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봉준호다. 더 이상 무슨 수식어가 필요하지? 봉준호라는 이름의 상상열차는 이미 전국을 뜨겁게 데우는 중이다. 그의 열차 속 이야기에 동승해 봤다. 당신이 알고 있거나, 혹은 몰랐던 이야기들이 여기 있다.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Q. 정말 다양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심지어 설국열차를 KTX로 해서 국익에 일조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탄식하는 글도 있었다.
봉준호: 그렇게 되면 영화 제목은 ‘KTX열차’인 건가.(웃음)

Q. ‘설국열차는 노골적인 정치영화’라는 타이틀의 인터뷰 기사도 있던데, 그 타이틀이 어떤 오해를 부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봉준호:
노골적인 정치영화? 허허허허. “많은 SF영화들이 그렇듯 정치적이 의미가 있죠!”라고 한 건데… 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노골적인 정치영화라는 게 뭐지? 정치인들이 나오고 정치계를 다룬 게 정치영화인가? 정치영화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제목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사 제목만 자극적으로 한 게 아닌가 싶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Q.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기차 칸마다 장르가 다르게 읽힌다는 점이었다. SF라는 장르 안에 다양한 장르가 동거하는 느낌이랄까. 가령, 영화의 문을 여는 꼬리칸이 홀로코스트 장르라면, 꼬리칸 사람들과 진압군이 물리적 충돌을 일으키는 칸에서는 액션과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공포물이 뒤섞인다. 교실칸은 기괴한 판타지로 봐도 무방하고.
봉준호:
그렇네. 맞다. 기차 칸 배열이 신 리스트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장르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해석이다. 꼬리칸의 경우, 말한 대로 어릴 시절 광복절이나 6.25때 TV에서 해주던 2차대전 포로수용소 배경 영화의 느낌을 냈다. 혹시 스티브 맥퀀의 ‘대탈주’ 좋아하나? 그에 대한 오마주도 있다. ‘대탈주’를 보면 연합군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하려고 몰래 땅굴을 파는데, 땅굴 파는데 버팀목으로 사용할 나무를 수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게 ‘찬찬찬’ 음악과 함께 몽타주 시퀀스로 보여 지는데, 그걸 드럼통 모으는 장면에서 오마주했다. 꼬리칸 사람들이 통을 굴릴 때 음악이 ‘찬찬찬’ 나오는 씬 말이다. 실제로 꼬리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룩이지, 별로 SF적이지 않다. 반면 우주선 느낌의 엔진칸은 다른 느낌을 풍긴다. 교실칸도 알록달록 완전히 다른 세상이고. 기차라는 좁고 긴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표현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다.

Q. 안 그래도 통제된 공간 안에서 봉준호가 어떤 창의력을 발휘할지 궁금했다.
봉준호:
예산이 많았다면 더 많은 칸들을 묘사했을 거다. 감독의 욕심은 밑도 끝도 없는 거니까. 하지만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야 했기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동물원 칸도 하나 만들고 싶었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기린 목이 꺾인 채 기차에 있는 모습들을 그려보고 싶었거든.

Q. 동물원이 있었다면 정말 ‘노아의 방주’ 같은 느낌이 들었겠다.
봉준호:
그랬을 거다. 하지만 영화 라스트에 중요한 장면이 있기에 동물 이미지를 미리 소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동물들은 그냥 도살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Q. 원작만화를 보는 순간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당시엔 다국적 프로젝트가 될지 몰랐을 텐데, 사이즈가 커지면서 초반 상상했던 것과 달라진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봉준호:
이걸 한국배우들로만 해서 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초반부터 하긴 했다. 인류의 생존자들이 기차에 탄 건데, 경상도 분, 강원도 분, 경기도 분 모아 두고 인류의 생존자라고 하기는 약간 민망하잖아.(일동 폭소) 말 그대로 인류니까 다양한 인종과 국가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대사의 영화가 됐고, 거기에 걸맞게 현장 진행을 하려다보니 오늘날의 규모로 커졌다. 글로벌 프로젝트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이게 나의 십자가라면 달게 받아들이고 가아 하지 않나 싶다. 외국 가서 홍보도 열심히 할 생각이고. 운 좋게 많은 나라에 선판매가 돼서 다행이다.

