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했다. 데뷔작 SBS <연애시대>에서 순수 청년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이 배우가 진중하면서도 다양한 표현을 해 내는 무게감 있는 연기자로 거듭날 줄은. 그동안 그를 이국적인 꽃미남 이미지나 귀여운 로맨스 가이의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tvN 드라마 <나인:아홉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흠칫 놀라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눈빛과 표정만으로 섬세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묵직한 연기 내공을 보면서 말이다. 극중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박선우와 자신을 “자존심 세고 호기심 많으면서도 우울한 구석이 있는 부분이 닮았다”고 평하는 그. 작품을 내려 놓은 후 느껴지는 한결 편안하면서도 헛헛해진 분위기 속에 만나보았다.

Q. 캐스팅 당시 극중 서른 아홉인 박선우와 이진욱의 실제 나이(33세)가 차이가 있어서 어울릴지 고민을 했다고 들었다. 끝나고 나니 우려감을 불식시킨 것 같나.
이진욱 : 어려보이는 게 어렵지 나이 들어 보이는 건 별로 까다롭진 않더라(웃음). 극중 박선우로 머리 끝까지 잠겨서 작품을 끝낸 것 같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마치 정말로 누군가 죽은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날카롭고 예민해지는 감정을 사람들 앞에선 자제하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곁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박선우로서 남아있는 감정들을 버리려고 노력 중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엄청난 작품을 하게 돼 참 다행이다. 못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아찔할 정도다.

Q. 극중 분량도 상당하고 작품 전체를 짊어지고 가는 역할이라 부담이 많았을 것 같다.
이진욱 :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내용에 무척 감탄해서 무조건 하자는 생각이었다. 5,6부쯤 찍다 알았다. ‘아, 이게 쉽게 덤빌 작품은 아니었구나’라는 걸. 제작진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던 이유를 그때 알았다(웃음). 단순히 분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는 너무 힘든 작품이었다.

Q. 19회에서 극중 박선우가 죽는 장면을 촬영한 후 송재정 작가가 촬영장을 방문했었다고 들었다.
이진욱 : 작가님이 걱정이 됐는지 직접 촬영장에 오셨다. 작가님 얼굴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 극중 선우가 너무 힘든데, 그 심리 상태를 100% 이해하는 사람은 사실 작가님과 나밖에 없으니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이었는데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Q. 다양한 의견이 오갔던 결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이진욱 : 음…나와 감독님은 선우가 죽은 19회를 사실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할 얘기는 19회까지 모두 보여준 것 같다. 1990년대 홍콩 영화에 대한 향수가 있어 그런지, 목숨을 바치는 비장한 느낌의 19회 엔딩이 마음에 많이 와닿더라. 어린 선우가 자라 네팔로 떠나는 모습이 담긴 20회는 번외편으로, 이전의 선우와는 다른 감정을 담은 인물이 그려진 것 같다.

Q. 해피엔딩으로 생각한다고 한 송재정 작가와는 차이가 있는 해석인 것 같다.
이진욱 : 사실 우리 드라마의 결말은 없는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어느 것도 결말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열린 미래에 대한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과거를 바꿔서 행복해진다는 건 불가능하고 단지 매 순간을 맞이하는 자세와 의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 같다.

Q. 데뷔작 SBS <연애시대>나 이후 OCN <썸데이> 같은 작품에서는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달라진 것 같다.
이진욱 : 이제 좀 ‘나 같아진’ 느낌이 있다. 캐릭터의 문제라기보다 작품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졌다. 연기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 제대로 표현해 내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군대에 다녀온 후 바뀐 부분도 있는데, 예전엔 굉장히 조용한 편이었던 반면에 지금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훨씬 잘 하게 됐다. 그런 면이 감정을 표현할 때 더 나를 유연하게 만든 것 같다.

Q.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진 것 같나.
이진욱 : 좀 편안해졌다. 예전엔 뭔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힘을 써서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냥 하면 된다’ ‘힘을 빼라’는 얘기를 들어도 와닿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는지 깨닫는 데 5년이 걸린 것 같다. 마치 나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면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있는데 말로는 잘 설명이 안되는 것 같다(웃음).

