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뻔한 캐릭터’를 맛깔나게 살린 배우는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또 다른 드라마에 캐스팅돼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이처럼 자유로운 연기자와 달리 작품 속 캐릭터는 작가의 대본과 PD의 연출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빛나는 밤에’는 제작진이 창조해 놓은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채 하지 못한 말을 듣는 공간입니다. 주연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가 될 만한, 혹은 도움이 될 만한 노래를 들려주려 합니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어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니지만 반짝반짝 빛나며 <직장의 신>을 밝히는 세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연
안녕하십니까. 미스김입니다. 결혼 안 한 여자 김씨도 아니고 미씨 성을 가진 스김이도 아닙니다. 그냥 미스김입니다. 제가 지금 업무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연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 이름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잠시 일하고 있는 Y-jang과 맺은 계약서상에 제 이름은 분명 미.스.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Y-jang의 정규직 팀장이라는 아줌마 빠마머리 씨가 어디서 제 이름을 알아와서는 미스김 대신 김점순 씨라고 부릅니다. 처음부터 제 이름을 묻고 짜증나게 하더니 본명을 어디서 알았는지 김점순 씨라고 부르고 다닙니다. 마음같아서는 스테이플러로 허벅지를 집어버리고 싶습니다. 포크레인에 태워 몇 바퀴 돌리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직장 상사에 상해를 입히는 건 계약서상 위반이기 때문에 꾹 참았습니다. 저 미스김이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제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보장해 주겠습니까? 하지만 빠마머리 씨의 만행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빠마머리 씨가 설치니까 요즘은 다른 직원들까지 제 사생활을 침해하려 듭니다. 어리바리한 계약직 한 명은 점심시간에 식당까지 따라와서 나이는 몇 살인지 고향은 어딘지 왜 계약직으로만 일하는 건지 등 귀찮은 것들만 골라서 물어봅니다. 저는 이러려고 Y-jang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들이 싫어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건데 그놈의 빠마머리씨가 다 망쳐놨습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요즘은 예전같은 타자 속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음, 사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제 얘기를 길게 하는 게 참 오랜만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저는 점심시간이 돼서 이만.

DJ 10 : 정말 쿨하시네요. 하지만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고충이 많으실 것 같아요. 요즘 개인주의 사회다 뭐다 하면서도 회사에서는 개인 사생활 같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남자친구가 있는지는 왜 물어봅니까, 없으면 왜요? 없으면 안됩니까? 없으면 뭐 전쟁이라도 나나요? 이런 빌어먹.. 아 죄송합니다, 청취자 여러분. 음. 애인이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고향이 어디인지가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요. 빠마머리 씨가 한 번 더 물어보면 이 노래를 불러주세요. 이십년도 더 된 노래지만 2013년의 김점순 씨 상황을 정확히 대변하네요. 방실이의 ‘서울 탱고’ 듣겠습니다.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두 번째 사연
안녕하세요, Y-jang 마케팅 영업지원부 팀장 무정한입니다. 우선 그 많은 사연들 중에서 제 사연을 골라서 이렇게 읽어주시니 참 감사한 마음이 살짜기 드네요, 허허. 음, 사실 제가 요즘에 고민이 좀 있는데요, 아 이걸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저희 Y-jang에 저랑 참 친한 동료가 있습니다. 장, 규직이라는 친군데 겉으로는 좀 까칠해 보이고 차가워 보여도 속마음 하나는 참 따뜻한 친구에요. 능력도 있고 회사 생각하는 마음도 끔찍하구요. 제가 참 좋아하고 아끼는 친굽니다. 그런데 말이죠, 음…. 허허 이게 참…. 음, 사실 제가 회사에서 마음에 둔 여성분이 계세요, 허허. 일도 참 잘하시고 멋있으시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주위 사람 배려할 줄도 아시는 분이더라고요, 허허허. 근데 이 며칠 전에 제 친구 규직이가 벚꽃나무 밑에서 그분 입술에 입을 맞추는 걸 봤습니다. 기분이 참, 그렇더라구요. 그 후로 며칠 보니까 아무래도 규직이가 그 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허허, 마음이 사실 참 착잡합니다. 저보다는 규직이가 그분이랑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규직이 정말 괜찮은 친구거든요. 대학 때도 인기 참 많았고… 그래서 제가 포기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회사에서 그 분이랑 계속 마주치게 되니까 볼 때마다 좀 그러네요. 아, 제가 말이 너무 길었죠? 다른 분들 사연도 많이 있을 텐데… 그럼 늘 건강하시구요, 항상 방송 열심히 듣겠습니다.