Q. 블로그나 SNS에서 사람들이 논쟁 중인 것 중 하나가 ‘봉준호영화답지 않다’는 거다.
봉준호:
내가 찍은 영화인데, 봉준호답지 않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더 새롭게 찍었다는 거니까.(웃음) 그리고 나스러운 게 뭐지?

Q. 내가 되묻고 싶다. 봉준호스러운 게 뭐라고 생각하나?
봉준호:
내 느낌과 충동에 충실하게 찍었기 때문에 이것도 봉준호스러운 영화의 일부로 봐 주면 좋겠다. 내가 해왔던 것들이 많은 부분 반복돼 왔다고 느끼는데, 그게 많은가 적은가는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건 스토리, 음악, 배우들의 연기 등 그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 생각한다. 그랬을 때 ‘설국열차’가 낯설어 보이는 게 당연할 거다. 대사도 영어고, 외국 배우들이 나오고, 설정도 독특하니 말이다.

Q. 방금 말한 거. 당신 영화에서 반복돼 왔다는 거,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봉준호:
인간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도저히 잡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살인범을 굉장히 무능해 보이는 형사가 쫓는다거나(‘살인의 추억’), 별 볼일 없는 가족이 괴물과 맞서 싸운다거나(‘괴물’)하는 것들. ‘마더’의 김혜자도 작고 힘없는 여인일 뿐인데 아들 누명을 벗겨보겠다고 자기가 형사인 것 마냥 발버둥 치잖나. ‘설국열차’의 경우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꼬리칸 사람들이 거의 맨손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영화다. 보통 폭동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숨었다가 기습하곤 하는데, 이들은 숨을 수도 우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거대한 관을 일직선으로 관통해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이전 내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Q. 영화에서 가장 의외였던 건 커티스 역의 크리스 에반스다. 배우는 감독하기 나름이라더니, 그에게서 처음으로 배우의 얼굴을 봤다.(웃음)
봉준호:
(눈 반달로 뜨며)매력 있지! 예쁘게 생겼어~

Q. 그런데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건, 남궁민수(송강호)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걸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자로 같기도 하고, 남들이 보지 못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봉준호:
아무것도 아닌 첫 하지, 이 사람은. 향정신성 의약품에만 집착하는 사람 같고. 그런데 마지막 순간, 숨겨뒀던 비전을 말할 때 눈빛이 확 바뀐다. 양 대신 질이라고, 나오는 씬 수 대비 가장 중요한 파워를 가진 인물이다. 지금 저 위층에 (인터뷰 하고) 계시네. 유일한 영어 대사, “파이어!” 하신 분.(웃음)

Q.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관계 역전도 흥미롭다.
봉준호:
뭐랄까. 남궁민수를 보는 커티스의 시선은 제한돼 있다. 커티스는 남궁민수가 문을 열어주니까 데리고 다닐 뿐, 그에 대해 은근한 경멸이 있다. ‘저 약쟁이놈. 하구언 날 크로놀 타령만 하네’ 하는 경멸이. 그렇기 때문에 남궁민수가 문밖을 봐야 한다고 할 때, “너, 미쳤냐!”고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게 커티스의 한계인 거다. ‘기차 밖=죽은 세상’이라고 교육받는 교실칸 애들처럼 커티스 생각의 스케일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지. 커티스는 굉장히 불쌍한 인간이기도 하다. 몸은 앞으로 돌진해가지만 정신은 죄의식 때문에 꼬리칸에 붙들려 있다. 반면 남궁민수는 밖과 미래를 보는 인물이다. 두 사람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커티스가 메인 플롯이긴 하지만 그는 자기만의 결말로 수렴될 뿐이고, 결국 영화 전체의 물결을 바꾸는 건 남궁민수다. 커티스에서 시작해 커티스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궁민수가 품고 있는 더 큰 비전으로 인해 영화는 엔딩에서 남궁민수에게로 꺾어진다. 영화 전체 결말을 두고 봤을 때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이 체인지 되는 건데, 그래서 처음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미국 스태프들로부터 이야기 구조가 되게 독특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를 정정훈 촬영감독과, 김지운 감독은 ‘라스트 스탠드’를 김지용 촬영감독과 했다. 당신은 홍경표 촬영 감독과 작업했고. 공통적으로 촬영감독을 파트너로 데리고 간 것이 신선하다.
봉준호:
영화현장에는 여러 관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 게 감독-촬영감독이다. 현장의 모든 것을 규정짓고 핵심 키가 되는 게 감독과 촬영감독이다 보니 부부관계로 규정되곤 한다. 샷을 설계하고 배열하고 배우들을 컨트롤하는 건 감독이지만, 그걸 실제로 카메라에 담아내는 건 촬영감독이기에 웬만하면 같은 언어를 쓰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아!” 하면 “어!”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그렇고 박찬욱, 김지운 감독도 그렇고 촬영감독을 데리고 간 거다. 낯선 객지에서 핵심 파트너만큼은 평소 함께 했던 사람과 하고 싶었던 거지.

