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한국영화가 있습니까?” 할리우드 스타의 내한 기자회견장에서 나오는 단골 질문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제 안 들어도 ‘오디오’다. “올드보이!(‘장고’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올드보이죠!(‘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올드보이에요!(‘테이큰’의 리암 니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어이쿠 이 분도 “올드보이!(‘링컨 뱀파이어 헌터’의 벤자민 워커)” 그러니까 박찬욱의 ‘올드보이’로 말할 것 같으면 개봉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세계적인 팬층을 보유한 영화다. 그러니 흥분하는 게 당연하다. ‘올드보이’가 할리우드 자본에 의해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에 말이다.

‘올드보이’의 리메이크 소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5년 전이다. Made in USA표 ‘올드보이’ 탄생을 매만진 건 스티븐 스필버그다. ‘ET’, ‘쉰들러 리스트’의 스필버그? 맞다, 그 스필버그. 그리고 당신이 (아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이유도 충분히 안다. 실제로 스필버그가 ‘올드보이’를 리메이크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여기저기에서 우려와 탄식이 새어나왔다. 휴머니즘의 대명사로 통하는 스필버그와 을씨년스러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올드보이’ 사이의 간극은 3.8선으로 두 동강난 남과 북 거리만큼이나 멀어보였으니까.

원작영화와 닮아 있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올드보이’(동영상 캡쳐)

그러나 스필버그의 계획은 팬들의 반대가 ‘맞다/틀리다’를 증명해 보이기도 전에 일본만화 원작 판권 문제 등을 이유로 무산됐다. 좌초위기에 놓인 프로젝트를 생명 연장시킨 이는 ‘똑바로 살아라’, ‘말콤 엑스’의 스파이크 리다. 디테일을 통해 사회의 우울한 분위기를 건져 올리는 특기를 지닌 스파이크 리가 스필버그보다 이 프로젝트에 어울려 보이는 면이 있는 건 확실하다. 허나 적임자인지는 의문이다. ‘올드보이’의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쿠엔틴 타란티노라면 원작의 핵심을 꿰뚫는 리메이크를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회의적이긴 마찬가지다. ‘올드보이’는 그 자체로 한국 범죄 스릴러의 신격화된 텍스트다. 원작과의 비교를 피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잘해야 본전이고, 까딱 잘못하면 원작을 훼손했다는 원망을 받아야 하는 가시밭길을 아니, 도대체 왜?

하지만 클래식을 클래식으로 남겨뒀으면 하는 팬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올드보이’의 리메이크는 진행됐다. 그리고 그 결과물의 단서가 되는 예고편이 지난 10일 공개됐다. 일단 예상한 것 이상으로 원작의 흔적이 많이 감지된다. 주인공(조쉬 브롤린)이 사설감옥에 갇혀 20년을 썩는 장면(원작 영화는 15년이다), 쪽문을 통해 제공되는 동일한 음식을 먹으며 TV를 보고 힘을 키우는 장면(군만두는 우유와 컵라면으로 대체됐다), 그 유명한 장도리 액션 장면 등 카메라 구도는 물론, 대사까지 빼다 박은 게 많다. 하지만 알다시피 원작의 장면을 고스란히 이어붙이는 게 리메이크의 성공요건은 아니다. 무릇 중요한 건,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지역의 요건에 맞게 재해석해 내느냐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사실 ‘올드보이’는 줄거리만 놓고 봤을 때, 임성한 식 막장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알고 보니 딸이었고, 이 모든 걸 계획한 남자는 누이와 근친상간에 빠진 구구절절한 과거를 품고 있었다는, 치정과 복수와 피로 얼룩진 스토리! 그런데 이것이 막장이 아니라 ‘올드보이’를 더 특별하게 하는 정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작품이 머금고 있는 분위기, 즉 할리우드 상업주의 영화의 문법과 거리를 두는, 날것의 음침한 기운과 언어로 대체할 수 없는 미묘한 공기, 쾌락과 죄의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파격에 가까운 연출력 덕분이었다. 한마디로 그런 분위기가 거세 된다면 할리우드 판 ‘올드보이’는 뻔한 할리우드 장르 영화로 탄생할 공산이 큰데, 예고편 상으로는 주인공의 내밀한 감정보다 액션의 비중이 강화된 것 같아 우려스럽다. 아버지와 딸(엘리자베스 올슨)과의 멜로가 최소화 되고 딸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강화됐다는 점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케 하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딸을 구출하는 게 플롯의 중심이라면 ‘테이큰’과 뭐가 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실을 파헤치려 하면 할수록 불행해지는 자’였던, 그러니까 신화적 존재로서 주인공이 지녔던 슬픔과 한의 정서도 휘발될 위험이 있다.

한때 많은 한국영화들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지만 암울한 성적을 받고 자존심을 구겼다. 극장 개봉 없이 곧장 DVD 시장으로 직행한 ‘마이쎄시걸’(엽기적인 그녀)을 비롯해 ‘미러’(거울), ‘레이크 하우스’(시월애) 등등. 대부분의 영화가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기는커녕 말라 비틀어져 생명력을 잃었다. 영광보다 상처가 많았던 할리우드로 간 한국영화들. 그 수난의 역사에 미국판 ‘올드보이’는 어떤 기록을 남길까. 전설의 올드보이를 되살려 호평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혹시 “할리우드가 ‘올드보이’를 망치려한다!”고 말한 한 네티즌의 말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이 우려가 괜한 걱정이길 바랄 수밖에. 참고로, 미국판 ‘올드보이’의 북미 개봉은 11월이다.

글, 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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