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섭(64)씨에게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두 번 붙는다. 한국 최초의 하드록 뮤지션, 그리고 한국 최초의 해외 뮤지션 전문 프로모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한국 내한공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해외 팝스타들이 한국을 찾는 내한공연 문화가 생소하던 80년대 후반부터 존 덴버, 호세 펠리치아노를 시작으로 티파니, 뉴 키즈 온 더 블록, 라우드니스, 앤썸, 듀란 듀란, 딥 퍼플, 야니, 본 조비, 케니 지, 데프 레퍼드, 산타나, 에릭 클랩튼 등 헤아리기도 힘든 수많은 팝스타들이 프로모터 ‘미스터 초이’(최우섭의 미국 이름)를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최우섭 밑에서 일을 배우고 인맥을 쌓았던 이들은 현재 국내 내한공연과 록페스티벌 라인업을 좌지우지하는 거물급 프로모터들로 성장했다. 최우섭 씨가 그 초석을 다진 셈이다. 16일 일산의 한 카페에서 최 씨를 만났다.시작은 1980년 숭의음악당에서 열린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 섭외였다. 최우섭 씨는 1960년대 후반부터 미8군, 이태원 클럽에서 록밴드 ‘와일드 파이브’로 활동한 원로 뮤지션으로 1974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무당’을 결성했다. 무당은 한국 밴드로서 거의 처음으로 미국 스타일의 정통 하드록을 시도하고 나아가 헤비메탈에까지 접근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에서 무당으로 활동 중이던 최 씨에게 당시 TBC에 적을 두고 있던 팝 칼럼니스트 서병후 씨(타이거JK의 부친)가 전화를 걸었다. 레이프 가렛의 내한공연을 섭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미국에 좋은 뮤지션 많은데 왜 하필 레이프 가렛을 데려오라고 하냐 했더니 서병후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무당의 일을 봐줬던 프로모터 다니엘 베납에게 섭외를 부탁했죠. 저는 레이프 가렛 프로모터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 셈입니다. 처음에는 오프닝밴드로 당시 최고 인기 밴드였던 사랑과 평화를 추천했는데 레이프 가렛이 록밴드를 원해서 엉겁결에 무당이 오프닝 공연을 맞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공연이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한국 관객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였다. 8일 12회 공연이 매진됐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숭의음악당 철문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바닥에 드러누워 차가 나가지 못했다. “사실 레이프 가렛 공연이 수준 있는 무대는 아니었어요. 그게 왜 잘 됐냐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진 직후 계엄령이라 사람들이 눌려 있었거든요. 불만을 삭히고 있는데 해외뮤지션이 오니까 난리가 난 거죠. 공연 주최한 TBC는 떼돈을 벌었어요.”
1970년대 중반 시애틀에서 사진을 찍은 결성 초기 무당. 김태화, 지미 차, 장화영, 최우섭(왼쪽부터)
레이프 가렛 공연이 화제가 되면서 무당도 인기를 얻었다. 무당은 당시 국내 최대 음반사였던 오아시스레코드와 2년에 두 장의 음반을 내는 조건으로 1,000만원에 계약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렇게 1집 ‘무당’(1980), 2집 ‘멈추지 말아요’(1983)를 차례로 발표했지만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최 씨가 미국에서 만든 노래들을 한글로 번역한 가사는 거의 전곡이 음반심의에 걸렸고, TV에서 제대로 된 라이브 연주를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록음악을 하기 힘들었던 당시 한국 분위기를 체감한 최 씨는 1985년에 미련 없이 무당을 접었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뮤직 프로덕션’을 공부하고 공연 프로모터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최우섭 씨는 약 3년에 걸쳐 음향, 조명 등 무대 장치를 다루는 콘서트 엔지니어 코스부터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에이전시 과정 등을 공부했다. 그가 록 뮤지션에서 공연 프로모터로 변신한 이유는 젊은이들이 즐길 거리가 없는 한국의 척박한 문화 때문이었다. 1969년 클리프 리처드 이화여대 공연 이후 1980년 레이프 가렛 공연 때까지 10년 동안 나아진 것이 없었다. 최 씨는 1974년 미국에 유학을 간 후 레드 제플린, 더 후, 블랙사바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올맨 브라더스 밴드, 제스로 툴, 레너드 스키너드, 지지 탑 등 당대의 록 스타들의 공연을 직접 봤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한 최 씨는 핑크 플로이드 공연을 보기 위해 비행기 타고 뉴욕까지 갔다. 그렇게 6개월 만에 공연 티켓 값으로 2만 달러를 썼다.
“잠실에서 운전을 하고 올림픽 주경기장을 지날 때마다 미국 생각이 나서 가슴이 뛰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 젊은이들이 올림픽 주경기장 같은 대형 공연장으로 가서 록 콘서트를 즐기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올림픽 주경기장, 체조경기장 등은 마냥 조용한 겁니다. 젊은이들이 즐길 문화가 나이트클럽 밖에 없는 국내 상황이 너무 불쌍했어요.”
88올림픽이 끝난 후 강압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나아졌다. 귀국 후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과 접촉한 최 씨는 서라벌 레코드 홍창규 사장의 투자를 받아 ‘SRB’라고 하는 해외 공연 전문 기획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인기가 많았던 록밴드 스콜피온스의 공연을 유치하려 했으나 당시 문화부에서 장발, 가죽바지 차림의 스콜피온스 사진을 보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대신 존 덴버, 호세 펠리치아노, 티파니를 차례로 데려왔고, 그것이 대박이 났다.
