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여운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아마 제겐 평생 기억될 작품 중 하나로 자리할 것 같네요”(웃음)

혹독하게 추웠던 지난해 겨울을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보낸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김규태 PD는 ‘까칠할 것 같다’는 드라마 PD들에 대한 선입견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인자한 인상의 소유자다. 특유의 사람좋은 미소로 6개월간 촬영장을 누볐던 그는 그간 잊고 살았던 일상의 여유를 즐기며 다음 스텝을 준비 중이다.

“드라마에 함께 했던 스태프들과 짧은 여행을 다녀왔어요. 서로 많은 얘기도 나누고 술잔도 기울이면서 마지막 아쉬움을 털어내고 온 느낌인데 그래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남네요” 노희경 작가의 깊이와 김 PD 특유의 세련된 연출력이 만나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은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김 PD에게도 다시금 연출자로서의 초심을 고민하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드라마라는 게 사실 인간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잖아요. 결국 사람이 모든 걸 만들어내는 거고, 그렇다면 만드는 현장 자체도 좀더 인간적이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곱씹게 해 준 게 개인적으로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준 큰 선물이죠”






1. 집시의 시간
1993년 | 에밀 쿠스트리차

김규태 감독 : 제3세계 영화이면서도 내재되어 있는 내러티브가 한국적 정서와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져 인상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시들의 어둡고 힘겨운 삶의 모습을 무척 리얼하게 그려내면서도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판타지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재미와 감동, 두 요소를 동시에 잡아낸 수작입니다. 저 또한 하나의 작품 안에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 영화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설명 :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에게 1989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 준 작품으로 집시들의 삶과 애환을 통해 유고의 현실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유고의 어느 집시 마을에 사는 소년 페란은 집을 떠나 세속적인 세상을 경험하면서 점차 순수함을 잃고 타락해간다. 실제 집시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신비주의적 정서가 가미된 독특한 분위기로 영화적 아름다움을 고조시키고 있다.



2. 펄프 픽션
1994년 | 쿠엔틴 타란티노

김규태 감독 : ‘영화가 이렇게까지 표현될 수 있구나…!’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을 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향후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타란티노식의 구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중반 혹은 후반부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절묘한 구성에 무릎을 쳤었습니다. 특히 과감한 비주얼과 강렬한 음악은 당시 저에게 상당한 자극을 줬구요. 악동 타란티노 특유의 연출 표현 – 일종의 장난스러운 코드 – 이 매우 유쾌한 영화입니다.

영화설명 : <저수지의 개들>에 이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1994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제67회 아카데미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LA의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엮어낸 영화로 슬럼프를 겪고 있던 존 트래볼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작품이기도 하다. 긴장감 있는 연출과 음악으로 당시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3. 노스탤지아
1996년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김규태 감독 : 타르코프스키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저와 비슷한 세대에게 일종의 시인이자 예언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학 영화동아리 등에서 영화 좀 봤다는 친구나 선후배들에게 타르코프스키의 저서 <봉인된 시간>은 바이블이었죠. 저 역시도 그의 영화를 100%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영화를 하게 된다면 타르코프스키처럼 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영화 <노스탤지아>가 보여주는 정서, 롱 테이크의 과감한 사용 등 그만의 독특한 작가주의적 영화미학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설명 : 18세기의 작곡가 소스노프스키의 삶을 쫓아 이탈리아로 온 시인 고르쟈코프와 그의 연인 유제니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 조국 러시아를 떠나 서방세계로 망명한 후 깊은 향수병에 시달린 타르코프스키 감독 자신의 심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작품의 말미에 촛불을 들고 화면을 가로질러 오가는 인물을 담은 9분여에 걸친 롱테이크 장면이 유명하다.



4. 아비정전
1990년 | 왕가위

김규태 감독 :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때지…” – 영화 속 아비의 대사. <아비정전>이 보여준 고독과 허무, 그리고 퇴폐미는 지금 다시 보아도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거 같아요. 특히 정체성의 모호함에서 오는 현대인의 고립을 특유의 허무주의적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한 왕가위의 연출력은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국영… 자유분방하고 집착하는 대상이 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한없이 고독하고 허무한, 그래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비 역을 통해 장국영은 영원히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남았습니다.

영화설명 : 각종 CF 등에서 패러디된 맘보춤으로 더 유명해진 작품. 1960년대 홍콩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을 그렸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정지된 듯한 느린 화면과 복잡한 카메라 기법이 돋보이는 영화다. 개봉 당시에는 혹평받았으나 현재는 왕가위 감독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5.<본> 시리즈
2002년 | 더그 라이만

김규태 감독 : ‘난 누구지?’ 영화계에서 첩보액션 장르는 비교적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007> 시리즈 등을 통해 확립된 첩보영화만의 장르적 특징들은 비교적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본> 시리즈는 21세기형 첩보액션물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무척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물질만능의 시대, 대량생산, 대량소비 등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부속품처럼 취급당하기 쉽고 필연적으로 고립감과 허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죠. 이 영화는 첩보영화라는 장르에 ‘정체성 찾기’라는 독특한 코드와 현대 액션영화의 최신 트렌드 등을 접목해서 전혀 새로운 장르로 변주해 낸 수작입니다.

영화설명 : 2002년 <본 아이덴티티>를 시작으로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본 레거시>에 이어 현재 5편까지 제작이 확정된 <본> 시리즈는 2000년대 이후 액션 첩보물의 교과서처럼 평가받는 작품이다. 3편까지 만든 감독 폴 그린 그래스와 배우 맷 데이먼이 하차하면서 팀을 재정비했다. 5편에서는 전편에서 미처 다 밝혀지지 않았던 ‘아웃컴’과 ‘트레드스톤’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그려질 예정이다.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김규태 감독



김규태 PD는 다음 작품으로 아이돌 그룹 카라와 함께 5부작 단막극을 준비 중이다. 멤버 5명에 따라 각각 다른 장르와 이야기를 펼치는 실험적인 형식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좀 밝고 경쾌한 청춘 로맨스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작품 선택 이유를 밝힌 그는 “앞으로도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연출을 선보이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는 작가주의적인 연출가는 아니다. 하나를 파고들기보다는 잡종처럼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편이라 이런 시도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웃음)

글. 장서윤 ciel@ten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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