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저서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 표지

2008년 가을, ‘20세기 소년’의 취재를 위해 도쿄 롯폰기에 간 적이 있다. 카라사와 토시아키의 인터뷰를 끝낸 후, 며칠 한가로이 도쿄를 돌아다녔다. 마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가 극장에서 개봉한 상태였다. 국내에선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이 잡혀 있는지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도호 시네마에 가서 파도 위를 뛰어가는 포뇨의 질주를 감상했다. 극장에는 일본 초등학생들이 가득 했고, 그 속에서 외로운 이방인이 되어 포뇨를 응원했다. 오타쿠 놀이를 하듯 캐릭터 인형도 잔뜩 구입했다. 마침 도쿄도 현대미술관에서는 지브리의 레이아웃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직접 구상한 원화들을 보면서 입이 딱 벌어졌다. 와! 꿈의 궁전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지브리만의 섬세한 터치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레이아웃을 카피한 토토로 포스터를 하나 구입해서 책장에 붙여 놓았다. 언제든지 토토로가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달려올 것 같았다.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모노노케히메,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5년이 흘러 한국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화와 다시 만났다. 바로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11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이다. 그 사이에 ‘벼랑 위의 포뇨’, ‘코쿠리코 언덕에서’ 등이 추가되면서 국내 전시는 작품수가 늘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역사를 아우르는 1,300여 점의 레이아웃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림 콘티가 영화 전체의 설계도라고 한다면, 레이아웃은 각각의 장면에 대한 세부적인 설계도다. 한 장의 레이아웃에는 배경, 인물의 동선과 관계, 카메라 워크나 그 속도, 촬영처리 등 컷으로 표현되는 모든 정보가 그려져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의 원화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레이아웃 제도의 효율성이다. 미야자키가 레이아웃을 도입하면서 연출가가 작품의 설계도를 제작해서 전체적인 제작 공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연출가의 명확한 기획 의도가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기획 의도의 표현은 작품의 이야기 및 이미지 구성의 질적 향상을 불러일으킨다. 용지를 잘 살펴보면, 미야자키가 미술감독에게 지시하거나 사과하는 메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9월 22일까지 열린다.

전시에 이어 책으로도 미야자키와 만나 보자.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대원씨아이)이다. 이 책은 미야자키의 글과 대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굉장히 짧은 페이지지만 ‘좋아하는 것’이라는 장이 제일 먼저 손이 간다. 몰래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출발점’의 구성상, 미야자키가 어린 시절에 반한 애니메이션과 작품에 영감을 준 영화, 문학, 만화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류, 시바 료타로 등의 소설가와 함께 한 대담이 무척 흥미롭다. 무라카미는 “미야자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휴머니즘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미야자키는 “그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기쁘다”라고 화답한다. 무라카미는 “미야자키의 작품은 해피엔딩이지만 보통의 휴머니즘은 없다”고 정의한다. 시바의 경우에는 “내 상상력은 좀체 지상을 떠나지 못하지만, 미야자키는 항상 천공에서 세계가 완성돼요. 지상에서 비상해갑니다”라며 미야자키의 세계를 분석한다. 그는 미야자키에게 “동심이 없는 어른은 시시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담이 즐거운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생각들이 담겨 있어서다. 2부 ‘반환점 1997-2008’도 출간되었다.

연극 ‘휴먼코메디’

아무래도 장미 기간에는 시원한 코미디가 최고다. 1999년 초연을 시작한 연극 ‘휴먼코메디’는 웃음에 관한 종합 연구서다. ‘가족’, ‘냉면’, ‘추적’이라는 3개의 단막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극들은 타이밍이 다르다. 즉 웃음마다 고유한 속도를 갖고 있다. ‘가족’은 슬로 모션 같은 느림으로, ‘냉면’은 스타카토로, ‘추적’은 스피드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휴먼코메디’의 묘미는 6인 14역으로 전개되는 ‘추적’ 에피소드에 있다. 소규모 연극에는 1인 다역을 연기하는 멀티맨들이 으레 존재한다. 한 배우가 다양한 단역들을 해결하는 경우다. 흔히 멀티맨은 다역을 소화하면서 웃음을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추적’의 경우, 무대에 올라오는 모든 배우가 멀티맨처럼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 사실 배우가 어떤 캐릭터로 변하는지 추적하는 것이 ‘추적’의 진정한 재미다. 그 진실을 공개하는 순간까지 관객은 어느 배우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인 다역의 배우들이 상황에 대처하면서 빚어내는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삶과 빼닮았다. 특히 ‘공개수배 사건 25시’ 스타일로 어색하게 경찰을 흉내 내는 백원길의 손동작은 웃음 폭탄으로 작동한다. 명동예술극장의 여름레퍼토리로 7월 28일까지 상영한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제공. 명동예술극장, 스튜디오 지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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