섞인 한탄을 늘어놓게 하는 명성 자자한 ‘시.월.드’. ‘결혼의 여신’은 이 지긋지긋한 시월드를 또 다시 들추는 드라마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것을 내놓는다는 시월드는 이번에도 만만치가 않다.
국내에 손꼽히는 재벌가에 시집간 송지혜(남상미)는 시월드를 견디다 못해 결혼 1년 만에 기권(이혼)을 선언한 상태다. 폭언은 당연하고, 때로는 폭력까지도 쓰는, 또 아들의 잘못을 가리려 며느리의 동생을 감옥으로 보내버리는 시월드 계의 어벤져스. 그러나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이런 재벌 시월드를 경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공감보다는 되려 ‘재벌가 시월드는 정말 저런가요?’라는 궁금증을 자극할 뿐이다.
‘결혼의 여신’에서는 재벌 시월드가 아닌 또 다른 시월드도 등장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민폐 시월드다. 집이 없어 며느리 집에 얹혀살면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얄미운 시어머니, 그러면서도 바람피운 아들을 두둔하고 며느리를 구박하는 안하무인 시월드는 어쩌면 재벌 시월드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튼 2013 드라마에서도 시월드는 며느리들에게 힘겨운 세상이다. 10년쯤 지나면 시월드가 롯데월드처럼 즐거워 질 수 있을까?
드라마가 묻는다 // ‘왕가네 식구들’ 속 연어와 캥거루 vs ‘결혼의 여신’ 속 애틋한 핏줄
KBS2 ‘왕가네 식구들’(왼쪽), SBS ‘결혼의 여신’ 방송화면 캡쳐
‘왕가네 식구들’: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캥거루와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 ‘왕가네 가족들’에는 캥거루와 연어를 꼭 닮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왕씨 남매인 삼촌 왕돈(최대철)과 왕씨 집압의 셋째딸 왕광박(이윤지)은 캥거루족이다. 취업도 못하고 독립할 여력도 없이 부모 품에 기생하는 왕돈과 왕광박은 대한민국 20대의 슬픈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민중-수박 부부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잘나갔던 부부는 사업 실패 후 처가로 들어와야 할 위기에 처한다. 두 유형 모두 2013년 현실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상황이다. 이들의 존재는 이제는 편안한 노후를 설계해야 할 60대 부모들이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상황을 연출하며 극에 현실감을 더한다.‘왕가네 식구들’은 슬픈 현실을 희화화시키면서 그에 대한 대안도 제시한다. 광박이가 사랑에 빠진 최상남(한주완)은 ‘왕씨네 식구들’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융자에 시달리며 백수로 나날을 보내는 왕씨네 둘째 딸 왕호박(이태란)의 남편 허세달(오만석)과 왕돈의 대척점에는 최상남이 있다. 상남은 학벌보다는 전문적인 기술을 익혀 삶을 꾸려 나가는 진취적인 인물로 ‘학벌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왕가네 식구들’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혼의 여신’ : ‘결혼의 여신’ 속 시월드는 무시무시하지만, 친부모와 친자녀, 즉 핏줄관계는 그래도 사랑이 전제돼 있다.
지혜에게 친정아버지(백일섭)는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이며, 아버지에게 딸 역시 그런 존재다. 며느리들에게는 마녀 같은 시어머니 정숙(윤소정)도 아들들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어머니다. 특히 둘째 아들 태진(김정태)에 대한 사랑은 각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입에 단 맛의 사탕을 물려주기 바쁘다.
민폐 시월드 애자(성병숙) 역시 며느리는 남이지만, 내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 외에도 현우(이상우)와 그의 어머니, 혜정(이태란)과 그의 가족도 서로에게 더 없이 애틋한 존재다.
2013년의 모든 핏줄들이 실제로도 애틋하고 눈물 겨울까는 의문이지만, 극악무도한 시월드와 비교하기 위해 작가는 핏줄로 이어진 가족들에는 서로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깔아두었다.