Q. 냉철함, 유머러스함, 분노 등 박선우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미세한 표정 변화로 연기해냈다.
이진욱 : 대본이 좋아서 시청자들이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선우는 감정 표현의 폭이 크지 않은 캐릭터였다. 섬세한 눈빛과 표정의 변화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런 건 계산 해서 연기할 순 없더라. 그냥 느껴서 표현할 수 있도록 이전 장면부터 쌓아온 감정을 마음 속에 담아둬야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작가님께 어떻게 표현할지를 물어볼 때면 “그냥 해. 내가 써 왔던 게 이미 네 마음 속에 있어. 그거면 돼”라고 믿음을 주셨다.

Q. 말하자면 본능에 맡긴 연기를 한 건가.
이진욱 : 매 순간, 대사 하나마다 마음을 담고 끝까지 빠졌던 것 같다. 캐릭터를 몸에 입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이진욱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박선우로 빙의됐던 것 같다.



Q. 연기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는 순간인 것 같다.
이진욱 : 뭔가 알게 되고, 배우게 된 순간이라 즐거운 것 같다. 회사에서도 신입사원을 벗어나 일을 조금 알게 될 때쯤이 가장 신나지 않나. 다 알게 되면 그냥 하게 되지만.

Q. 극 구성이 굉장히 스펙터클했는데 가장 어렵게 촬영했던 장면은 무엇인가.
이진욱 : 선우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홀로 죽음을 맞던 19부 엔딩 신이다. 이틀 동안 앉아서 한 자리에서 연기했는데 19부 내내 쌓아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순간이었다. 극중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한번 목격했을 때 절망감, 무력감 등을 느끼는 순간을 찍을 때도 힘들었다. 그런 감정 표현은 이해받을 수도 없고 혼자 해 내야 하는 거니까. 사실 스태프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내가 열심히 하려고 집중할 때 다 같이 숨죽여 기다려주는 모습을 볼 땐 가슴 뭉클했다. 나를 위해 저렇게까지 해 주는구나, 란 생각이 들 때, 그런 것 때문에 연기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Q. 원래 본인이 지닌 우울한 감정도 쏟아부은 것 같나.
이진욱 : 그렇다. 나는 원래 우울한 분위기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걸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인지 더 당당해졌다. 내 걸 그대로 보여줘도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 같다.

Q. 로맨스 장면에서는 그간 잘 볼 수 없었던 본격적인 남성미가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진욱 : 그게 내가 연기를 편하게 접근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실제 나와 비슷하니까. 원래 나는 엄청나게 마초적인 성향이 있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도 싸우지 않았다. 혼내는 편이었지(웃음). 무척 잘해주고, 아닌 것에 대해선 굉장히 화를 내고, 고집도 센데 여자친구가 뭔가를 끝까지 해달라고 하면 또 들어준다. 이벤트도 잘 해주고, 집착하기도 하고 그런다.



Q. 특히 여자 후배들이 선망하는, 리더십있으면서도 따뜻한 선배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이진욱 : 내가 실제로 그렇다. 아마도 내가 엄청 매력적인 남자인가보다(웃음).

Q. 앞서 tvN <로맨스가 필요해>의 정유미에 이어 이번 <나인>의 조윤희와의 멜로 호흡도 호평을 받았는데 본인만의 멜로 연기 비법이 있나.
이진욱 : 사람마다 다른 것 같은데 멜로는 흐름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 같더라. 상대 배우에게 먼저 다가서는 편인데, 충분한 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리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다. 편안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알게 된 것 같다. 또, 나만의 ‘비밀 병기’도 가지고 있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긴 싫다(웃음).

Q. 작품이 끝난 후 허탈감도 많이 느끼고 있는 순간이겠다.
이진욱 :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보면 갖은 노력 끝에 신비의 섬을 탈출한 등장인물들이 그 후 잔잔한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지금 딱 그런 느낌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세상에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 장서윤 ciel@ten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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