DJ 10 : 아유, 다른 분들 사연까지 걱정해 주시고… 이름과는 달리 마음이 참 따뜻한 청취자분께서 사연을 보내주셨어요. 정한 씨, 제가 충고 하나 해 드리고 싶은데요. 친구를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걸 양보하려고는 하지 마세요. ‘지원’하는 역할이 정한 씨 성격에 맞을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정한 씨가 ‘지원’받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여자분에 대한 마음이 확실하다면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라 해도 포기하지 마세요. 장규직씨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 해도 그 여자분이 정한 씨의 순수한 마음을 더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오늘 다른 사연을 치워두고 정한 씨 사연을 읽어드린 것처럼,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잠시 치워두고 정한 씨 본인의 마음을 읽어보세요. 본인의 마음이 확실하다면, 친구 눈치 보지 말고 꼭 고백하시구요, 파이팅이에요 친절한 정한 씨! 그럼 정한 씨 힘내시라고, 악동뮤지션의 ‘Crescendo’ 띄워 드릴게요.


노을빛 보며
빌은 이른 아침의 소원 얘기던
시름 시름 앓았던 사랑 얘기던
일단 말하고 봐 바라던 바 시작도 안하고 포기는 마



세 번째 사연
노래 틀어주는 거 확실해? 내가 이렇게 사연까지 보냈는데 내일 아침까지 내 사연 안 읽어주면! 그쪽 제작진들 다 장 담글 줄 알아. 알았어? 음, 그래. 나는 Y-jang 부장 황갑득이다. 내가 요즘 아주 골치가 아파. 회사 꼴이 말이 아니야. 그래서 회사 실적 좀 올려보려고 비즈니스석까지 끊어줘가면서 미국에서 장규직이란 놈을 데려왔다고. 아 근데 MBA연수까지 받았다는 놈이 하는 짓이 영 성에 안 차. 홈쇼핑이니 마트 이벤트니 일만 벌려놓고는 수습이 안돼서 몇 번이나 아슬아슬했는지. 아, 회사에서 돈을 받으면 돈 값을 해야 할 거 아냐. 기껏해야 노래방에서 탬버린이나 좀 흔들 줄 알지, 영 믿음이 안 가 그놈. 무정한이라는 놈도 팀장 달고 있는데, 실실 웃기만 하고 싫은 소리는 못하니 아랫사람들을 휘어잡기는커녕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 계약직들은 화장이나 고치면서 퇴근시간만 기다리지, 진급 시기 놓친 만년 과장은 맨날 코털이나 뽑고 앉아있지, 이러니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겠냔 말이야. 그래서 슈퍼 계약직 미스김을 데려온 거 아니겠어. 사실 요즘 회사 일은 미스김이 다 했다고 봐야지. 포크레인 몰고 USB 찾아와, 게장쇼 완벽해, 홈쇼핑 매출 급등해, 일당백이야 아주. 그래서 특채로 정규직 채용을 하려고 했는데, 이런 젠장. 딱 거절하더라고. 회사의 노예가 되기 싫대나 뭐래나. 아, 기분이야 당연히 나쁘지만 사실 뭐 틀린 말 아니잖아. 집에도 안 들어가고 등골 빠지게 일한다고 해서 회사가 알아주는 거 아니거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아무도 안 반겨주는 내 처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서러워지더라. 에이, 사연인지 뭔지 보내라기에 하소연하다가 괜히 내 기분만 잡쳤네. 관둬, 관둬.

DJ 10 : 워워, 속상한 일 말하면서 스트레스 푸시라고 사연도 받고 노래도 틀어드리는 건데 기분 잡치시면 안되죠. 우선 진정하세요. 음, 황갑득 씨 사연을 보니 회사에서 직위가 높다고 꼭 만사가 편안한 건 아닌가 봐요. 회사 걱정도 해야 하고, 윗분들 눈치도 봐야 하고…. 힘들 때마다 직원들의 얘기를 성심성의껏 들어봐 주세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은데, 서로 힘든 점을 털어놓다 보면 직원들도 애사심이 생기고 갑득 씨도 힐링이 되지 않을까요? 단, 부장님만 주인공이 되는 회식자리는 절대 금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의 노예’란 말은 좀 심했네요.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하지만 회사의 노예가 되느냐 주인이 되느냐는 갑득 씨 마음먹기에 달린 거 아니겠어요? 내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이다, 마음 속으로 주문을 계속 걸어 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동방신기의 ‘주문’ 들려드릴게요. 젊은 애들 노래라고 무시하지만 마시고 한 번 찬찬히 가사를 음미해 보세요. 노예가 아니라 회사의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수고하세요.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넌 나의 노예
I got you- under my skin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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