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더 레전드’에 출연한 배우 이병헌
아들의 할리우드 진출에도 어머니는 시큰둥했다. 그랬던 어머니도 새삼 ‘오, 장하다’고 할 만큼, 이병헌은 어마어마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지아이조’ 2편에서 만났던 브루스 윌리스에, 안소니 홉킨스,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캐서린 제타 존스까지. 18일 오늘 개봉된 ‘레드:더 레전드’(이하 레드2)는 은퇴 후 뿔뿔이 흩어졌던 CIA 요원들이 살상 무기 ‘밤 그림자’를 찾기 위해 다시 뭉치는 이야기다. 스토리와 캐스팅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병헌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Q. 벌써 세 편째다. 이젠 스스로 할리우드 스타라는 타이틀이 익숙할 법도 한데.
영화에서 이병헌은 단순히 ‘구색 맞추기용’ 아시아 남자 배우가 아니다. 그가 연기한 한은 얼핏 보면 전형적인 킬러지만 반전이 있다. 소화기를 멋있게 발로 찬 뒤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긴장된 순간 외마디 욕을 내뱉는다. 그것도 한국어로. 경직된 표정 속에 웃음 포인트를 감춘 매력적인 킬러다. 실제로 LA 프리미어 시사회 때 미국 관객들은 한이 나올 때마다 큰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낸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병헌 : 이제 막 시작한 거다. 아직 허둥대고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는 중인데 어떻게 스타인가. 길거리에서 잘 알아보지도 못한다.
Q. 미국 사람들이 아직 못 알아보나?
이병헌 : ‘레드2’ 개봉 후엔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 전까지는 못 알아봤다. 알아보는 사람은 한 100명 중 한명 정도? 근데 의외인 건 ‘지아이조’ 시리즈로 알아보는 사람 반, 한국 영화로 알아보는 사람 반이다. 한국 영화 마니아들이 정말 많구나 싶다. 그리고 의외로 ‘달콤한 인생’보다 ‘악마를 보았다’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Q. 개봉하고 나면 최소한 절반 이상은 알아보지 않을까. 촬영하면서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걸 느끼지는 않나.
이병헌 : 내 마음 상태는 확실히 좀 나아졌다. 예전엔 너무 긴장해서 사람들한테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내성적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도 이젠 먼저 가서 인사하고, 분위기도 맞추고. 그럴 땐 ‘아, 여유가 좀 생겼구나’ 싶다. ‘지아이조’ 1편 첫 리딩할 때는 정말 긴장이 많이 됐다.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에서 영어 대본을 펼쳐놓고 하는데, 죽겠더라. 내 대사가 워낙 드문드문 있다 보니 타이밍도 자꾸 놓치고.
Q. 지금은 영어 실력이 좀 늘었겠다.
이병헌 :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도 빨리 이야기하거나 특이한 악센트로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Q. 한국 촬영장 분위기와 다른 점이 있나.
이병헌 : 밤샘 촬영이 거의 없다. 만약 꼭 필요할 경우엔 미리 날짜와 시간을 알려준다. 촬영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밤을 새는 경우는 없다. 근무시간을 넘기면 스태프들한테 근무 외 수당이 엄청나게 많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런 일을 가능하면 안 만들려고 한다.
Q. 할리우드 진출 1기 정도가 끝난 것 같은데,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은 뭔가.
이병헌 : 세 작품 모두 조금씩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지.아이.조’ 시리즈만 해도 1편에서 뭔가 숨겨진 게 있을 것 같으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였다면, 2편에서는 그걸 폭발시켰다. ‘레드2’의 한은 악역처럼 보이지만 이면의 엉뚱함과 웃음 포인트를 가진 캐릭터고.
영화 ‘레드:더 레전드’ 스틸
Q. ‘레드2’에서 전설적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이병헌 : 아마 안소니 홉킨스 영화를 보면서 자란 세대라면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캐스팅 될 때나, 촬영장에서 연기할 때나 현실감이 없었다. LA 프리미어 시사 때 완성본을 스크린으로 처음 봤는데 정말 신기하더라. 앞으로 내 영화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 싶다. 그 중 한 명이랑 따로 작품을 해도 신기한 일인데…
Q. 사실 팬들의 입장에서도 신기하다. 어머님은 뭐라고 하시던가.
이병헌 : 채닝 테이텀, 시에나 밀러랑 ‘지아이조’ 1편 찍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잘 모르시니까 ‘그냥 미국에서 뭘 하나 보다’ 생각하셨다. (웃음) 그런데 이번에 존 말코비치, 안소니 홉킨스랑 같이 한다니까 이제야 날 인정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Q. 캐스팅됐을 때, 한에게서는 어떤 매력을 느꼈나.
