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 ‘괴물’의 현서로 고아성을 캐스팅했다. 이렇다 할 대표작 하나 없었던 아역 배우였지만, 봉준호의 판단은 적중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고아성은 봉준호 변희봉 박해일 배두나 등 쟁쟁한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도 현서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며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알렸다. 고아성은 이후 프랑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영화 ‘여행자’에 출연하는가 하면, KBS2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는 여고생 길풀잎 역을 맡아 또래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2013년, 고아성은 다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의 요나로 돌아왔다. 고아성은 요나를 연기하던 당시에 봉준호 감독과 나눴던 고민들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독특한 매력으로 ‘설국열차’의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요나는 치열한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Q. 요즘 ‘설국열차’를 재관람하는 관객들이 많다더라. 총 몇 번 봤나.
고아성 : 아직 두 번 밖에 못 봤다.
Q. 완성된 영화는 만족스러웠나.
고아성 : 사실 배우 입장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면 항상 아쉽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볼 때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워낙 제작기간이 길다 보니 영화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Q. 봉준호 감독 영화가 항상 그렇지만, ‘설국열차’는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해석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런 반응들 좀 챙겨봤나.
고아성 : 엄청 많이 봤다. 배우로서 영화에 참여하면, 두 가지로 나뉜다. 나에 대한 평가보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한 영화와, 영화는 관심을 못 받더라도 내 연기에 대한 평가가 궁금한 쪽. ‘설국열차’는 전자다. ‘설국열차’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궁금하다. 아이디어도 많이 냈고, 시나리오 수정 과정도 지켜봤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이 생겼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해석이나 반응이 있나.
고아성 :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며) “‘설국열차’에서 가장 안전한 건 고아성(요나)의 품속입니다”라는 말이 너무 재밌어서 글을 저장해뒀다. 실제로 영화에서 요나는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항상 안전하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이렇게 유머러스한 반응이 있는가 하면 진지한 리뷰도 많다. 그런 게 재밌다.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을 얘기하는 관객들의 해석을 보면서 내가 원래 생각했던 ‘설국열차’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결말만 해도, 난 절망적이라 생각했다. 평생 기차 안에서만 살아왔던 요나에게 기차 밖으로 나온다는 건 너무 무섭고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어떤 분들은 희망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걸 보면서 내가 너무 요나 입장에서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Q. 네이버 온라인 쇼케이스에서, 봉 감독에게 캐스팅되는 순간 예쁜 모습은 포기했다고 말했다. 포기가 쉽게 되던가.
고아성 : 사실 그건 농담조로 한 말이고. (웃음) 나는 배우로서 예쁜 캐릭터보다 요나나 현서(‘괴물’)같은 역할이 훨씬 더 반갑다. 예쁘게 꾸미는 건 홍보할 때나 평소 생활할 때 할 수 있으니까.
Q. 요나라는 이름에서 가수 네스티요나가 떠올랐다. 평소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걸로 알려졌는데, 혹시 본인이 아이디어를 냈나.
고아성 : 원래 그 언니랑 엄청 친하다. 거의 소울메이트 같은. 내가 열일곱 살 때 그 언니가 ‘열일곱의 너에게’라는 곡까지 만들어줬을 정도다. 그 노래가 나왔을 즈음이 봉 감독님이 ‘설국열차’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계실 때였다. 감독님은 항상 이름부터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쓰시는데, 요나의 이름이 안 떠올라서 그냥 ‘이누이트 소녀’라고만 해두셨다고 한다. 마침 내가 요나 언니(네스티요나) 앨범을 드렸는데, 그걸 보고 감독님이 ‘이거다!’ 하신 거지. 성경 속 인물과도 맞아떨어지고, 어감도 잘 어울리고.
Q. 요나가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크로놀’을 외칠 때 인 것 같다. 요나의 시크하면서도 귀여운 캐릭터가 잘 묻어난다. 극중에서 대사가 많지도 길지도 않은데, 봉 감독과의 조율이 있었나.
고아성 : 원래 크로놀 달라고 할 때의 대사는 ‘노 크로놀, 노 오프닝’이었다. 크로놀을 안 주면 문도 안 열겠다는 거지. 그런데 감독님이 촬영에 들어갈 때, “그냥 ‘크로놀’이라고 할래?” 그러셔서 바뀌었다. 그것 말고도 대사가 많이 줄었다. 요나의 투시능력은 초능력이 아니다.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일 뿐. 그걸 설명하기 위해 커티스랑 대화할 때 ‘아이 씨 사운즈(나는 소리를 본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그걸 빼자고 하셨다. 매력 없다고. 사실 그 땐 좀 서운했다.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해서 그런가 싶어서 이완 브렘너한테 내 영어가 이상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Q. 영어 발음 좋던데?
고아성 : 애초에 유창하게 말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요나는 기차 안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조금씩 다 할 줄 안다. 그래서 필리핀 영어, 인도 영어, 미국 영어 등이 조금씩 섞인 짬뽕 영어를 했다. 한국에선 발음 좋다는 칭찬을 듣지만, 원어민들이 보면 한없이 웃길 거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남궁민수의 딸이지만 정통 한국어를 잘 하진 못할 거라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몇 개 국어 하는 학생들처럼, 조금 어색한 한국어로 말했다.
Q. 크로놀에 대한 송강호의 태도도 나름의 반전이었다. 요나는 남궁민수의 생각을 눈치 채고 있었을까?
고아성 : 아마 몰랐을 거다. 아빠가 일부러 안 알려줬을 것 같기도 하고. 요나는 남궁민수의 야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알았어도 요나는 그냥 신경 안 썼을 것 같다.
