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열차가 드디어 당도했다. 많은 영화팬들이 2013년을 기다려온 큰 이유는 아마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의 귀환이었을 것이다. ‘라스트 스탠드’과 ‘스토커’가 아쉽다면 아쉽고 의미 있다면 의미 있는 평가를 받으며 지나 간 자리. 이제 남은 건 ‘설국열차’다. ‘설국열차’는 박찬욱 감독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이 제작하고 CJ엔터테인먼트가 제작비 전액을 조달한 450억 규모의 영화다. 인류 마지막 생존지역인 열차 안으로 모여 든 인물들의 면면이 어마어마하다. ‘어벤져스’의 크리스 에반스이 타이틀 롤을 맡은 가운데 틸다 스위튼, 제이미 벨, 옥타비아 스펜서, 이완 브레너, 송강호가 가세해 불꽃같은 장면들을 연신 만들어냈다.

31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크리스 에반스와 틸다 스윈튼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29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봉준호 감독, 송강호, 고아성과 함께 내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많은 얼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 낸 ‘엘프’ 틸다 스윈튼, 다부진 근육과 달리 친근한 말투로 의외의 반전 매력을 선사한 크리스 에반스, 두 외국 배우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기분 나쁘지 않은 넋두리로 회견장 분위기를 이완시킨 송강호,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이 아깝지 않은 고아성. 그리고 이 모두를 이끈, 고아성의 표현에 따르면 ‘열차 창시자 월포드 같은 존재’였던 봉준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쟁쟁한 배우들끼리 함께 한 소감이 어떤가.
송강호: 이렇게 주목받는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건 처음이다. 촬영 내내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심에 있는 틸다 스윈튼과 크리스 에반스가 멀리 한국까지 와줘서 고맙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배우는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좋은 연기를 위해 노력하고 집중하고, 상대가 잘 하는 걸 보면 격려하고 칭찬하고 놀란다. 그 모든 과정이 한국 배우나 세계적인 배우들이나 똑같다는 걸 알았다. 평소 좋아하는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고아성: 크리스 에반스와 틸다 스윈트이 캐스팅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출연한 ‘아이 엠 러브’, ‘캐빈에 대하여’, ‘캡틴 아메리카’ 등을 찾아보면서 다시금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틸다 스윈튼: 송강호와 고아성이 우리와 작업해서 영광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더 영광스럽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전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어서 우리가 더욱 영광스럽다.
크리스 에반스: 틸다의 말에 공감한다. 미국 밖의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는 건 나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해외에 실력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막상 함께 일할 기회는 적은데 이렇게 기회가 닿은 걸 행운으로 생각한다. 촬영하면서 내 세계관을 넓힐 수 있었다.
봉준호: 국적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노력 자체가 즐거운 일 같다. 이 영화뿐 다른 많은 영화들도 해외 스태프들과 뒤엉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는 앞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팬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Q. 외국 감독의 작품에 탑승한 이유가 궁금하다.
틸다 스윈튼: 봉준호 감독 영화에 출연한 이유는 바로 봉준호다. 그의 작품뿐 아니라 봉준호라는 사람 때문에 출연하게 됐다. 2년 전 칸 영화제에서 처음 만났었데, 굉장히 빨리 친해졌고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작품에서 유치원 아이들처럼 재밌게 놀면서 작업했다.
크리스 에반스: 나는 영화를 선택할 때 감독을 가장 우선시 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감독이기 때문이다. 대본이 아무리 좋아도 영화화 됐을 때, 결과가 안 좋은 경우가 많다. 대본은 종이에 있는 글자에 불과하고, 스토리와 인물들을 살리는 건 전적으로 감독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봉 감독은 최고다.

