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와 픽사의 세기의 결혼식은 2006년 5월 5일, 의미심장하게도 (우리의)어린이날, 거행됐다. 픽사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는 디즈니에 74억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을 시집보냈다. 이들이 사랑을 매개로 맺어졌다고 보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가문과 가문 사이의 정략결혼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일각의 우려와 달리, 디즈니와 픽사는 상상 이상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다. 디즈니는 픽사의 창의적인 매력에 흠뻑 취해있었고, 픽사는 돈 많고 뼈대 깊은 디즈니 가문을 흠모했다. 게다가 이들은 오랜 동거생활을 통해 서로가 상대를 얼마나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간파하고 있었다.
픽사 작품이라는 것 자체가 흥행과 작품성을 100% 보증할 때가 있었다. 픽사는 흡사 조물주가 실수로 만들어낸 실패를 모르는 돌연변이 같았다. 그 앞에서 드림웍스는 2인자 꼬리표를 때기위해 젖 먹던 힘을 다했다. 소니, 폭스 등 후발주자들은 잘 생긴 교회오빠 바라보듯 우러러 칭송만 해 댈 뿐이었다. 오, 픽사! 오, 넘사벽! 그런 픽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최근의 픽사를 보면 “나 삐뚤어질테다!”를 외치는 사춘기 소년 같아 불안하다. ‘카 2’에서부터 감지되기 시작한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지나며 증폭되더니, ‘몬스터 대학교’가 당도한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은채, 픽사라는 견고한 성을 흔들고 있다. 픽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함께 픽사의 영혼도 힘을 잃은 것인가. 그 이유를 디즈니와의 결혼생활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이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건, 디즈니와 픽사의 ‘사랑과 전쟁’ 쯤 되겠다.
디즈니와 픽사는 원래 갑을관계였다.
아이폰 iOS4를 발표 당시, ‘토이 스토리 3’ 배너로 시연 동작을 보여 준 스티브 잡스
디즈니와 픽사의 만남은 판매원과 고객, 즉 갑을관계로 시작됐다. 스티브 잡스가 픽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한 초반, 픽사의 주 업무는 정부기관 등에 납품할 고급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픽사의 VIP 고객 중 하나가 바로, 디즈니다. 디즈니와 픽사는 거래처를 오가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가끔씩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고, 상대의 취향을 탐색하던 둘은, 픽사가 애니메이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픽사의 창의력과 막강한 배급망을 지닌 디지니의 세일즈 능력은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에 충분했다.디즈니와 픽사의 ‘사랑의 짝대기’ 역할을 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사 드림웍스다. 외부의 적이 내부 결속을 강화 시킨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드림웍스의 파상 공격을 막아내면서 이들의 결속력과 사랑은 점점 깊어갔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인크레더블’, ‘니모를 찾아서’ 등이 잇따라 히트를 기록하는 달콤한 결실도 맺었다. 이들이라고 해서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오래 사귄 커플이 어느 시점이 되면 만나게 되는 딜레마. ‘결혼이냐, 이별이냐’ 하는 소크라테스적 번민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갈림길에서의 첫 선택은 “각자의 길을 가자, 안녕!” 하지만 10년 넘게 사귄 커플이 갈라지는 게 어디 쉽나. 이듬해 재회한 이들은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는 모양새로, 결혼에 골인하다. 그래서! 오랜 동거가 결혼으로 발전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건 유아기적 판단이다. 디즈니가 뿌리 깊게 각인시켜 놓은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이상향일 뿐, 이거 왜 이러나, 결혼은 동화가 아니잖아?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픽사와 디즈니의 행복한 한때
많은 신혼부부가 그렇듯, 디즈니와 픽사의 초반 신혼생활에도 깨소금이 깨알처럼 쏟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이들은 성숙하고자했다. 개별 활동의 자유를 허하고, 결혼 전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 픽사가 일품 요리(작품)를 공들여 만들면, 디즈니가 그걸 날라다 관객들 앞에 가져다주는(배급) 평화로운 나날들. ‘아, 이래서 다들 결혼하는 구나’ 싶은 그런. ‘픽사가 디즈니 소유가 되면 이전의 자유로운 제작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는 신혼시기에 나온 ‘라따뚜이’, ‘월-E’, ‘업’, ‘토이스토리 3’의 성공으로 완전히 불식되는 듯 했다. 적어도 권태기라 부를만한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결혼 8년차에 들어선 이들 부부는, 같은 이불을 덮고 사는 남녀가 서로에게 완전히 독립적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해 보이는 듯하다. 동거기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들, 이를테면 픽사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테고 디즈니는 디즈니대로 처가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부부는 닮아갔을 테고. 물론 닮아가는 게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렸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상대가 지닌 특징(장점)을 취하긴 했는데, 그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던 ‘유일무이한 어떤 매력’을 무력화 시킨 탓에, 이건 픽사도 아니여 디즈니도 아닌 애매모호한 결과물이 돼 버린 느낌이다.
이 죽일 놈의 권태기.
이전 픽사 작품에 비해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은 ‘카2’(왼쪽)와 ‘메리다와 마법의 숲’
이러한 변화는 픽사 최초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픽사의 이전 캐릭터들이 고독 외로움 소외감과 싸우며 연대를 찾고자 했다면, 메리다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것은 디즈니 특유의 가.족.주.의? 평단의 평가는 이전만 못했고, 흥행도 그리 만족할 만한 게 아니었다. 2010년 이후 나온 작품 중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제외한 세 편이 모두 기존 흥행작의 속편이라는 점도, 순도 100% 오리지널 창작집단이라는 픽사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절치부심하며 내놓은 ‘몬스터 대학교’ 마저 유니버셜의 ‘슈퍼배드2’에게 뒤지며 픽사는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상황이다.아내가 남편보다 잘 나가는 것도 무시하지 못 할 문제였으리라. 픽사도 픽사지만 디즈니도 그만의 개성을 잃고 픽사를 닮으려 안간힘을 쓰는 게 엿보이는데, 최근 디즈니가 자체적으로 내놓은 ‘주먹왕 랄프’, ‘비행기’에서 픽사의 그림자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픽사와 디즈니가 각자의 전공분야를 특화시켜 성장해 가는 게 아니라, 되려 하향평준화 돼 버린 것이 현재 디즈니와 픽사가 맞은 권태기의 가장 큰 위험요소다.
위기의 주부 픽사, 정체성을 찾아 나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유니버셜의 ‘슈펴배드 2’에 아쉽게 밀린 ‘몬스터 대학교’
다행이라면 픽사 내부에서 이러한 위기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픽사는 최근 “앞으로는 속편 제작 대신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데 매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자아 찾기에 나섰다. 외부로 빠져 나가고 있는 인력과 디즈니와의 차별화에 어느 정도 공을 들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첫째도 이야기, 둘째도 이야기, 셋째도 이야기’를 강조해 온 픽사가 원래 정신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은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위기의 주부 픽사가 권태기를 극복하고 다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맞을 수 있을까. 결혼은 무덤이라는 말이 적어도 픽사와 디즈니 세계에서는 재현되지 않기를!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제공. 픽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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