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남자이기 때문에 유리한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요. 다행인 것이 저는 여자 PD들이 드물었던 과거에도 선배들이 거리낌 없이 대해줬어요. ‘이 일이 좋으면 하는 거지. 재미있는 것 하고 살아야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나를 ‘여자’라는 이유로 불편하게 대하지는 않았어요. 운이 좋은 환경이었죠.”JTBC 임정아PD
언제부터인가, 지상파 케이블 종편 등 모든 방송사 예능국에 여풍이 불기 시작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보이는 것만큼 화려하지 않은, 고되고 거친 방송가 특유의 업무 환경은 거친 남자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조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웬만한 히트 예능 프로그램은 여성 PD의 손에서 탄생된다.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었던 조직에 유입돼 결국은 ‘판’을 바꾸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한 때는 희귀했었던 여성 PD들에게 예능계의 과거와 오늘에 대해 질문해보았다.
세 번째로 만난 JTBC의 임정아 PD는 1996년 MBC에 입사해, < god의 육아일기>, < 우리 결혼했어요 >를 비롯해 < 무릎팍도사 > 등 굵직한 프로그램을 성공시켰으며, 2011년 종편 출범과 함께 JTBC로 이적해 큰 화제를 모았었다. 현재 김구라 이훈 등이 MC로 출연하는 < 남자의 그 물건 >을 연출 중인 임정아 PD는 사실 ‘여자’ 였기 때문에 장애가 된 경험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분명 그가 입사하던 시기 여자 PD는 희귀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다소 개방적이었던 당시의 MBC 예능국에서는 ‘여자라서’가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었다고.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실력, 콘텐츠다”라고 말하는 선배들 아래에서는 성별을 떠나 오로지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상식의 적용이 가능했다는 것이 임정아 PD의 설명이다.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환경은 어쩌면 더 혹독한 채찍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 채찍질의 효과는 결국 임정아 PD를 한 방송사를 대표하는 예능PD로 성장시켜 주었다.
Q. 처음 MBC 입사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임정아 : 1996년에 입사했는데 당시만 해도 여자 예능PD는 많지 않았다. 예능국 총 50명 정도의 인원 중 나를 포함해 3명 정도였으니까. 다른 두 분은 선배셨고, 동기 중 여자 PD가 있었지만 교양 쪽으로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어쩌면 둔해서 못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웃음). 하지만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어떤 공동 의식으로 충분히 서로를 납득하는 분위기가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Q. 당시의 MBC가 꽤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래도 여자 PD의 수가 적은 만큼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는 분명히 있었을텐데.
임정아 : 생각해보면 여자PD가 더 희귀해서 오히려 도와주시는 면이 많았던 것도 같다. 따라서 ‘여자니까’ 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은 기억은 별로 없다. 다만 예능국 내부가 아닌 외부의 나이가 지긋한 남자 스태프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웠던 기억은 있다. 서로가 낯설었기에 애매했던 면이 있었다. 또 연예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남자PD들과는 ‘형, 동생’하며 지내는데, 참 오빠라고 하기도 그렇고(웃음). 그런 정도의 소소한 불편함은 물론 있었지만, 적어도 직장 내에서만큼은 차별받는 다는 느낌은 없었기에 일하는 과정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Q.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 중에서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과도한 술자리 문화도 있다. 그 부분은 어떻게 적응해갔나.
임정아 : 분명 술 한잔을 꼭 하면서 서로 어려운 점을 토로하는, 남자들만의 어떤 문화는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 문화 속을 살아가던 남자선배들이 ‘절대 밥 더 많이 먹고 술 더 많이 마신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결국은 네 실력이고 네 콘텐츠다’라고 말해줬다. 사실 대화하려는 마음만 있다면야 술집이던 찻집이던 아무 상관없지 않나. 그런 식으로 풀어나갔었다. 결국은 ‘프로그램으로 보여주자’가 모토가 됐다. 그리고 사실, 그런 술자리 문화 남자들도 피곤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나.
Q.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난 것 같다. 멘토로 꼽는 선배는 아무래도… 여운혁 CP(임정아 PD의 선배로 MBC 출신의 JTBC 예능부장)일까?