Q. 옴니버스 영화 ‘도쿄!’ 찍을 때는 정말로 홀로 가지 않았나?
봉준호:
그때 콘셉트는 그거였다. 혈혈단신 나를 낯선 곳에 방치해 버리자. 어떻게 되나 한 번 보자! 그래서 통역하는 사람 하나 두고, 일본 스태프와 일본 배우들과만 작업했다. 고독도 느껴볼 겸 말이다. 그런데 일본 애들이 너무 친절하다보니 별로 고독하지가 않은 거야.(웃음)

Q. 일본 배우들과도 작업했고, 이번 영화에서는 미국,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들과 함께 했다. 송강호 인터뷰를 보니, 스코틀랜드 배우들의 정서가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하던데.
봉준호:
이 정도 숫자샘플을 가지고 나라별로 일반화시키기는 힘들 것 같고, 결국은 개인차가 아닌가 싶다. 루크 파스칼리노라고 왜 액션 하는 멋진 애 있잖나. 걔, 예쁘지?(다시 눈을 반달로 만들며, 허허허허) 그 애랑 존 허트는 영국출신이다. 틸다와 이완 브렘너는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루마니아 배우도 있다. 커티스를 끝까지 추적하는 양복 입은 악당. 그 분이 루마니아에서 송강호 같은 분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도 출연한.

Q. 크리스티안 문주 작품?
봉준호: (끄덕)
거기서 낙태기구 들고 와서 여주인공들 괴롭히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아저씨가 바로 그 배우다. 영화 속에서는 살벌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다. 아무튼 나라별로 일반화하긴 힘든데, 미국배우들은 자기 촬영이 아닐 때 트레일러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촬영에 맞춰 배우를 불러오는 일을 하는 연출부가 따로 있을 정도니, 상상이 될 거다. 그에 비해 한국배우들은 모니터 앞에 있는 편이다. 송강호 선배의 경우 트레일러에 가지 않고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지켜봤다. 틸다와 이완 브렘너도 현장을 지킨 편이고. 결국엔 개인차 같다.

Q.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가 나올 때마다 웃었다. 억양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하하.
봉준호: 얼굴은 또 얼마나 이상한가. 하하하하.

Q. 꼬리칸 사람들에게 붙잡힌 메이슨이 커티스 앞에서 틀니를 빼는 씬도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그건 메이슨의 어떤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건가.
봉준호:
그 장면은 촬영장에서 밥 먹다가 우연히 떠오른 경우다. 식사 시간이 되면 틸다가 분장으로 끼고 있는 틀니를 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이걸 틀니인 걸로 설정하면 재미있지 않겠냐. 카메라 앞에서도 한번 빼 보자” 하니까 틸다가 또 너무 좋아하는 거다. 그런 이상한 짓 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 “?!” 하면서 틀니 빼는 연습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마 잇몸이 엄청 아팠을 거야.(웃음) 그렇게 장난처럼 찍은 장면인데, 왜 영화를 보면 틀니를 빼고 나서 “코티스~?”(일동 폭소) 이러잖아. 어떻게 흉내도 못 내겠네. 어떤 큰 의미를 두고 한 거라기보다는 ‘나 알고 보면 힘없는 할망구야. 선처해 줄 거지?’ 이런 느낌으로 찍은 거다. 그런데 미국 배급사 직원들은 그 장면을 보고 그러대. 커티스에서 섹슈얼한 서비스를 해 주겠다는 의사 표현이라고(좌중 폭소). 아, 배급사 이 변태 녀석들!