이병헌 : 사실 작품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레드’ 팬이라서다. 너무 재밌게 봤다. 또 그 대단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는 기회를 놓치지 싫었다. 한은 전형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만, 거기에 뭔가 비뚤어진 반전이 더해진다.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Q. 이병헌의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느낌이다.
이병헌 : 내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해 ‘지.아이.조’를 선택했다면, ‘레드2’는 내가 좋아하던 영화라 선택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개인적으로 큰 발전 아닌가.
Q. 한은 킬러이면서도 어딘가 빈틈이 있고, 어찌 보면 귀여운 캐릭터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보던가.
이병헌 : LA 프리미어 시사 때 정말 신났다. 내가 브루스 윌리스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미국 관객들이 특히 박장대소를 하더라. 난 사실 그 정도로 웃긴 건가 싶었다. 그게 문화의 차이인 것 같다.
Q. 미국과 한국의 유머 코드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연기하면서 어떤 차이를 느꼈는지.
이병헌 : 캐스팅될 때부터 그 부분이 걱정스러웠다. ‘레드’ 시리즈는 정말 미국적인 유머니까. 미국 코미디로 관객을 웃기려면 언어는 물론이고 미국 사람들의 마인드까지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따로 애드리브를 한다거나 아이디어를 내지는 않았다. 액션 신을 찍을 때 몇 군데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Q. 어떤 장면인가.
이병헌 : 소화기를 멋지게 차내고 나서 다리를 절뚝거리는 부분은 내 애드리브다. 그리고 정두홍 무술감독이 같이 갔기 때문에 그가 크고 작은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냉장고 문을 뜯어서 러시아 경찰들과 싸우는 부분은 우리 둘이서 같이 만들어나간 부분이다.
Q. 실제 아버지 사진이 영화에 잠깐 나오는 것 같던데, 실제 갖고 있던 사진을 갖다 드린 건가.
이병헌 : 그렇다. LA프리미어 때 처음 봤는데, 스쳐가는 장면이지만 감회가 새롭더라. 가족들은 아직 아무도 못 봤는데, 내가 말씀드려서 어머님은 이미 아신다. 눈이 약간 빨개지시더라. 울컥한 느낌이 있으셨던 것 같다.
Q. 할리우드 최고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소감은 어떤가.
이병헌 : 헬렌 미렌은 차가운 이미지와 달리 참 따뜻하게 인간적이다. 가장 대화도 많이 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 존 말코비치는 정말 섬세한 배우다. 디테일이 엄청나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작은 부분 하나 하나까지 설정해서 연기한다. 이번 영화에 폭탄을 제거 못해서 패닉 상태에 빠지는 장면이 있는데, 찍을 때마다 애드리브가 달라지더라. 내가 그 다음 대사를 받아야 했는데 당황해서 NG가 많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나도 애드리브를 막 했는데 감독이 다행히 재밌어 해서 무사히 넘어갔다. 잘못하면 망신당할 뻔 했다. (웃음)
Q. 할리우드 배우들과 친해졌을 텐데, 다음 작품 같이 하자는 얘기는 안 하던가.
이병헌 : 그런 얘기는 그냥 인사말로 많이 하지 않나. 그런 말을 특히 많이 한 배우는 브루스 윌리스다. 현실화될지는 모르겠지만.
Q. 그 배우들에게 배운 점이 있다면.
이병헌 : 배우로서 배운 점이야 내 무의식 안에 쌓였겠지. 나에게 좋은 재산이 됐을 거라 믿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 분들의 인격이다. 안 선생님(안소니 홉킨스), 헬(헬렌 미렌) 선생님은 각각 프랑스와 영국에서 작위를 갖고 있는데, 그만한 인격이 되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많은 후배들이 존경하지 않겠나. 나도 후배들한테 그런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Q. 이번에도 벗었다. 할리우드는 이병헌을 왜 자꾸 벗기는 걸까.
이병헌 : 우연의 일치겠지. 잘 만들어진 몸을 통해 짧은 시간에 캐릭터의 성격을 관객들에게 알릴 수 있으니까. 내가 맡은 역할이 워낙 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시무시했지 않나.
