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라는 연기했다. 1980년 영화 ‘물보라’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녀는 그해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며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2013년, 금보라는 연기한다. MBC 주말드라마 ‘금 나와라 뚝딱!’(이하 ‘금뚝’)의 아들 현태(박서준)만을 바라보는 철부지 엄마 민영애 역을 맡아 절절함과 코믹함을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고, 오는 23일에는 케이블채널 tvN ‘감자별 2013QR3’의 왕유정 역으로 연기자로서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Q. ‘금뚝’의 민영애가 전형적인 악녀일 것이란 편견은 방송 첫 회에 깨져버렸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가.
한 명의 여자로, 악녀로 그리고 어머니로 살아야 했던 ‘금뚝’ 속 민영애는 금보라와 닮은 구석이 있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왕년의 여배우가 연기를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기까지 그녀의 인생에는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에 불현듯 몰아친 거친 파도와 같았던 인생의 여정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했다. 그리고 그 험난했던 항해가 남긴 내적 성장은 그녀를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거듭나게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전성기였어요.”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빚어낸 당당함은 여배우 금보라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을 닮은 붉은빛의 드레스를 빼입은 금보라는 카메라 앞에 서자 전에 본 적 없는 매력적인 눈빛을 반짝였다. 젊은 배우는 쉬이 흉내 낼 수 없는 삶에 대한 확신과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한 눈빛. 젊음이 떠난 자리에는 중년 여배우의 열정이 꽃피우고 있었다. 보라, 이 고혹적인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금보라: 정말 의외의 반응이다. 사실 처음에 섭외가 들어올 당시만 하더라도 민영애 역은 비중이 작았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이형선 PD가 “민영애 역은 선배(금보라)가 해주면 정말 좋겠다”고 부탁을 해왔기에 출연을 결심했다. 민영애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철부지면서도 예뻐야 한다(웃음). 코믹한 부분도 있지만, 그 안에 소박맞는 자식을 둔 엄마의 아픔과 소외된 부인의 외로움이 담겨야 했다. 이런 부분이 적절히 표현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것 같다.
Q. 민영애와 아들 박현태(박서준)와의 호흡은 진짜 모자 관계를 보는 듯했다. 젊은 연기자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케미’ 돋는 장면도 더러 있었다.
금보라: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박서준과 많이 맞춰본 게 도움이 됐다. 첫 촬영 들어갈 때 내가 서준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나 나나 긴장 바짝 하고 여기서 살아 남아야 한다. 연기는 한 번 맞출 때가 다르고, 열 번 맞출 때가 또 다르다.” 요즘 젊은 연기자들을 보면 스타일리스트나 매니저와 연기를 맞춰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건 대본 암기를 확인하는 정도의 수준뿐이 안 된다. 계속해서 연습해나가면서 둘만의 호흡을 만들어 갔다.
Q. 사실 민영애가 하는 행동만 보면 전형적인 악녀에 가까운데, 방송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웃음).
금보라: 민영애가 악녀라면 세상 모든 사람은 악인일 거다(웃음). 민영애도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조금 달랐다 뿐이지, 결국 사람은 다 똑같다. 민영애가 둘째 부인 장덕희(이혜숙)에게 치이고, 박순상(한진희)에게 구박을 받으니 나름대로 살길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다. 물론 그 방식이 조금 잘못돼서 악녀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겠나. 민영애도 사랑을 갈구하는 불쌍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Q. 절절한 장면과 코믹한 장면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기를 보며 맥을 잡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느꼈다.
금보라: 항상 대본을 보면서 신(scene, 장면)에 대한 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애와 현태는 철없어 보이는 모자 같지만, 그 안에 아픔이 담겨야 한다. 또 절절한 장면에서 한 명이 우는데, 한 명은 훌쩍거리기만 하면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감정 전달이 제대로 안 될 수 있다. 코믹한 장면이든 절절한 장면이든 두 사람이 같은 크기의 감정을 담아야 전달되는 감정이 배가되고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Q. 얼마 전 SBS ‘좋은 아침’에 특전사 출신의 아들과 출연해 아들에게는 “뭐든 직접 겪으면서 배워야한다”고 말했다. 극 중 현태에게 모든 애정을 쏟는 영애의 캐릭터와는 조금 상반된 모습처럼 느껴지더라.
