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다크 서티>를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뮤즈로 거듭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은 굳은 신뢰를 표현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영화의 원초적인 즐거움은 종종 의외의 여배우로부터 발생한다. 그 순간, 나만의 여배우를 발견하는 아주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 <헬프>의 시사회장에서도 그런 짜릿한 조우가 찾아왔다. 직업적 습관에 따라 무심코 신예 엠마 스톤이나 브라이스 달라스의 연기에 기대를 걸었지만, 정작 영화가 시작되자 내 시선은 오직 새크라멘토 출신의 한 여배우에만 머물렀다. <헬프>의 셀리아 캐릭터는 ‘발견’이란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백인 사회의 상류층 여성과 어울리지 못한 채, 우울증에 걸린 셀리아를 연기한 것은 제시카 차스테인이었다. 고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실 <헬프> 이전에 테렌스 멜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본 후 그녀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측했지만, 그녀의 연기를 애써 외면한 것은 브래드 피트의 아내 역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제시카의 유연함을 마리아적인 모성애로 포장한 것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적합할진 몰라도,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너무 노골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미적인 숭고를 추구하는 영상보다는 조금 진부해도 그녀의 슬픔을 수놓은 <헬프>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일찍이 로제 카유아는 곤충의 보호색을 ‘위험한 사치’라고 불렀다. 우리는 으레 곤충의 몸 색깔이 주위의 색과 동화되는 것을 보호 능력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곤충의 위장 능력이 아니다. 별 관계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온 바 있다. 카유아에 따르면, 곤충이 환경과 닮아가는 것은 신경쇠약의 표현이다. 즉, 그 색은 불안을 표현한 것이다. 다소 엉뚱한 주장이지만, 제시카의 붉은 머리가 곤충처럼 불안을 내포한 것처럼 착각이 들었다. 분명 그녀는 고전적인 의미의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모던하거나 톡톡 튀는 ‘잇걸’ 스타일도 아니다. 창백한 피부와 볼의 보조개나 주름이 한 세트로 보일 만큼 마른 얼굴을 지녔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것은 병적인 아름다움이다. <헬프>에서 불안녀의 영혼을 무난히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데뷔작 <조렌>(2008)에서 사랑에 울고 웃는 여인 조렌을 이미 소화한 덕분이다. 봉(pole)에 매달려 스트립쇼를 하는 조렌은 그녀를 욕망하는 남성들 탓에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여인이다. ‘만인의 여인’을 경험한 제시카는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에서도 마초 톰 하디에게 사랑의 돌직구를 온몸(19금 알몸)으로 던진다. 매기 캐릭터는 다소 작은 역할이지만, 겉멋만 잔뜩 든 하디를 충분히 위협한다. “연기는 이렇게 해!”라고 한 수 따끔하게 가르치는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제시카의 눈빛에는 깊은 열정이 담겨 있다. 그녀는 어떤 페이크도 모르는 것처럼 신뢰를 약속한다. 그녀는 약삭빠르지 않다. 진심을 다하는 연기로 캐릭터와 하나 되는 길을 찾는다. <헬프>에 이어 다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쁨을 준 <제로 다크 서티>가 바로 그녀의 장점을 모조리 활용한 사례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을 담은 CIA요원 마야는 9.11테러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을 찾는 첩보 작전에 앞장선다. 이 영화의 긴장감은 전적으로 제시카의 집착으로부터 파생한다. 오사마를 제거하는 과정을 생생히 담으면서, 한 여인의 집념을 통해 교묘하게 미국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플래툰>(1986)의 찰리 쉰처럼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장면(더불어 흘리는 눈물)은 영화적으로는 허탈하나, 그녀의 연기는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곧 개봉하는 <테이크 쉘터>는 2011년 작품으로, 조금 늦게 국내에 선을 보인다. 그저 그녀의 팬이 된 관객에게 보내는 보너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현재 그녀는 리브 울만이 감독을 맡은 <미스 줄리>를 촬영 중이다. 물론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으로 유명한 줄리 캐릭터는 여배우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 배역이다. 이자벨 위페르, 줄리안 무어를 존경하는 그녀라면 특히 그렇다. 자존심의 화신 줄리가 번뇌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이 붉은 머리 배우는 어떻게 표현할지 자못 궁금하다!
글.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편집.정시우 siwoorain@tenas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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