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반인반수 최강치를 연기한 이승기" /><구가의 서>에서 반인반수 최강치를 연기한 이승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시대를 살아갔던 유럽의 작가 로맹가리는 “손해 본다는 걸 알면서도 순수해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을 계속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실망하고 배반당하고 조롱당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계속 믿고 신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힘주어 되뇌면서야 간신히 그런 믿음을 가져볼 용기를 내볼 수 있는 것이 또 우리네 인생사다. 그만큼 세상과 인간을 향한 순수한 믿음은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소한 아픔으로도 절망해버리는 연약한 존재이니까.

그렇기에 가까운 인간들에 의해 여러 차례 돌팔매를 맞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상과 인간을 향한 믿음을 지켰던 반인반수 최강치의 삶은 감동적이었다.

25일 종영한 MBC 드라마 <구가의 서>(극본 강은경, 연출 신우철 김정현)를 통해 인간과 신수, 어느 한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서글픈 운명 속에서도 누구보다 뜨거운 인간, 최강치로 살았던 배우 이승기를 만나보았다.

마냥 귀여운 국민 동생으로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이승기는 기대 이상으로 냉철하고 분석적인 배우로 성장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믿음이 점점 어려워지고만 세상에서 10년에 가까운 긴 세월동안 신뢰받는 존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아닐까.

Q. 인터뷰의 시작인데, 엔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게 됐다. 드라마의 결말은 마음에 드나.
이승기 : 우리 엔딩에는 새드(sad)와 해피(happy)가 다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지금까지 한 작품 중에 가장 설레는 엔딩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 엔딩은 작가님이 처음부터 정해둔 엔딩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한 회가 됐다. 가족에 대한 슬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 남녀 간의 설렘, 악인의 퇴장 등, 펼쳐진 상항들이 많아 그것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은 따뜻한 마무리였다. 전체 중 최고 회차이기도 했다. 실은 24부 대본을 읽다 눈물이 흘러 중간에 덮었다.

Q. 보통 다른 드라마들은 결말을 미리 정해두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엔딩을 알고 연기했던 기분은 어땠나.
이승기 : 느낌이 완전히 다르더라.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연기하는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다. 엔딩에 맞춰 연기적인 디테일이 달라진 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얼마나 울어야 할지에 대한 감도 있었고, 결말까지 가는 모든 상황들이 더 잘 와닿았다. 절실할 때는 더욱 절실해졌고 즐거울 때는 더욱 즐거울 수 있었다.

Q. 쪽대본도 아니었고 말이다.
이승기: 그렇다. 쪽대본이면 아무래도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는데, 엔딩도 정해져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됐다.

Q. <구가의 서>를 통해 달라진 이승기를 느낀 적이 있나.
이승기 : 전작인 <더 킹 투 하츠> 때만 해도 실은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그때는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도 나의 성과나 연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겸손해진 것 같다. 과거에는 내가 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실상 최강치를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들이 펼쳐지니 실질적으로는 강치의 원톱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상대와의 어우러짐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또 전작과는 달리 연륜 있는 선배들과 함께 했다는 점에서 같은 주연이더라도 무게감이 달랐다. 주연 배우가 연기를 잘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빛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게 됐다.

에서 최강치와 여울로 호흡을 맞춘 이승기(인쪽)와 수지" /><구가의 서>에서 최강치와 여울로 호흡을 맞춘 이승기(인쪽)와 수지

Q. 상대역이라 하면 역시 여울 역의 수지일텐데, 둘의 호흡은 어땠나. 선배로서 조언도 하곤 했나.
이승기 : 초반에는 가감 없이 했다. 그 탓에 드라마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노련한 연기자와 붙으면 별다른 상의가 필요 없을 테지만, 아직 한참 후배인 수지에게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본 여울이는 이래’라는 그런 말들 말이다. 여울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면서 합을 맞춰나갔다. 누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앙상블이 맞춰줬고, 케미스트리(화학작용)가 산다는 소리는 그래서 들을 수 있는 듯하다.

Q. 후배 수지는 어떤 배우인가.
이승기 : 유연성이 좋은 배우다. 이번에 정말 잘 했다. 그래서 칭찬도 많이 했다. 드라마 초반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었을지언정, 후반으로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 와 닿았다. 나중에는 별다른 상의를 하지 않아도 됐다. 정말 재미있게 연기했다. 괜히 내가 뿌듯하기도 했다(웃음).

Q. 강치와 여울의 키스신 이야기 안 할 수 없다. 드라마 속 키스신 치고는 꽤 길고 진하지 않았나(웃음).
이승기 : 하지만 보통의 드라마 공식에 대입해본다면 꽤 늦게 등장한 것이다. 17부에 등장했으니, 다른 드라마였다면 극이 끝나갈 때 등장한 것이다. 늦게 나온 키스신이라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한방에 쏟은 느낌이다(웃음). 아참, 키스신은 늦게 나왔지만 포옹 등 스킨십은 일찍부터 나왔다. 나쁜 손도 먼저 갔었고(웃음).

Q. 강치와 여울 커플의 케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짓궂은 질문이 되겠지만, 극중의 케미가 극 바깥으로 연결되지는 않던가.
이승기 : 진짜 감정? 들죠(웃음). 여울이, 아 수지 씨를 계속 여울이라 부르다 보니 습관이 되었다. 아무튼 연기를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 기본적으로 상대 배우에 대한 호감이 있어야 연기가 된다.

Q. 가까이서 지켜본 수지의 매력은?
이승기 : 모든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친근감이 있다. 아이돌 스타가 친근하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지. 부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또 사람이란 자기 나이에 맞는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수지는 딱 그 나이에 맞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 나오지 않나.