금보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웃음). 현태는 태어날 때부터 천덕꾸러기로 낙인이 찍혀 장덕희 밑에서 고생을 하며 자랐다. 현태가 극 중에서 “말을 배우기 전에 눈치 보는 법부터 배웠다”고 말한 내용 그대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다. 문제는 주어진 상황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금보라: 이제는 어머니 역할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인생의 굴곡도 있었고 웬만큼 겪을 만한 것들은 다 경험한 뒤라서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하기가 수월했다.
Q. 물론 MBC ‘메이퀸’(2012)에서처럼 색다른 연기를 펼칠 때도 있지만, 최근에는 주로 어머니 역할을 맡고 있다.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나.
금보라: 자신이 확실하게 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어딘가. 어떤 역할에 전문이라는 수식은 배우로서 나의 경쟁력이기도 하고,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이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역할에 남들보다 월등한 부분이 있기에 캐스팅하는 거다.
Q.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남들보다 월등히 잘할 수 있는 역할’이란 무엇인가.
금보라: 연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모든 게 변했는데, 금보라의 경쟁력은 뭘까’ 하고 말이다. 옛날에 잘 나가던 금보라가 생전 안 하던 역할을 맡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예쁘장하고 아무 생각 없던 여자가 민영애같이 철없고 못된 여자로 변신한 것처럼 말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은 ‘와, 그 옛날 잘 나가던 금보라가 저런 연기도 하네?’ 할 것이고, 여자들은 ‘금보라도 나이 먹으니까 어쩔 수 없구나!’하며 대리만족할지도 모른다(웃음).
Q. 결혼과 이혼, 재혼 후에 다시 연기에 도전하기까지 고민이 깊었을 듯하다.
금보라: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하다 보니 세상을 크게 보지 못했었다. 단지 사람을 잘 만났고, 작품이 좋았고, 운이 따랐을 뿐인데, 그때는 나이가 어리다 보니 모든 게 내가 잘해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내 능력 밖의 인기를 얻으면서 기고만장했던 거다. 그러면서 현실에 부딪히고 점점 지쳐갔다. 데뷔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으니, 얼마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겠나. 그 후 인생의 곡절을 겪으면서 연기도 다시 시작하게 되고 생각도 열렸다. 우물 안에 사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그 우물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됐다.
Q. 연기를 다시 시작할 때 “연기를 다시 하는 건 생활을 위한 필요 때문이다”고 말했었다. 그 마음은 여전한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연기하고 있나.
금보라: 나는 현실을 산다. 연기를 다시 할 때는 정말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평생 해 온 것이 연기였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연기뿐이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나이 때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느낄 만한 무언가가 없다면 갱년기를 겪으면서 우울증이 온다(웃음). 배우로서의 나에 대한 평가는 시청자와 방송 계통 사람들이 내릴 테지만, 내가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삶을 살아가며, 연기하며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Q.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그렇게 단단한 마음을 얻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겠다.
금보라: 현실에 부딪히며 자연스레 깨달음을 얻게 됐다. 은행에서 번호표도 뽑을 줄 몰랐던 나인데,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혼자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을 받았다. 옛날에 내가 살던 세상을 벗어나니까, 마치 무인도에서 스스로 불도 지피고, 집도 지어야 하는 그런 고독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더라. 혼자서 많이 울었다. 그 후 더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두려움은 있지만, 지금은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내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Q. ‘금뚝’에 이어 ‘감자별 2013QR3’의 첫 방송도 앞두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는 평가에 동의하는가.
금보라: 동의하지 않는다. 제2의 전성기라는 표현도 부르는 사람들 마음에 따른 평가일 뿐이다. 모든 건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전성기였다. 그리고 숨 쉬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전성기일 거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