드라마가 묻는다 // ‘왕가네 식구들’, “인생은 돌직구다!” vs ‘결혼의 여신’, “인생은 재벌 아니면 로또”
KBS2 ‘왕가네 식구들’(왼쪽), SBS ‘결혼의 여신’ 방송화면 캡쳐
‘왕씨네 식구들’: 바람 잘 날 없는 왕씨 집안에 닥친 문제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왕가네 식구들’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선택한 방식은 제법 일관성 있다. 작가가 되겠다며 일등 신붓감의 조건인 학교 선생님 자리를 그만둔 광박이나, 앙금에게 구박받던 과거를 회상하며 ‘내 자식은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돈을 빌려달라는 제의를 단칼에 거절한 호박, 그리고 사업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건강한 몸 하나로 다시 일어서겠다며 택배업을 시작한 민중을 보면 마치 “인생은 돌직구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드라마틱한 우연이나 말도 안 돼는 설정에 기대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왕가네 식구들’이 공감과 힐링이라는 두 마리를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단적으로 보여준다.‘결혼의 여신’ : 일종의 악처럼 그려진 ‘결혼의 여신’ 속 시월드는 위기의 순간, 약자들 즉 며느리들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가고, 아들들은 적절한 중간자의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일관한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흔하디흔한 ‘시월드 디스’극의 전형처럼 며느리들의 고군분투 자아실현으로 문제해결의 과정을 제시한다.
바람피운 남편 탓에 마음고생을 적잖게 한 은희(장영남)는 위기의 순간 자신의 손을 잡아 준 또 다른 재벌가(반효정)를 통해 복수도 하고 제2의 인생도 찾는다. 물론 진짜 우리의 현실에서 위기의 순간 이토록 자주 재벌들이 나타나줄까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지혜의 문제는 진행 중인데, 아무래도 남편 태욱(김지훈)의 곁을 떠나 현우(이상우)와 손을 잡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혜는 결혼 전 짧지만 불처럼 사랑했던 현우를 잊지 못하고 있고, 현우 역시도 지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차, 대학후배 세경(고나은)을 만나 결혼을 결심했지만 평범한 자신과는 형편이 다른 부잣집 딸인 세경과 연신 삐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주 만나죠?”라는 지혜의 대사처럼, 드라마가 차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 우연의 범람 속에 지혜는 현우를 다시 만나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진정한 결혼의 여신에 등극하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결혼의 여신’ 속 인물들의 문제해결방식은 현실의 우리에게 적절한 참고사례가 되지는 못한다. 일단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재벌을 자주 만날 일도 없으며, 더구나 그 재벌이 내 일을 두 팔 벗고 도와줄 리도 만무하다. 또한 두 손 놓고 울기만 해도 문제를 해결해주는 우연들이 그렇게 자주 찾아올 만큼 운이 좋지도 못하니까.
드라마가 묻는다 // ‘왕가네 식구들’, “가족 정신의 기초는 역지사지” vs ‘결혼의 여신’, “가족이란…미워도 다시 한 번?”
KBS2 ‘왕가네 식구들’(왼쪽), SBS ‘결혼의 여신’ 방송화면 캡쳐
‘왕씨네 식구들’: “입장 바꿔 생각하자” 왕씨네 집안의 가훈은 ‘왕가네 식구들’이 의도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연어족, 캥거루족, 처월드, 학벌지상주의, 삼포세대 등 현실사회의 문제들과 극 중 가족들이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부족이 자리한다.특히 ‘왕씨네 식구들’에서 가장 왕봉(장용)은 이런 ‘역지사지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다. 사업이 망했다고 남편 민중에게 투정을 부리고, 시어머니의 첫 기일임에도 앙금의 환갑잔치에서 웃고 떠드는 수박에게 왕봉은 “나는 너를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며 목청 높여 큰딸의 모자람을 나무란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없더라도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 현실에 지친 2013년 대한민국 가족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왕봉이 보여준 ‘역지사지 정신’이 아닐까.
‘결혼의 여신’ : ‘미워도 다시 한 번?’ ‘결혼의 여신’에서 흔들리는 가정을 잘 지켜나가는 유일한 캐릭터는 바로 지선(조민수)이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시월드에, 철없고 능력 없는 남편, 여기에 사고만치는 자식들을 등에 인 실질적 가장이다. 그 뿐인가. 재벌가에 시집간 동생은 우울증에 걸렸고, 동서는 바람피운 남편에 복수하기 위해 집을 떠난 상황이라 이제는 시동생까지 건사해야만 한다.
어찌 보면 최악의 상황임에도 지선은 용기를 잃지 않는다. 미워죽을 것 같아도 모두가 내 가족이니, 불평만 늘어놓거나 주저앉지 않고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그 가정을 지켜나간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면 능력 없는 남편이지만 힘들 때 기댈 어깨가 있고, 얄미운 시동생이지만 월급 꼬박꼬박 주면 가정부로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선은 직장에서도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니 그녀야말로 진정한 결혼의 여신이 아닐까?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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