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배우가 ‘할 수 없는 역’이 과연 존재할까? 공효진은 한 가지 타입으로 규정할 수 없는 배우다. 그녀는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고, 예쁘게 보이려 안달하지 않는다. 자존심 따위는 잊고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돌진하는 <네 멋대로 해라>의 송미래가 그랬고, 껌을 짝짝 씹던 <품행 제로>의 ‘일진’ 여고생 나영이 그랬으며, 안면 홍조증을 앓고 있는 <미쓰 홍당무>의 ‘왕따’ 교사 양미숙이 그랬다. 아! <러브픽션>의 ‘겨털녀’ 희진은 또 어떤가! 자신의 겨드랑이에 난 털을 보고 놀란 남자친구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래스카 여자들은 원래 겨드랑이 털을 안 민다”고 일갈하는 모습이라니.
그런 공효진이 영화 <고령화가족>에서는 ‘결혼환승전문’, 그것도 중학교 딸을 둔 이혼녀 미연을 연기한다. 엄마 역할은 MBC 드라마 <고맙습니다>와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이후 세 번째. “이미지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오히려 사람들이 나를 ‘애 엄마로 안 보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먼저죠. 그리고 엄밀히 말해, 제가 모정을 깊게 보여 준 작품은 <고맙습니다> 뿐이에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엄마’라는 건 캐릭터가 지닌 하나의 설정일 뿐이죠. 엄마 같아 보이지 않는 엄마랄까요?”
공효진은 미연을 연기하면서 여러 번 통쾌함을 느낀 듯 했다. “왜 합주가 딱 맞아 떨어지는 데서 오는 희열 같은 게 있잖아요?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그런 걸 느꼈어요. 가족끼리 욕하고 싸우는 신이 많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스파크가 튀더라고요.” ‘콩가루 집안’ 소개에 한껏 들뜬 공효진이 ‘자신을 설레게 한 작품’들을 추천했다.
1. 안나 카레니나
2013년 | 조 라이트
공효진: 극장에서 보기 전에, 기내에서 먼저 접한 영화예요. 보는 순간 매료됐죠. 연극적 무대전환과 뮤지컬식 구성을 차용한 비주얼이 너무 좋았어요. 대저택에서 만난 안나(키이라 나이틀리)와 브론스키(애런 존슨)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대가 식당으로 변하는 식의 무대 전환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인물의 동선이나 감정에 따라 절묘하게 바뀌는 무대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DVD로 소장하고 싶은 영화예요.
영화설명: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와 영국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이 만난 작품이다. 이미 수차례 리메이크 된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영화로 살려낸 이는 <어톤먼트>, <오만과 편견>의 조 라이트.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기존 리메이크 작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이야기 전달방식에 있다. 연극식 구성을 가미한 영화는 보는 내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이 연기했던 안나 카레니나는 키이라 나이틀리가 맡았다.
2. 케빈에 대하여
2012년 | 린 램지
공효진: <케빈에 대하여> 역시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틸타 스윈튼 때문에 찾아봤는데, 보고 나서는 비주얼에 더 마음이 빼앗겼죠. 원치 않는 임신으로 엄마가 된 에바(틸다 스윈튼)의 두려움과 죄책감 등을 ‘붉은 색’으로 시각화했는데, 색감 선택이 너무 탁월했던 것 같아요. 에바가 붉은 색 벽을 배경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정적인 컷들도 너무 예뻤고요.
영화설명: 영국의 ‘오렌지상’을 수상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잔혹한 범죄를 그린다는 점에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숭고한 모성 신화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떠오른다. 문제작 <쥐잡이>로 데뷔한 스코틀랜드 출신 여류 감독 린 램지의 섬세하면서도 도발적인 연출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죄책감과 상실감, 두려움 등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치밀하게 조율해 낸 틸타 스윈튼의 연기는 가히 압권. 케빈이라는 악마적인 인물을 섬뜩하게 체화한 신인 이즈라 밀러의 연기도 놀랍다.
3. 우리도 사랑일까
2012년 | 사라 폴리
공효진: 사랑은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반짝반짝 빛나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고, 그렇게 서로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각자의 길을 가지만, 새롭게 찾아 온 사랑 역시 결국은 권태를 맞게 되죠. <우리도 사랑일까>는 사랑을 오래 한 연인들이 보기엔 씁쓸한 영화예요. 그런데 씁쓸한 내용과 달리 비주얼은 굉장히 감각적이죠. 의상이라든지 색감도 너무 예쁘고요. 연출도 재미있었는데, 여자 주인공 마고(미쉘 윌리엄스)가 음악에 취해 놀이기구를 타는 신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놀이기구가 멈추고 불이 켜지는 순간, 마고의 정신도 현실로 ‘탁’ 돌아오는데, 그 순간을 너무 절묘하게 잡아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어요.
영화설명: 사랑은 ‘시작과 함께 이별을 향해 달리는 시한부 감정’이라고 하면 너무 잔인할까. <우리도 사랑일까>는 반짝이던 사랑이 소멸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린 영화다. 권태기에 빠진 5년차 주부 마고에게 찾아 온 새로운 사랑. 그러나 새 물건도 언젠가 헌 것이 되듯이, 영원할 줄 알았던 새로운 연인과의 사랑도 빛을 잃어간다. 전작 <어웨이 프롬 허>에서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사라 폴리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4. 서칭 포 슈가맨
2012년 | 말릭 벤젤룰
공효진: 따뜻한 영화예요. 음악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영화고요. 음악과 이야기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실화라는 점에서 오는 감동도 크죠.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한 가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울컥 올라왔던 기억이 나요.
영화설명: 1970년대 인종차별정책이 극에 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폐쇄적인 이 땅에 로드리게즈라는 가수 이름 하나 달랑 적힌 미국앨범 한 장이 흘러들어온다. 체제에 대한 저항적인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는 이 앨범은 자유를 갈구하던 청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저항 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그렇게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서 비틀즈 버금가는 슈퍼스타가 됐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영화는 단 두 장의 앨범을 남기고 사라진 로드리게즈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제85회 아카데미 장편다큐멘터리 수상작.
5. 스토커
2013년 | 박찬욱
공효진: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우와” 할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엄청난 캐릭터를 만났을 때. <스토커>가 그랬어요. 보는 내내 영화 속 두 여자 주인공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니콜 키드먼이 너무나 부러운 거예요. ‘저 연기를 하면서 얼마나 즐거웠을까.’ 배우로서 질투가 났죠. 이미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내 역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까지 했다니까요.
영화설명: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프리즌 브레이크>의 웬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토커>에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1943)의 그림자가 여럿 보이는데, 이는 박찬욱이 아닌 웬트워스 밀러의 영향이다. 박찬욱은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밀러의 시나리오에서 오히려 히치콕의 인장을 덜어내려 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박찬욱의 손길이 매만져진 <스토커>는 <의혹의 그림자>보다는 박찬욱 전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결과물로 탄생했다. 영락없는 박찬욱 스타일의 영화.
배려하는 인생을 사는 배우, 공효진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공효진은 쿨하고, 화려한 이미지의 패셔니스타다. 하지만 그녀가 출간한 환경 서적 <공책>을 보면, 공효진이 혼자만의 정적인 시간도 굉장히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감지할 수 있다. 공효진은 오래전부터 환경을 지킬 수 있는 작은 습관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만이 아니라, 제 주위 여러 생명체들에 관심이 있어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배려하며 사는 인생도 멋질 수 있다는 걸 천천히 알려주고 싶고요. 내 작은 생각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잖아요? 그랬을 때 이왕이면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요.”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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