Q. 하긴, 요나는 클럽 칸에서 와인을 들고 다니며 마실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니까.(웃음) 요나는 그 때 술을 처음 마셔본 걸까.
고아성 : 요나랑 남궁민수는 기차 안의 떠돌이다. 어느 한 칸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 다녔을 것 같다. 그렇다면 술이 처음은 아니지 않을까.
Q. 요나가 보스를 죽였을 때, 노려보는 킬러 프랭코의 눈빛이 섬뜩했다. 절대 쫄지 않을 것 같던 요나가 처음으로 겁을 먹은 장면인데.
고아성 : 그때 요나가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 많이 했다. 요나의 캐릭터대로라면 죄책감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티미를 보면서 충격을 받는 요나라면,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포털 사이트에서 고아성을 검색하면, 몇 장의 화보 사진과 함께 ‘폭풍성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칭찬일 수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배우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다. 아역 때의 연기를 뛰어넘어 ‘성인 연기’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지만 정작 고아성 본인은 훨씬 여유로웠다. 사실 성인이 되고, 키가 좀 컸다고 해서 무리하게 변신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관객들에게 익숙한 건 10대 때의 고아성, ‘괴물’의 현서니까. 고아성은 그걸 알고 있었다. 배우 고아성에게 ‘폭풍성장’은 없다. 다만, 천천히 단단하게 자라고 있을 뿐.
Q. ‘설국열차’ 촬영할 때 좋았던 점으로, 송강호와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걸 꼽았다. 무슨 얘기를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미칠 영향, 배우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얘기했다고. 좋게 말하면 성숙한 건데, 좀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
고아성 : 사실 나는 송강호 선배님 말을 그냥 들은 거다. (웃음) 근데 그런 얘기는 중요한 것 같다. 혼자서는 그런 생각을 못 하니까. 선배님께서 말씀하시길, ‘설국열차’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여야 할 영화가 아니라고 하셨다. 배우들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는 따로 있다고. ‘마더’가 그렇고, ‘살인의 추억’이 그렇고, ‘밀양’이 그렇다고. 반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캐릭터들의 앙상블이라고 하셨다.
Q. 배우가 되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여중생이었을 텐데, 어린 나이에 ‘배우’라는 옷을 꽤 자연스럽게 걸친 것 같다.
고아성 : 내가 운이 좋다. 어떤 기자분이 인터뷰 첫날에 그러셨다. 고아성은 처음부터 고아성이었다고. 내가 누구의 아역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인 배우의 아역은 맡지 말아야겠다고 의도한 게 아니다. 그게 정말 행운이다.
Q.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고아성의 최고작으로 영화 ‘여행자’를 꼽았던데.
고아성 : 캐릭터 자체가 워낙 슬프다. 고아인데 장애가 있어서 입양 보내지지도 못하고, 결국 식모로 팔려가는 역할. 나는 거기서 내가 연기를 특별히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할 자체가 좋았다. 누가 해도 연기를 잘 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Q. ‘여행자’에서는 프랑스인 감독, 한국 배우들과 연기했고 설국열차에서는 한국인 감독, 외국 배우들과 연기했다. 의사소통 측면에서 뭐가 더 답답한가.
고아성 : 그건 국적의 차이가 아니라 성격의 차이인 것 같다. ‘여행자’의 우니 르콩트 감독님은 엄청 깐깐하셨다. 그래서 당시엔 정말 힘들었고, 고생도 많이 했다. 반면에 봉 감독님은 좀 건방지게 말하면 친구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만큼 어린 후배의 얘기도 잘 들어주신다.
Q. 그런 봉준호 감독에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감독들과 작업할 때 불만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고아성 : 사실 그렇다. 언제까지 봉 감독님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인터뷰 중에 아차 싶을 때도 있다. 매번 봉 감독님 칭찬을 하면, 나중에 다른 감독님이 서운하실 수도 있으니까. 근데 그렇더라도 봉 감독님은 나에게 최고의 감독이다.
Q. 그만큼 봉 감독과 인연이 깊다. 가장 좋아하는 봉준호의 영화는 뭔가.
고아성 : ‘설국열차’다. 왜냐하면, 감독님은 가장 최근작이 최고작으로 뽑히는 걸 좋아하시거든.(웃음)
Q. 그럼 ‘설국열차’를 제외하자.
고아성 : 그럼 ‘마더’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면, 전작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리듬도 그냥 넘어간 게 없다. ‘엇박’ 하나 없이, 완벽하게 조율된 악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Q. 어릴 때 데뷔했고, ‘괴물’은 천만 관객을 넘었다. ‘설국열차’로 해외의 관심까지 받다 보면 자만심이 생길 것 같다. 내가 ‘괴물’의 고아성인데, 내가 ‘설국열차’의 고아성인데, 하는 생각.
고아성 : 다른 분들이 보기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괴물’과 ‘설국열차’ 사이에 다른 영화들도 많이 찍었다. 영화라는 게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작품이 좋았다고 다음 작품도 흥행과 완성도가 보장된 작품을 만나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난 항상 조심스럽다.
Q. 요즘 고아성이라는 이름 뒤에 ‘폭풍성장’이라는 말이 꼭 따라온다. 외모 말고, 배우로서도 ‘폭풍성장’이 기대되는데, 어떤 방향의 배우로 성장하고 싶나.
고아성 : 많이 컸다는 얘기를 들은 지는 꽤 됐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난 고등학생 역할을 연기했다. 관객들이 보기에 익숙한 건 아직 십대 때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무리해서 성인 연기에 도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난 그저 그때그때 고아성과 어울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글,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