최 씨는 일본 최고의 록밴드들이었던 라우드니스, 앤썸의 첫 내한공연도 유치했다. 라우드니스 공연에는 아시아나를, 앤썸의 공연에는 시나위를 각각 오프닝으로 세우며 후배 밴드들에게 무대 경험을 쌓게 했다. 라우드니스의 88체육관 공연이 열린 것은 1989년으로 국내 정서상 일본 뮤지션 공연 허가가 안 나던 때다. “문화부에서 일본 가수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라우드니스의 사장 토시한테 멤버들 이름을 죄다 영어로 바꾸라고 했지요. 아슬아슬하게 잘 넘어갔어요. 문화부는 라우드니스가 일본 밴드인지도 몰랐지요. 만약 발각됐으면 저는 쇠고랑 찼을지도 몰라요.(웃음)”
내한공연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홍보를 위한 기업들의 투자들도 이어졌다. 팬시회사 아트박스가 투자한 티파니는 서울과 부산에서 무려 네 번의 공연을 했다. 부산에 큰 공연장이 없어 사직구장과 요트경기장에다 무대를 마련해 성황리에 공연하며 홍보효과를 거뒀다. 그러자 후발주자인 바른손 팬시에서는 듀란 듀란의 공연에 투자해 젊은 층에 브랜드 이름을 알리는 효과를 봤다.
굴곡도 있었다. 1992년에 최 씨가 데려온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공연이 한 명의 사망자를 낳은 참사로 이어지면서 책임자가 구속되고 한국 최초의 해외 공연기획사 SRB는 문을 닫는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공연 참사는 당시까지 국내에 슈퍼스타의 공연을 치를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국내 10대들 사이에 폭발적인 팬덤 문화가 형성돼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최우섭 씨는 현재 공연 기획사 예스컴의 대표인 윤창중 씨와 손을 잡고 딥 퍼플, 본 조비, 데프 레퍼드, 산타나,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유치시키며 승승장구했다. 이처럼 슈퍼스타들의 공연을 유치하는 중개인 즉, ‘에이전시 사업’은 이른바 ‘패밀리 비즈니스’라 불릴 정도로 인맥이 중요하다. 최 씨가 국내에 내한공연 사업이 활성화되기 전부터 해외에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유대인 프로모터 다니엘 베납 덕분이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들의 아시아 18개국 공연 에이전시를 맡은 DBA프로덕션의 대표였던 다니엘 베납은 무당의 매니저를 했던 친분으로 최 씨와 함께 일을 했다. 최 씨는 베납 덕분에 세계 굴지의 에이전시인 WMA(William Morris Agency), CAA(Creative Artist Agency), 일본의 교도 도쿄 등과 일찍이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최 씨는 “베납이 한국에 올 수 있는 1년 치 해외 아티스트들의 스케줄을 팩스로 보내주곤 했다. 사실 그런 정보는 웬만한 친분이 아니면 공유할 수 없는 건데 그만큼 우리가 친했다. 베납은 내 후배들과도 교분을 쌓으며 계속 내한공연에 관여했다. 국내에 내한공연 문화가 뿌리내리는데 큰 공을 세운 친구”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록페스티벌, 내한공연 계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거물 프로모터들이 최우섭 씨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트라이포트 락 페스티벌’,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진행한 예스컴 엔터테인먼트의 윤창중 대표,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과 ‘현대카드 시티브레이크’ 섭외를 맡은 김형일 라이브네이션코리아 부사장, 메탈리카, 아이언 메이든, 오지 오스본 등 수많은 메탈 밴드들을 한국에 데려온 백상현 액세스 엔터테인먼트 이사 등이 그들이다. 최 씨는 “후배들과는 요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잘 하고 있어서 뿌듯하다”고 말했다.
최우섭 씨는 최근 해외 아티스트들을 데려오는 글로벌 형 록페스티벌이 대폭 늘면서 라인업 경쟁이 ‘싸움’ 수준으로 번지고 있는 것에 대한 쓴 소리도 했다. 영화 ‘보디가드’가 막 히트했던 1990년대 초반에 휘트니 휴스턴의 내한공연을 서로 유치하기 위해 제일기획, 금강기획, 대영기획 등 13개 업체가 경쟁을 했다. 과잉경쟁으로 인해 개런티가 125만 불까지 뛰었지만 최 씨는 75만 불로 공연권을 따냈다고 말했다.(이 공연은 결국 휘트니 휴스턴의 건강상의 이유로 불발됐다) “그 때는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가 최고였기 때문에 내한공연에 10만 명도 올 기세였어요. 경쟁이 심했죠. 그런데 공연이 솔드아웃이 되도 75만 불 주면 25만 불 적자가 나는 계산이 나오는 거예요. 엄연히 국제 시세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넘기는 것은 상도덕이 아니죠. 그렇게 웃돈을 주고 부르는 것은 사기를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같이 일했던 ‘쌩백(백상현의 영어이름)’에게 ‘야 우리는 절대로 돈으로 승부하면 안 된다.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공연을 따냈을 때는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막판에 휘트니 휴스턴 건강문제로 공연이 취소된 겁니다.(웃음) 천당과 지옥을 오고간 기분이었죠.”
최 씨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최근 무당으로 다시 컴백했다. 최 씨가 기타와 보컬을 맡고 까마득한 후배들인 김현모(베이스), 이도연(드럼)이 함께 한다. 무당은 과거에 심의로 잘려나간 곡을 복원하고, 거기에 신곡을 보태 네 장의 미니앨범을 연달아 발표할 예정이다. “프로모터로 일하면서 딥 퍼플 등 전설적인 뮤지션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눈 것도 좋은 추억이었지만, 역시 내가 직접 음악을 할 때가 가장 즐거워요. 후배들이 만든 록페스티벌에서 제가 공연하게 될 지도 모르죠.(웃음)”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최규성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최우섭, 리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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