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마다 궁금합니다. 그간 넘치는 그 끼를 어찌 누르고 사셨던 겁니까? tvN 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차마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다들 매력적이긴 해도 연기 변신으로 꼽자면 시원(정은지)이 어머니 역을 맡으신 이일화 씨가 단연 최고지 싶어요. 예전에는 늘 뭔가 말 못할 사연을 간직한 단아하고 청초한 여성으로 나오시곤 했거든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사족을 못 쑤는 고개를 외로 꼬고 눈은 살포시 내리 깔은 긴 머리에 긴 치마, 잔잔하니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타입 말이에요. 대체로 여자들에게는 호감을 사기 어려운 캐릭터들이었다고 봐요. 아니면 왠지 범접하기 힘든 신비로운 포스의 인물, 예를 들어 OCN 의 ‘영화관’의 여주인 계월 역 같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를 맡기도 하셨습니다. 아마도 한참 깊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겠죠? 한 마디로 ‘엄마’와는 거리가 한참 먼 연기자이셨다는 얘기에요.

부산 어딘가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요 몇 년 사이 누군가의 어머니로 나오시기는 했어요. 가까이로는 MBC 에서는 신이(정용화) 어머니로, KBS2 에서는 은재(이시영) 어머니로 출연하셨죠.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우리네 여느 어머니 같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적에는 어렵사리 십 수 년 만에 마주친 딸을 감격의 눈물이나 포옹은커녕 어찌나 쿨하게 대하는 어머니였던지 보는 사람까지 당황스럽게 만들더라고요. 그처럼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눌러 삭이는 역을 주로 맡아 오셨는데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 많고 솔직하고 푸근한 보통 엄마 역할을 감탄스러울 만큼 제대로 해내고 계시지 뭐에요. 시원이 어머니!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인상 깊은 엄마입니다. 어떻게나 자연스럽고 친근하고 스스럼없는지 지금도 부산 어딘가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니까요.

그래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게 돼요. 이번 런던 올림픽 축구 한일전 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댁 거실에 한 가득 모여 단체 응원을 펼쳤을까요. 세월이 꽤 흘렀으니 이젠 프로 야구팀 코치직에서도 은퇴를 하셨지 싶은데, 나이 들수록 점점 쪼잔해져 전기 아끼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시원이 아버지(성동일)와 싸움 해가며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는 사람들을 불러들이셨겠죠? 커다란 양푼 가득 인삼하고 맞먹는다는 여름 열무로 담은 잘 익은 열무김치에 참기름 듬뿍 넣고 김 가루 송송 뿌려 밥을 쓱쓱 비벼서는 군식구들까지 한 수저씩 떠먹이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동메달이 확정된 순간에는 시원이 아버지와 격렬하게 포옹을 하셨을 테고요. 짐작컨대 또 한 차례의 뜨거운 밤이 예상되는군요. 이렇게 한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드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캐릭터라서 더 정이 가는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연기가 아닌 진짜 시원이 엄마 같잖아요? 시원이 아버지와는 진짜 부부 같고요. 암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시원이 아버지가 드라마를 보다가 낙담을 하자 끈질기게 작가에게 전화를 해 협박을 했다, 회유를 했다, 결국엔 긍정적인 결말을 얻어내는 장면은 정말이지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어요. 부부란 무엇으로 사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더군요. 이일화 씨, 넉넉하고 정 많으신 분이셨군요

그리고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부모 잃은 윤제(서인국) 형제를 자식과 한 치도 다름없이 살뜰하게 챙겨주신다는 점입니다. 윤제가 어른 되는 수술을 하러 갈 때 시원이 어머니와 동행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죠.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다거나 서운한 구석이 있었다면 윤제가 같이 다녀올 생각을 언감생심 할 수나 있었겠어요? 동네방네 소문이 짜하게 난 것은 좀 남우세스러웠지만 그런 부분들조차도 저에겐 정겹게 다가오던 걸요. 앞뒷문 꼭꼭 닫아걸고 사는 우리 동네에서는 이미 사라져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요. 왜 그런 얘기가 있죠? 가장 자신과 닮은 역할을 맡았을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오기 마련이라고들 합니다. 아마도 이일화 씨는 지금껏 우리가 생각해온 차갑고 이지적인 분이 아니라 시원이 어머니처럼 마음이 부산 바다처럼 넉넉하고 정이 많은 분이지 싶네요. 불의를 보면 절대 못 참는 분이실지도 모르겠고요. 드라마 를 통해 얻은 것들이 참으로 많지만 이일화 씨의 매력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는 점, 이일화 씨는 물론 제작진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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