Q. 한국 스태프들과 일하는 건 어땠나?
틸다 스윈튼: 계속 국적에 대해 얘기하는데 나는 그게 그저 신기하다. 예술을 하는데 있어서 누가 어디에서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다. 그런 면에서 지금 나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다. 봉준호는 덩치 큰 어린이 같은 가장이었다고, 우리는 재밌게 참여하는 가족 구성원이었다. ‘설국열차’를 작업하는 내내 고향 스코틀랜드에 있는 것만큼 편안했다. 그러니 이제 국적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Q. 국내에서는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에 대하 ‘인간계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한다. 신비감이 크다는 의미일 텐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웃음) 그리고 영화에서 연기한 메이슨은 차갑고 잔인하게 굴다가 중후반으로 갈수록 비굴해지는 인물이다. 어떻게 해석하고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연기했는지 궁금하다.
틸다 스윈튼: 방금 봉 감독이 나를 ‘엘프’라 불렀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엘프’가 된 것 같다.(웃음) 처음 시나리오에서 메이슨은 평범한 양복을 입은 남자로만 설정돼 있었다. 캐릭터를 개발하는데 있어 제스처나 외모가 극단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차를 타기 전 메이슨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메이슨의 캐비닛에는 어떤 게 있을까, 등등을 상상하다가 메이슨이 일반적인 신문에서 보는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했다. 과거와 현재의 지도자들을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이들이 자신에게 훈장을 잔뜩 수여하고 괴상한 분장을 하는 걸 보면서 메이슨이라는 캐릭터를 잡아나갔다.


Q. 감독에게 제안한 건 어떤 것인가.
틸다 스윈튼: 칸에서 봉 감독을 만났을 당시 더 이상 영화를 안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봉 감독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만약 영화를 다시 찍는다면 조건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재미었어야 한다’가 그것이었다. 그 얘길 듣고 봉 감독이 가능성이 있겠구나 했던 것 같다.(웃음) 평소 코가 들려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었는데, 봉 감독이 모두 수용해 줬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 영화를 리더십에 관한 영화로 봤을 때, 메이슨과 커티스는 광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캐릭터다. 실제 생활에서 커티스, 메이슨과 같은 사람을 보면 ‘저 가면 뒤에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확신에 찬 모습을 보이기 위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민하며 캐릭터를 잡아 나갔다. 실제로 메이슨은 정체불명의 사람이다. 극 중 인물들도조차 메이슨을 ‘Sir’라는 남자 경칭으로 부른다. 메이슨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거지. 아, 그래서 내가 요정인가 보다.(웃음)

Q. 반란을 진두지휘하는 입장이이어서 그런지, 액션을 소화해야 하는 장면이 많더라.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설국열차’의 도끼 중 싸우는 데 무엇이 더 유용한가?
크리스 에반스: 방패는 방어의 도구이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방어적 역할을 한다. 반면 도끼는 반란의 지도자가 갖는 일종의 와일드한 무기이기 때문에 싸우는데 있어서는 도끼가 더 좋지 않나 싶다.

Q. ‘설국열차’를 계급 간 갈등과 다툼을 그린 영화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에 접근했나.
봉준호: 기차의 칸 별로 계급이 나뉘어있다는 건, 원작의 위대한 발상이자 내가 이 작품에 끌린 이유다. ‘설국열차’는 SF라고 할 수 있는데, 기차타고 레이저포를 쏘는 그런 것만이 SF장르는 아니다. SF장르의 매력은 현실을 단순화하고 극단적인 틀과 구조를 만들어 상상하게 하는 것에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는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이다. 열차 속에서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관객들이 ‘어쩌면 이 세상과 저 기차 안이 다른 게 아닐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허황된 공상을 즐기는 SF 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와 닮아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Q. 송강호에게 질문 드린다. 상상한 것과 달랐던 틸다와 크리스의 의외의 모습이 있었는지.
송강호: 질문, 대단히 감사하다. 입에 거미줄 치는 줄 알았다.(일동 폭소). 농담이다. 직간접적으로 많은 작품을 통해 동경하고 감탄해왔던 배우들을 처음 만났을 때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틸다 스윈튼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저게 배우구나’ 하는 압도적 존재감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연기적 측면에서 봤을 때 할리우드 배우들은 전체적으로 원칙주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창의적으로, 적극적으로 감독에게 제안하는 모습은 한국 배우들과 같더라. 서두에서도 말했듯, 배우는 모두 똑같다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꼈다.
고아성: 리딩 때 크리스 에반스와 프라하에서 처음 밥을 먹었다. 이들과 한 프레임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됐다. 그러면서 든 걱정이, 배우가 서로 연기할 때 대사 이외에 눈빛과 제스처 등 암묵적으로 주고받는 게 굉장히 많은데 그게 한국배우들과 연기할 때보다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크리스 눈을 보며 연기하면서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알았다. 크리스의 눈이 깊어서 거기에 한껏 빠져들어 연기할 수 있었다.
크리스 에반스: 고아성은 순수한 배우다. 기차에서 태어난 소녀를 연기하려면 순수함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더럽고 암울한 기차 안에서 신선함과 희망을 주는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Q.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의 매력을 비교한다면?
고아성: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송강호 선배님은 워낙 어릴 때부터 존경해온 위대한 선배님이다. 두 작품 연속 아버지와 딸로 출연해서인지 외국 배우들과 같이 있다 보면 든든한 느낌이 받았다. 이걸 든든하다는 한 마디로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크리스 에반스는…(웃음) 아까도 말했듯 굉장히 깊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한껏 몰입할 수 있었다.


