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냥 스물다섯 살의 아주 쪼매난 배우일 뿐이잖아요.” 그러나 세상의 많은 것들은 크기만으로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다. 그의 말대로 유아인은 연간 20억을 벌어들이는 한류스타도, 이미 경지에 다다른 연기력을 자랑하는 완성된 배우도 아니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수입의 크기나 기술적인 테크닉의 숙련 유무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그가 얼마나 대체 불가능하냐는 것이다. 지금, 배우로서나 자연인으로서나 유아인은 대체불가능하다.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젊은 배우들은 많았다. 그들은 아직 덜 여문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같은 불안함, 대부분 무위에 그치고 마는 세상을 향한 반항을 우수에 젖은 눈빛이나 무기력한 몸짓으로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유아인은 청춘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소년들의 아름다움과 좌절과 절망을 지켜봤다. KBS 에서 해사하게 웃던 아인 오빠는 에 이르러 무력감에 어쩔 줄 모르는 종대를 지나 구질구질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정면으로 돌파()했다. 소년들의 세계는 그저 그렇거나 출구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늘 웃었고, 그 웃음에서 저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훌륭한 소년이 될 것이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종영한 KBS 의 걸오 문재신은 웃지 않았다. “너무 슬프고 아픈 인물을 연기할 때조차 잘 웃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던 유아인에게 세상과 아버지를 향한 분노, 형을 잃은 슬픔을 묻고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재신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 안에 갇혀 있던 재신이 비로소 울부짖고, 웃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재신은 물론 유아인도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아이돌이나 여배우, 한류스타에게 가졌던 막연한 편견” 또한 함께 한 동료들로 인해 깨졌다. “선입견이 아주 많이 깨졌어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들을 예쁘게 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 건 재신이가 윤희와 선준, 용하를 받아들이며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나 자신의 성장이기도 하죠.”
“내일 일어나서 이 세상을 다시 보지 않아도 크게 나쁘거나 슬플 것 같지 않았던 절망의 시기”를 지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안착한 유아인은 연기나 앞날에 대해 말할 때와는 다르게 좋아하는 음악 얘기를 시작하자 명랑한 스물다섯의 스위치가 켜졌다. 그는 “뭔가에 깊게 빠지고 싶을 때, 감정 속에 흠뻑 젖고 싶을 때” 음악을 듣는다. 자신의 아이폰에 담긴 음악들을 뒤져가며 충실한 디제이가 되어 한 곡 한 곡 들려주던 다음의 노래들로 당신 또한 유아인에게 깊게 빠져보시길.
1. 아폴로 18(Apollo 18)의
에서 선정한 2009년 ‘올해의 헬로루키’,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상. 아폴로 18을 향한 평단의 지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 편의 서사시처럼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가지는 그들의 앨범을 듣지 않고선 그 진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에서 유아인이 고른 넘버는 ‘Warm’. “연주곡인데요, 다른 어떤 나라의 밴드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해요. 바람 소리가 휘이익 하면서 시작해서 조용히 가다가 기타소리가 징징징 울리는데, 굉장히 서사적이고 스케일이 커요. 듣고 나면 청량감이 느껴져요. 마치 술 먹고 가슴에 담아놨던 얘기들을 막 쏟아놓는 주정을 하고 난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웃음)” 2. 서울전자음악단의
“보통은 좋아하는 밴드가 있으면 멤버는 누가 있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찾아보는데 전 정말 노래밖에 안 듣거든요. 그래서 누가 멤버인지도 잘 모르고. (웃음) 근데 서울전자음악단은 진짜 탄탄한 거 같아요. 그냥 대중으로서, 팬으로서 봤을 때 아주 탄탄한 기둥이 될 만한 밴드인 거 같아요.” 신중현의 아들 신윤철과 신석철이 멤버인 서울전자음악단은 세련된 사운드와 복고적인 감성이 공존하는 묘한 밴드다. 전자음악과 록의 이질성을 몽환적으로 버무려낸 는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서울의 봄’은 베이스 소리가 너무 좋아요. 이렇게 얘기하면 좀 있어 보이려나요? (웃음) 초반에 베이스 소리가 쭉 고조되면서 따라가는 게 좋더라구요.”
3. 장필순의
“제가 되게 오랫동안 좋아하는 분이에요. 밴드는 남자밴드를 좋아하지만 보컬은 여성보컬을 더 좋아해요.” 장필순의 목소리는 한 가지 색깔만 띠고 있지 않다. 첫사랑을 노래하는 설렘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스산함, 일상의 묘사하는 소소함 등 때에 따라 달리한다. “‘빨간 자전거 타는 우체부’에는 설렘이 있는 거 같아요. (아이폰에 담아 놓은 음악을 들려주며) 저 디제이 같지 않아요? (웃음) 근데 인디 쪽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하면 거기에 대한 선입견이 또 있는 거 같아요. ‘너는 그것만이 좋은 줄 알지만 아니야. TV에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음악도 니 기준으로 나쁘게 바라보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계세요. 전 안 좋게 본 적 없는데 말이죠. 저 시크릿 노래도 따라 부르는데. (웃음)”
4. 언니네 이발관의
“전 한국밴드들을 좋아해요. 그들의 가사에 담긴 정서가 너무 좋아요. 그건 정말 우리나라 밴드들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보컬과 가사가 들어가는 음악으로 제일 좋아하는 건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들이에요.” 언뜻 요란하지 않고 평범한 언니네 이발관 음악의 모양새는 곱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품질 좋은 쌀밥 같다.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 씨는 이런 인터뷰도 하셨더라구요. 세공한 원석을 깎고 깎아서 원이 될 때까지 또 깎아서 만든 게 라구요. 저는 그게 무섭더라구요. (웃음) 그래서 너무 좋아하지만 듣다 보면 가끔 음악의 위압감에 짓눌려서 숨이 막힐 때도 있고. 에서는 ‘의외의 사실’을 제일 좋아해요.”
5. 검정치마(The Black Skirts)의
은 조휴일의 첫 앨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동시에 치기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날 것의 감성 또한 급속동결 시켜 담았다. “검정치마는 생선이 팔짝팔짝 뛰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허를 찌르는 반전들이 있고 가사도 아주 신선하구요. ‘강아지’와 ‘Dientes’를 좋아하는데 ‘강아지’는 정말 도발적이에요. 저도 나름대로는 통통 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분은 정말… (웃음) 그래서 음악 하는 분들이 부럽기도 해요. 음악은 아주 직접적으로 날 담아낼 수 있으니까. 배우는 작품 속에서 여럿이 섞여서 녹여내야 하는데 음악은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 있잖아요. ‘Dientes’ 같은 경우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그걸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면 정신이 훼손됐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진짜 진정성 있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알려진다고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유아인이 좋아하는 밴드들에 대해 한 말은 그대로 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로 인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격한 표현의” 애정을 받고 있는 요즘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에 자칫 도취되기 쉬운 때다. 그러나 청춘에 대한 의미 있는 재정의를 요구하는 유아인이라면 작은 성공에 만족하는 대신 계속 치열하게 싸우지 않을까? “청춘이란 말이 새로 쓰이면 좋겠어요. ‘아유, 저 친구 청춘이야’라고 하는 건 ‘저거, 어린놈이야’라는 뜻이잖아요. ‘청춘’이 그저 미성숙하고 치기 어리고 열정만 가득한 이상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 성숙하고 올바른 자세를 가진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다시 쓰이면 좋겠어요.”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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