Q. 직진의 액션이 두드러진 영화여서 그런지, 기차가 곡선주로를 달릴 때 다른 칸에 있는 커티스와 양복 입은 악당이 마주보고 총격을 벌이는 장면이 더욱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봉준호:
그 장면은 서부영화처럼 찍고 싶었다. 서부영화를 보면 사나이와 사나이가 마주보고 최후의 한 발을 서로 교환하잖아. 다른 게 있다면 서부영화에서는 보통 두 남자가 마주보는 장면을 카메라가 돌면서 잡는데, 우리는 기차가 대신 돌면서 포착한다. 기차가 곡선의 형태를 이뤘을 때 총을 거누면 되게 멋지겠다 싶어서 꼭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건 기차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너무 신나서 혼자 “와~” 하고 소리 질렀던 기억이 난다.


Q. 그 장면은 초망원렌즈를 사용해서 찍은 것 같은데, 당신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가 초망원으로 인물을 당겨 찍는다는 거다.
봉준호:
아~ 그렇네. 내 영화에만 나오는 게 아니긴 하지만, 망원렌즈 특유의 쾌감을 좋아하는 편이다. 주변이 포커스 아웃될 때 생기는 묘한 느낌도 좋고. 기차에서 찍는다고 하면 대개 망원렌즈를 안 쓸 거라고 생각들 할 거다. 좁으니까. 홍경표 감독님도 망원렌즈는 크게 염두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망원렌즈로 찍은 샷들이 오히려 더 많다. 가령 틸다가 연설할 때, 그 뒤로 군중들이 쫙 앉아 있는 신. 일부러 카메라를 더 멀리 빼서 찍음으로서 공간의 심도를 부각시켰다. 와이드렌즈를 쓰면 기차의 좁고 긴 매력이 없어지더라고. 좁고 한 방향으로 긴 게, 기차의 매력이잖아. 그게 핸디캡이고 일을 힘들게 하는 요소이기 하지만, 어쨌든 그게 기차다운 매력이라 표준이나 망원렌즈를 더 많이 써서 촬영했다.

Q. 영화에서처럼 계급별로 칸이 나뉜 기차에 타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칸에 타게 될 것 같은가.
봉준호:
수영장 칸?(웃음) 하얀 설원을 보며 수영하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아니면 극장 칸. KTX에도 시네마 트레인이라는 게 있잖아. 영화에서는 소개가 안 됐는데, 극장 칸에 가서 죽어라 영화만 볼 것 같다. 그 지루한 기차 생활을 견디기에 영화 만한 게 없을 거다.

Q. 그 기차에 탑승할 수 있는 티켓 가격을 추측해보자면.
봉준호:
엄청 비쌀 거다. 퀸엘리자베스 호 티켓가격이 굉장한 고가라고 들었는데, 그보다도 비싸지 않을까 싶다. 물론 칸마다 다르겠지. 설국열차에 올라탄 인간 구성을 보면, 기차가 출발할 때 무임승차한 인간들은 뒤쪽에 격리돼서 꼬리칸 사람들이 됐을 거다. 두 번째는 남궁민수처럼 기차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중인계급들. 내 생각에 혹한이 닥치기 전에 윌포드(에드 헤리스)가 중인계급을 한 번 소집했을 것 같다. 여교사가 설명할 때 보면, 윌포드는 빙하기를 일어날 걸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겉으로는 호화열차인 것처럼 선전해댔지만 속으로는 거대한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있었던 거다. 자급자족 시스템이 되게끔 식물과 물고기 등을 넣고, 테크니컬 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미리 소집해 둔 거지. 그리고 돈을 내고 탄 사람들이 상부 지도부와 상위 계급을 이뤘겠지. 메이슨은 중인 계급 중에서도 아래쪽이었는데 어쩌다 윌포드와 눈이 맞아서 신분상승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고.(일동 폭소) 그런 애길 틸다와 했었다.