임정아 : 물론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조언을 해주신 분은 다른 선배셨지만, 그 분은 나중에 보니 그 말을 해주신 것을 기억 못하시더라(웃음). 내게는 참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 여운혁 선배는 모든 일하는 과정에서 함께 해왔고 힘들 때마다 도움을 준 선배다. 그렇다. 정말 멘토같은 분이시다.
Q. 여자로서 힘들었던 부분에 관한 질문만 계속 드렸지만, 사실 많은 여자PD들이 여자라서 유리했던 점도 있다고 말한다.
임정아 : 여자 PD들은 과거에 두 갈래로 나뉘었던 것 같다. 현장이 워낙에 시끌시끌하고 복잡하니까 남자 PD들의 큰 목소리, 거친 말투, 카리스마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일종의 벤치마킹을 하는 쪽과 반대로 여성성으로 승부하는 쪽. 그렇지만 그것도 이미 과거의 일이고 이제는 결국 성별을 떠나 자기 색깔로 가게 된다. 여자들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남자 PD들 역시도 이제는 여자 선배가 많아지면서 군대식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의 소통법을 배워가고 있고, 여자들은 흔히들 말하는 언니문화를 벗어나 상사와 조직문화, 팀문화를 남성을 통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체력 등, 물리적으로 여자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은 요즘 시스템이 해결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체력이 더 좋은 남자들이 현장에서도 더 버틸 수 있는데 요즘은 충분한 편집실과 제작 시스템이 뒷받침 되다보니 여자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여건들이 많이 해결됐다.
Q. 과거보다는 유연해진 조직은 아무래도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을텐데.
임정아 : 그렇다. 남녀 PD의 숫자가 동등해지는 분위기는 결국 시청자들에 훨씬 더 다양한 색깔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 썰전 >만 하더라도 정치 시사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김수아 PD가 여성의 시선과 감수성으로 포장을 해 새롭게 다가오지 않나. 고리타분하지 않고 새롭고 파격적이고 그러면서 디테일하고, 그런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올 수 있게 됐다. 결국 이제는 자신의 개성과 자기가 가진 콘텐츠의 싸움이 된다.
Q. 이직을 한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어려움은 없나.
임정아 : 여자였기 때문에 힘든 것 보다 환경이 바뀐 지금이 더 힘들 수 있겠다(웃음). 새로 생긴 방송사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함께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아 초반에는 그런 부분들로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해결이 됐다. 그 어려움을 뛰어넘을 만한 장점이 분명 있는데, 우리 프로그램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새로운 것을 트라이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따라서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다. 사실 이직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지. 계속 현업에서 새로운 것들을 연출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한 조직에 속해 있다보면 점점 위로 올라가야하고 그러다보면 현장에서 뛸 기회가 적어진다. 다소 고생스럽지만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적 이후 여운혁 CP가 하신 ‘부탁받을 일이 없어 오히려 홀가분하다’라는 말에도 굉장히 공감한다. 이런 환경에서 오히려 새로운 섭외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 썰전 >의 MC 조합이나 < 남자의 그 물건 >의 MC 조합 같이 말이다.
Q. 종편 채널로서 차별화를 두려 했던 지점은 어떤 것이 있나.
임정아 : 현 방송시장에는 너무나 많은 채널이 존재하고 있다. 지상파나 케이블은 우리보다 인지도가 있는 채널이었던 만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결코 남들이 한 것과 비슷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때부터 새로운 포맷과 새로운 내용들을 찾기 시작했다.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새롭다는 강도보다 더 새로운 것을 해야만 시청자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고 시청자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앞으로는 어떤 채널이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채널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본다. 사실 예능 PD들에게는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는 칭찬보다는 새롭다는 칭찬이 더 듣기 좋은 말이다. 요즘은 지상파에 잘 되는 프로그램들도 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포맷의 예능이 많다. 아마도 새롭고 재미난 시도들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JTBC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한 임정아 PD는 두 번이나 환경이 자신의 편이 돼준 것에 대해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지만, 그 운을 뒷받침한 것은 부단한 노력으로 빚어진 실력일 것이다. ‘여자라서’가 장애가 되지는 않았지만, ‘여자라서’가 변명이 될 수도 없었던 조직에서 자신을 단련시켜온 그녀는 과거의 선배들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지금의 후배들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진리의 증거가 돼있었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 JTBC 제공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