Q. 그러고 보니, 수지는 국민동생 후배이기도 하다(웃음).
이승기 : 그렇지만 죽어도 자기는 국민동생이 아닌 국민 첫사랑이라고 주장하더라(웃음).

에서 최강치를 연기한 이승기" /><구가의 서>에서 최강치를 연기한 이승기

Q. 강치 이야기를 해보자. 강치는 정말 상처가 많은 험난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무궁무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버지인 월령(최진혁)이 인간의 배신으로 상처받아 비뚤어진 것과는 다르게. 그 점에서 강치라는 존재가 전해주는 감동이 남달랐다. 강치가 가진 믿음의 원천이 뭐라고 생각하나.
이승기 : 보시는 분들은 강치를 월령과 연관시키겠지만, 사실 강치와 월령은 같이 공유한 것이 없다. 실질적인 아버지는 월령이 아닌 박무솔(엄효섭) 영감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인 아버지는 구월령이지만 정신과 마음을 물려받은 것은 박무솔과 이순신(유동근)이었고, 그래서 월령과는 다른 시작점에 서 있는 인물이 됐다. 작가님은 이런 강치를 통해 진정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시고자 했다.

Q. 드라마가 중후반부에 살짝 힘이 빠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꼈나.
이승기 : 어떤 작품을 하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24회차를 창작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중 한 두 회차는 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끌고 온 강 작가님의 필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유동근 선생님께서도 작가님의 힘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회차의 에피소드가 탄탄해지려면 100% 사전제작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는 측면에서, 그럼에도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절대 놓치지 않는 강 작가님이 존경스러웠다. 몇몇 곳의 연결고리가 아쉬웠다고 해도 본질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Q. 작가와 교감은 어떻게 했나.
이승기 : 드라마 하는 중간에 작가님과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고, 현장에서 감독님과 조율했다. 작가님과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의견을 조율하는 편이다. 처음 작가님의 주문은 강치는 날 것 같은 느낌, 즉 정제된 인간이 아닌 느낌을 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크게 주문한 부분이 없었다. 또 처음으로 순간 시청률이 20%가 넘었을 때 축하드린다고 문자를 보냈다. 강치 캐릭터가 체력적으로도 또 여러 면에서 힘든 배역인데 배우 이승기를 만나 기쁘다고 말씀해주시더라.

Q. 신수로의 변신은 어떤 감정으로 연기했나.
이승기 : 계산하지 않고 했다. 내 몸에 이상이 와서 변화가 생겼다는 느낌으로만 연기했다. 처음 신수로 변신하는 장면은 15분 만에 찍었다. 만화에서 봤던 것들을 생각하며 연기했다.

Q. 완벽한 신수라기보다는 살짝 미소년 느낌이 나는 신수였다는 의견도 있다.
이승기 : 그런 것은 제작진이 창작해내는 것인데, 실은 대본에는 디테일하게 적혀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빨간 눈이었는데 빨간색 렌즈가 어울리지 않았고, 월령은 완전한 신수이지만 강치는 반인반수라는 점에서 다른 컬러도 찾아보자 해서 택한 것이 녹색 눈이 됐다.

Q. 육체적인 연기 보다 더 힘든 것은 내면연기였을 텐데, 강치는 그런 점에서도 결코 호락호락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이승기 : 텍스트를 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했다. 보통은 그런 연기에 앞서 대사와 대사 안에 속으로 해볼 만한 말들을 모두 쓴다. 내 속에 치닫을 수 있게 말이다.

Q. 감정적으로 막히는 부분은 없었나.
이승기 : 있었다. 박무솔 어른이 죽었을 때 오열하는 신이 있었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더라.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울음이 막혀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있었고, 강치가 무솔 어른의 죽음을 바로 받아들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심리상 가까운 누가 죽었다면 그래도 한 번은 더 살려보려 애쓰기 마련인데,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을 너무 바로 받아들인 것이다.

Q. 연기를 준비하는 자세가 꽤 학구적이다.
이승기 :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감정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하는 타입이기는 하다.

Q. 한 때 20대 남자배우 중 이승기의 독주시대였다. 지금 또래 배우들 중 김수현, 송중기, 유아인 등 비슷한 위치의 배우들이 꽤 많이 늘었다.
이승기 : 나의 독주였다고? 정말?(웃음). 뭐 다양해졌다는 점에서는 좋다. 송중기 씨가 잘 할 수 있는 연기가 있고, 또 이승기가 잘 할 수 있는 연기가 있고 다 자기만의 색깔들이 있다. 그런 부분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배워나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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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민감한 질문 하나 더! 군 입대 계획은?
이승기 : 군대가 가십으로 다뤄지는 것은 부담스럽다. 간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고 반드시 현역으로 갈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여러 가지 사항 탓에 시기를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다. 광고 계약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수가 없다. 기분에 나는 언제 가고 싶다고 질렀다가 다른 상황들 탓에 거짓말이 돼 버리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Q. <구가의 서> 이후의 활동 계획은?
이승기 : 아시아 투어와 콘서트로 올해를 정리하게 될 것 같다.

Q. 배우 이승기가 그리는 그림은? 이번에 5번째 드라마인데,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해서 사극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고 맡은 캐릭터 역시도 점점 진지해지고 있다.
이승기 :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반대한다. 하다보면 한국 드라마에는 늘 ‘성장’이라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기 마련이니 패턴이 비슷한 면은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빚어지는 결과물이 다 달랐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감독님, 좋은 작가님, 좋은 배우들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 <구가의 서>의 경우, 유동근 선배님과의 작업이 좋았다. 내 안에 무언가를 건드려줬다. 꼭 주연이 아니라도 좋다. 정말 훌륭한 감독님 밑에서 자극받으며 일하고 싶다.

글,편집.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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