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악역 연기로 화제 속에 드라마를 마무리한 데 대한 반응이 느껴지나.정웅인올해 이 배우만큼 악역으로 뜨거워진(혹은 뜨거울) 인물이 또 있을까. 1일 종영한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극본 박혜련 연출 조수원)의 살인마 민준국으로 분한 정웅인은 주인공 못지 않은 화제몰이를 하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여타 드라마 속 악인은 많았지만 그가 새롭게 보여준 것은 절제미 속의 변주였다. 과하지 않은 표현 속에서도 속내를 알아채기 힘든 복합적인 표정 연기는 악역의 이미지를 고정화시키지 않는 참신함으로 다가왔다. 이런 폭발력을 일으키기까지 그에게는 적지 않은 담금질의 시간이 있었다. 그간 주로 코미디 연기로 눈도장을 찍어왔기에 오랜 시간 갈망했던 악역의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
그러다 올해 영화 ‘전설의 주먹’의 악덕 회장 역에 이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살인마까지 연이어 만난 작품들은 가뭄의 단비였다.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 준 관객과 시청자에 앞서 바로 정웅인 스스로에게 말이다.
정웅인: 주위 사람들이 이젠 웃는 것도 무섭다고 하더라. 내 나이에 누려보기 어려운 인기도 실감하다보니 새롭고 놀랍다.(웃음) 하지만 인기는 지나가는 것이고, 검증되고 남는 것은 연기력이라고 생각한다.
Q. 올 초 영화 ‘전설의 주먹’의 재벌 회장에 이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살인마 민준국까지 연이어 악역을 맡았다.
정웅인: 그동안 강렬한 악역에 많이 목말랐었다. 비슷비슷한 역할을 맡다보니 연기에 대한 나만의 굉장한 갈증이 있었는데 영화에 이어 드라마까지 악역을 하면서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난 것 같다. ‘내 얼굴에 분명히 약간 무서운 이미지가 있는데 왜 악역을 하지 못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만난 작품들이다.
Q. 악역 연기를 할 때 자신만이 지닌 노하우가 있나
정웅인: 연기 자체는 악인처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대사 자체가 굉장히 세기 때문에 눈을 부라리거나 핏발을 세우는 등 과한 액션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기는 오히려 드라이하게 소화했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느낌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라 많이 연습하기보다는 현장에서의 ‘감’을 믿는 편이다.
정웅인
Q. 시시때때로 변하는 눈빛과 목소리 등 섬세한 변화를 주는 연기로 극을 이끌어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스스로 꼽는 명장면이 있다면.정웅인: 디테일한 부분에서 의외로 짜릿했었다. 예를 들면 민준국이 대형마트에서 바구니를 손이 아닌 발로 천천히 밀면서 살인에 사용할 밧줄, 스패너 등을 구입하는 장면 같은 부분은 연기하면서도 소름끼치더라. 혜성의 어머니로 분한 김해숙 선생님과 마지막 대화 장면도 인상 깊었다. 김해숙 선생님이 워낙 베테랑이시라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하실 때는 ‘내가 리액션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Q. 반대로 악역이지만 가슴 먹먹한 느낌으로 찍는 장면도 있을 것 같다.
정웅인: 촬영하면서 개인적인 바람은 병원에서 민준국이 자살하는 게 맞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회에 차관우(윤상현) 변호사가 민준국을 변호하면서 ‘우리’라는 단어를 쓰자 민준국이 ”우리’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듣는다”며 묘하게 감동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다. 그 대사가 민준국이라는 악인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 같더라. 그 때 처음으로 민준국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왜 그렇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됐달까.
Q. ‘죽일거다’란 민준국의 대사는 개그 프로그램(KBS ‘개그콘서트’)에서 패러디될 정도로 유행어가 됐다.
정웅인: 사실 그 대사가 회자가 될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극중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나오는 내레이션인 ‘꼬마야, 여기 먹물먹은 등신들은 다 내 편인 것 같구나’같은 강한 대사가 더 화제성이 클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대중과 연기로 소통하는 게 이런 생각지 못한 면을 발견할 때 참 새롭다.
Q. 그동안 악역에 대한 큰 갈증을 느낄 정도로 해보고 싶었던 나름의 이유를 꼽는다면
정웅인: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악역인 것 같다. 평범하고 뻔한 것을 넘어서서 누군가를 파헤치고 파탄으로 이끌어 갈등을 고조시키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로버트 드니로 같은 배우의 악역 연기를 보면 그만의 포스가 느껴지지 않나. 나도 그런 걸 만들고 싶다. 극적인 공포 상황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코믹한 설정이나 표정 같은 부분 말이다.
Q. 악역은 연기자가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지도 큰 것 같다. 연기하면서 애드리브나 본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편인가
정웅인: 대사를 바꾸는 애드리브는 절대 하지 않는다. 조사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작가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고, 나는 철저하게 대본에 의해 정형화된 속에서 나름의 파워풀한 감성을 지닌 배우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대사를 소화하면서 나만의 리듬감을 살린다든지 하는 표현 방법은 늘 고민한다.
정웅인
Q. 연기에 임할 때 굉장히 엄격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정웅인: 연기적으로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지식한 면이 있다. 1년에 한 편씩은 꼭 연극을 하려는 것도 그런 부분 중 하나다. 이건 경험에서 우러난 건데, 내내 연극만 하다 1997년 방송에 데뷔했을 때 처음엔 무척 좋았었다. 그런데 첫 역할을 코미디를 하다 보니 자꾸 그런 쪽으로 고정이 돼서 연기 범위가 좁아지는 아쉬움이 생기더라. 그럴수록 배우가 헝그리 정신을 갖고 자꾸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Q. 스스로가 정한 연기에 대해 양보할 수 없는 원칙 같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건가
정웅인: 통장 잔고가 바닥 나고 대출도 받아야 할 때쯤 별로 원하지 않던 작품이 들어올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생각하지 말고 해야 하는데 그런 순간에도 아내와 함께 고민을 한다. 그럴 때면 아내는 항상 하지 말라고 얘기해주는데, 그런 말이 큰 믿음이 된다. 결과론적으로는 상업적으로 소모될 수 있는 작품을 피해왔던 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
Q. 연기 외 예능 프로그램 등 다른 활동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정웅인: 가족들과 함께 나오는 프로그램은 정중히 고사하려고 한다. 가족들을 보여주는 부분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너무 잘되다 보면 의외의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더라.
Q. 다음 작품에서도 악역을 맡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올해는 악역으로 시작과 마무리를 지을 것 같은데, 도전해보고 싶은 다른 역할이 있다면
정웅인: 멜로에 대한 꿈이 아직 남아 있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어느 정도 알게 된 40대의 쓸쓸함이 담긴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같은 거 멋있지 않나? 또, 삼류 건달 역도 해보고 싶다. 사투리 연기를 한번도 안해봤는데 독특하고 진한 사투리를 쓰는 건 껄렁껄렁한 깡패같은 역할이 탐난다.
Q.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인데,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한마디로 들려준다면
정웅인: 예능 프로그램도, 영화나 드라마도 출연자가 괴롭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찌됐든 연기적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앞으로 선택되는 부분이 적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무엇을 보여줄지에 대한 고뇌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연기자로서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같다.
글. 장서윤 ciel@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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