Q. 다음 할리우드 일정은 정해진 게 있나.
이병헌 : 아직 없다. 만약 ‘레드3’나 ‘지아이조’ 3편 제작이 확정될 경우, 그 작품들에 대한 출연 여부를 정하는 게 우선이다.
영화 ‘레드:더 레전드’에 출연한 배우 이병헌
작년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올해에는 ‘지아이조’ 2편의 주인공 스톰 쉐도우 역을 맡았다. 2009년 ‘지아이조’ 1편 이후 두 번째 할리우드 출연작. 오늘 개봉된 ‘레드2’와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협녀’ 까지, 이병헌은 국경을 넘나들며 성실하게 연기 경력을 쌓고 있다. 그 와중에 배우 이민정과 8월 10일 결혼 소식까지 발표했다. 어지간히 부지런을 떨지 않고는 불가능한 활동량. 그러면서도 실속을 놓치지 않는다.Q. ‘레드2’ 홍보에, 차기작 촬영에, 결혼 준비까지…. 바쁘겠다.
이병헌 : 지금 ‘레드2’ 하나만 해도 한국과 미국을 몇 번 왔다갔다 했다. 곧바로 협녀도 들어가니까 콘셉트 회의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내가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를 정도다. 난 한 가지만 할 때 잘하는 것 같다. 세 가지 큰일을 한꺼번에 하니까 정신이 없다.
Q. 셋 중 제일 힘든 준비는 뭔가.
이병헌 : 다 힘들다.
Q. 할리우드에서 탄력을 받았는데, 다시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 이유가 있나.
이병헌 : 난 사실 할리우드가 종착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게를 그 쪽에 더 두는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 작품을 더 이상 못하게 되더라도 그리 큰 데미지는 없을 거다. 난 한국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으니까. 그냥 탐험하는 기분으로 하고 있다. 좀 더 가면 뭐가 나올지, 어떤 상황들이 펼쳐질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난 그 사람들에 비해 핸디캡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Q. 그동안 거친 액션영화를 많이 했는데, 차기작 ‘협녀’는 무협이다.
이병헌 : 장르를 구분하자면 무협이지만 이야기 자체는 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해 매력을 느꼈다.
Q. 1999년 ‘내 마음의 풍금’ 이후 전도연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추게 됐다.
이병헌 : 기대가 된다. 오랜만이니까. 그때도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많은 작품을 통해 해외에서도 인정받았지 않나. 성장한 여배우 전도연이 지금의 나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게다가 무서운 신예 김고은과 함께 하게 됐는데 그 앙상블도 기대가 된다.
Q.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높은데, 일본영화 생각은 없나.
이병헌 : 일단 언어가 제일 문제다.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니까 좀 친숙하고 미국 영화도 많이 접해왔다. 근데 일본 방송이나 일본 영화가 들어온 건 얼마 안됐으니까. 일본어는 정말 낯선 외국어인 거지. 영어는 흉내라도 내지만, 일본어는 글자 하나하나를 외워야 한다. 웃기지 않겠나. 언어를 배우는 데만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카메오 출연할 때도 대사는 한국말이나 영어로 했다. 일본어로 하라면 못했다.
Q. 일본에서 시나리오가 들어오진 않나.
이병헌 : 시나리오보다는 감독이나 제작사에서 미리 기획 단계부터 연락을 해온다. 그런데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그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내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다 헛수고가 되니까.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선뜻 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다.
Q. 다양한 장르를 경험했다. 어떤 장르가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이병헌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휴먼드라마다. 심리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연기. 그런데 할리우드에서 액션연기를 계속 하는 건 외국 배우들에게 없는 걸 내가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왜 할리우드에 진출한 아시아 남자배우들은 무술만 하느냐고 묻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쪽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역할 할 수 있는 나를 부러워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술뿐인 것도 아니니까.
Q. 이제 한국 관객들에게 이병헌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그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나.
이병헌 : 부담도 되고 책임감도 느낀다. 사람이니까. 그런데 부담 갖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매 작품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면 금방 기가 다 떨어져 버리지 않겠나. 그럼 영화 못 찍는 거지. 선택은 내 믿음대로 신중하게 하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는 않으려 한다. 그래야 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Q. 오늘 인터뷰가 끝난 뒤 계획이 있나.
이병헌 : 아, 인터뷰를 했더니 목이 결린다. 마사지를 받든지 해야겠다.
글. 기명균 kikiki@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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