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다. 봉만대 감독을 에로영화로 이끈 계기가 첫사랑과의 실패였다니. “어릴 땐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좋아해 주리라 믿었어요. 그런데 배신을 당했죠. 그 이후로 ‘나쁜 남자’가 됐어요. ‘사랑은 개나 줘라’가 된 거죠. 그건 상처잖아요. 치유할 수 없는 상처. 그로인해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고, 그러다 보니까 섹스라는 장르를 만나서 에로까지 온 거죠.”
하지만 스스로를 ‘나쁜 남자’라 평가한 것과 달리, 그가 추천한 영화들은 여성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 여성을 공격의 타깃으로 여기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여성과 속 깊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섬세한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아티스트 봉만대’를 통해 돌아 온 봉만대가 추천한 19금 영화들을 만나보자. 아래 19금 영화들을 보고, ‘생각보다 (수위가) 약한대?’라고 느낀다면, 당신은 봉만대와 에로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 기회에 에로영화에 대한 봉만대의 철학도 음미해 보면 좋겠다.
1. ‘나인 하프 위크’
1986년 | 애드리안 라인
봉만대: 한 여인의 성에 대한 여행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에요. 중학교 때 봤던 걸로 기억해요. (얼음 조각으로 여자의 몸을 애무하며 자극하는) 냉장고 씬과 킴 베어싱어가 무릎을 꿇고 미키 루크에게로 기어갈 때의 에로틱한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그 보다는 사랑에서 하드코어로 넘어가는 과정, 그러니까 점점 복종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하던 킴 베이싱어의 태도가 더 기억에 남아요.
영화설명: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라는 80년대 대표적 섹스 심벌을 만들어 낸 작품.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남녀의 사랑을 파격적으로 그려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봉만대 감독 말처럼, 단순히 에로틱한 영상만을 ?은 작품은 아니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보다 주인공 여성의 심리에 무게를 두며 기존 에로영화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참고로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가 비오는 골목길에서 나누는 정사장면과 얼음조각과 젤리를 이용해 몸을 애무하는 베드신 등은 영국 대중지 ‘더선’이 선정한 ‘할리우드 사상 가장 뜨거운 섹스신’에 오르기도 했다.
2. ‘무릎과 무릎 사이’
1984년 | 이장호
봉만대: 제목만 들으면 상당한 야하죠? 한 여인이 성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딜레마를 담은 작품이에요. 이 영화는 중학교 때 극장에서 몰래봤어요. 당시엔 영화를 2편 동시 상영하는 극장들이 많았어요. 홍콩영화와 에로영화를 묶는 식으로요. ‘무릎과 무릎 사이’도 그 경우인데, 사실 다른 영화를 보러 갔다가 호기심에 끝까지 숨죽여 본 작품이에요. 그런데 어린 시절에 본 영화들은 전체 스토리를 잘 기억 못하잖아요. 그땐 보고 싶은 것만 보곤 하니까.(웃음)
영화설명: 안성기, 이보희가 주연한 작품으로 1984년 개봉당시 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유년 시절 외국인 가정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 음대생 자영 역으로 나오는 이보희는 비정상적인 성충동에 이끌리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혼선된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헉헉 소리에 흥분한 그녀가 플루트로 자기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는 장면’은 한국 에로영화에 길이 남는 명장면이란다. 이장호 감독은 이 영화 속에 80년대 초반의 소비자본주의와 외국문물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한 대중의 혼란을 반영했다.
3. ‘투 문 정션’
1988년 | 잘만 킹
봉만대: 이건 섹스 교본 같아요. 철저히 섹스만 가지고 애기를 풀어내는데, 말 그대로 두 달이 만나는 이야기죠. 아, 섹스에 대한 교본이라고 해서 제 영화에 참조는 안 합니다. 제 영화 속 은밀한 장면들은 다 제 상상에서 나와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저에서도 판타지에요. 현실에서 못하는 것들을 시도하곤 하거든요.
영화설명: 미국 남부의 유서 깊은 가문의 금지옥엽 에이프릴(셔릴린 펜)은 학생회장 출신인 채드(마틴 휴이트)와 결혼식을 치르기 직전이다. 그 때 마을에 나타난 서커스단의 근육남 페리(리처드 타이슨)를 만나면서 그녀 안에 숨겨져 있던 섹스 본능이 꿈틀댄다. 양가집 규수와 ‘색녀’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오가는 셔릴린 펜으로 인해, 당시 잠 못 드는 남성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제 2의 마릴린 먼로로 불린 셔릴린 펜은 이 영화에서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 ‘에이프릴’의 그림자와 싸워야 했다.
4. ‘말레나’
2000년 | 쥬세페 토르나토레
봉만대: 제가 추천한 영화들을 보면 잠작하시겠지만, 모두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요. ‘말레나’ 역시 그렇죠. 2차세계대전의 배경 속에서 굳건히 자신을 지키고, 흔들리다가, 종국엔 짓밟힌 한 여인의 삶을 그리고 있어요. 19금 영화인 줄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영화설명: 아름답다는 이유로 동네 여인들의 비난과 질시를 받는 여자 말레나. 이 모든 걸 믿게 만든 건, 말레나 역을 맡은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갖은 모함 속에서도 고결함을 지키던 여자는 전쟁 통에 남편이 전사한 후 생존을 위해 몸을 팔고, 종전 후 동네여자들에 의해 린치당한다. 말레나를 흠모하던 순수한 소년 레나토의 눈을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집단폭력과 광기의 비극을 함께 응시한다. ‘시네마천국’과 ‘언터처블’ 등의 배경음악으로 유명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서정적인 음악도 들을 수 있다.
5.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2003 | 봉만대
봉만대: 마지막은 제 영화입니다. ‘섹스 후 사랑이냐, 사랑 후 섹스냐’ 하는 화두를 통해 사랑과 섹스를 조명한 영화죠. 남성을 만족시키는 존재로서의 여성이 아닌, 여성을 주체로 섹스라는 화두에 다가가고 싶었어요. 요즘 만들어지는 대대수의 에로영화들이 남성적 태도에서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여성을 위한 포르노는 전멸하다시피 했죠. 하지만 시대는 점점 여성이 주도해 가고 있고요. 그렇다면 여자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죠.
영화설명: 에로 비디오계에서 주목받던 봉만대 감독이 주류영화계에 들어와 만든 첫 상업영화. 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의상 디자이너 신아(김서형)가 병원에서 일하는 호스피스 동기(김성수)와 우연히 만나 격정적인 정사를 나눈 뒤 사랑에 빠져들었다가 이내 서로 조금씩 부담을 느끼며 멀어진다는 것이 기둥줄거리다. 기존 에로영화들과 달리 섹스를 일상생활의 오락으로 즐기는 시선으로 눈길을 끌었다.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폐기하는 새로운 여성상의 등장이 반가웠던 영화이기도 하다.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