Q. 개성 강한 배우들에게서 각각 이끌어내고 싶었던 건 무엇인가?
봉준호: 틸다의 경우 아주 많은 작품에서 늘 새롭고 놀라운 캐릭터로 변신해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로 신선하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극한까지 가 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외모뿐 아니라 내면까지 새롭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로 접근했다. 주인공 커티스는 전투와 액션을 반복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가슴 속에 상처와 슬픔을 가진 인물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고독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길게 독백을 쏟는 장면이 있는데, 크리스와 그 장면을 공들여 찍어보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고아성을 통해서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세대의 감성과는 다른 묘하고 야릇한 느낌의 새로운 인류를 표현하고 싶었다. 송강호 선배는 배역에 대한 본인만의 방식과 클래스가 있는 존경하는 배우다. ‘살인의 추억’ 속 “밥은 먹고 다니냐”는 대사를 듣고 전율했던 것처럼 그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소화하는지를 기대하면서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Q. 이 작품을 찍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봉준호 감독의 매력이 있다면.
틸다 스윈튼: 봉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장센에서부터 작은 것 하나 하나 모든 걸 정확하게 컨트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에게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끔 해 준다는 게 놀랍다. 나는 이게, 인간적인 불꽃(human spark)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와일드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이건 곧 그가 장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크리스 에반스: 봉준호 감독의 매력은 협업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아티스트가 함께 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게 감독인데, 감독은 자기의 비전을 배우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봉준호 감독은 최고다. 배우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각각의 매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믿음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었다.
고아성: 크리스 말에 덧붙이자면, ‘설국열차’를 찍는 동안 감독님은 윌포드(극중 설국열차 창시자) 같은 존재였다. 배우들과 스텝들이 기차를 탄 승객처럼 느끼게 할 만큼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
송강호: 배우 입장에서 봤을 때 봉준호 감독은 배우를 매번 당황스럽게 하는 감독이다. 배우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한다. 그와 함께 작업을 하면 뇌가 계속 자극돼서, 치매에 걸릴 위험은 없을 것 같다.(좌중 폭소)

Q. 마지막 인사 부탁한다.
봉준호: 영화에 대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보신 분들도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다.
고아성: 너무나 많은 걸 배운 현장이었다. 영광이었다.
송강호: 봉 감독이 두 번 보면 좋다고 했는데, 세 번 보면 더 많은 감상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웃음) 많이 성원해 주길 바란다.
크리스 에반스: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이렇게 실력 있는 분들과 함께 한 건 처음이다. 다양한 매력을 지닌 영화이니, 그 여러 층의 레이어들을 꼭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틸다 스윈튼: 오늘 아무도 봉 감독의 헤어스타일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 말을 안 해 줘서, 내가 대신 언급하고 싶다.(웃음) 그리고 여러분, 설국열차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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