Q. 기차 디자인은 어떻게 구상했나.
봉준호:
미술감독과 얘기할 때 어떻게 구분했냐면, 우리가 백화점이나 호텔에 가면 고객들이 다니는 동선은 대리석이 깔려 있고 굉장히 뺀질뺀질하게 잘 꾸며져 있잖아. 반대로 백스테이지에 위치한 종업원들이 다니는 곳은 파이프가 그대로 노출돼 있거나 우중충하고. 그러니까 식물칸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갈리는 거다. 백화점과 비교하면 식물칸 이전까지는 종업원들이 다니는 칸. 이후부터는 손님과 게스트들이 다니는 곳인 거다. 신분에 따라 이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해 놓았을 테고.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로 칸이 나뉘어있는 비행기와 비슷한 거지.

Q. 스스로 이 영화를 “자기를 둘러싼 시스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감독으로서의 당신은 어떤가? 영화를 하면서 몇몇 부조리함을 겪었을 테고, 그 안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도 느꼈을 텐데.
봉준호: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영화 만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차에서 내릴 때”라고 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혹시 알겠나? 감독들은 단번에 아는데. 아침에 촬영현장에 가면 스태프들 100~200명이 촬영장비를 세팅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엑스트라까지 500~600명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걸 보면 부담감이 확 밀려온다. 차를 몰고 그대로 도망가고 싶어지지. 영화를 책임진다는 건 그런 거다.

Q.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플란다스의 개’ 이후 3년 간격으로 꾸준히 영화를 내놓고 있다. 3년마다 그 도망가고 싶은 현장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봉준호:
미친 짓이다. 이상한 직업이야. 결국 3년에 3-4달은 모니터 앞에 있는 거다. 시나리오 쓸 때는 굉장히 힘들다. 외롭고. 아기자기한 상상을 하면서 잠시 즐거울 때도 있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정말 힘들다. 그게 끝나면 스태프를 모으고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복잡한 난제들이 끼어든다. 지옥의 아수라장인 촬영장을 견디면 여러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하는 편집실이 기다리고 있다. 편집을 끝낸 후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가는 곳이 이제 녹음실. 내가 영화 만드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즐거울 때가 사운드 작업할 때다. 뭐든 다 해 볼 수 있거든, 사운드는. 그래서 녹음실에 가면 거칠었던 들판에서 안락한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고단한 작업이 드디어 끝나가는 구나. 결승점이 보이는 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고. 또 녹음실 대부분은 환경이 좋다. 고가의 녹음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정 온도가 유지되는 공간이라 안락하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에 아름다운 음악이 얹어질 때의 쾌감도 상당하다.

Q. 청각이 예민한가봐.
봉준호:
녹음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예민 섬세하대.(웃음) 원래 얘기로 돌아가면, 어느 한 단계를 견뎌내면 다음 단계가 오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가 늘 있고, 작품도 매번 다르다는 게, 이 일의 매력이다.

Q. 설국열차가 1년에 한 바퀴 돈다면 당신은 3년에 한 작품을 도는 셈인데, 다음 행선지는 어떻게 되나.
봉준호:
‘옥자’라고, 2010년에 구상해 놓은 게 있다. 옥자라는 독특한 여자주인공이 벌이는 액션과 모험의 영화다. 그런데 그걸로 갈지는, 아직 100% 정하지 못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님처럼 나도 미국에 에이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제안 받은 시나리오로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문제는 결정적으로 ‘와, 이거다!’ 싶은 걸 만나지 못했다는 거다. 이제껏 내가 쓴 시나리오로만 영화를 찍어온 터라, 이게 딜레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게 있어야 작품을 하는데, 그걸 충족시키려면 내가 직접 쓰는 방법밖에 없고, 또 직접 쓰려니 그 고통의 1년여를 너무 잘 알기에 눈앞에 깜깜하고.(웃음) 그러니까 직접 쓰려니 막막하고, 받아서 하려니 끓어오르지 않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Q. 결국엔 직접 써서 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봉준호:
난 왜 이런 식으로 낙인이 찍혔을까. 국내에서는 시나리오가 안 들어온다. ‘봉준호는 자기가 써서 자기가 찍는다’고 다들 생각하시나봐. 어쩌지.(웃음)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채기원 te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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