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났습니다. 주야장천 여기저기서 당하기만 하는 영애(김현숙) 씨가 하다하다 못해 이젠 믿었던 장 과장(이해영)에게까지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에 열이 올랐지만 이목이 번잡한 버스정류장에 퍼질러 앉아 눈물바람을 하는 건 더 화가 나더군요. 똑 부러진 김연아 선수는 아무리 울어도 말짱하니 예쁘기만 하던데 왜 우리 영애 씨는 마스카라 범벅인 거냐고요. 저렇게 허술하니까 장 과장이 만만하게 본 거지 싶어 속이 상했습니다. 허겁지겁 뛰다가 넘어져 다친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지, 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난 양 흘깃흘깃 쳐다보지. 그걸 보는 제 가슴도 어찌나 아렸는지요. 예전에 삼순이(김선아)도 실연을 당한 후 시꺼먼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된 바 있지만 그건 남자화장실이었긴 해도 남이 보지 않는 곳이었잖아요. 게다가 엉망진창이 된 얼굴 가려보겠다는 게 ‘오늘 생일’이 새겨진 모자라니요. 버스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신기하다며 찍어 인터넷에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장 과장 그렇게 안 봤는데 괘씸하던 걸요

가만 보면 산호(김산호)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지 뭐에요. 다른 드라마였다면 산호가 짠하고 나타나 수건으로든 재킷으로든 감싸 안고 그 자리를 벗어났으련만 역시 는 지극히 현실적이더군요. 게다가 하필이면 생일 선물로 왜 그런 우스꽝스런 모자를 준답니까. 꺼낼 타이밍을 놓쳐 청소 아줌마에게 줘버린 화장품을 그냥 선물로 줬다면 그게 나중에 영애 씨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텐데요. 아, 참. 영애 씨는 모르고 있죠? 산호가 장난스럽게 건넨 생일 파티용 모자와 안경 말고 진짜 선물이 따로 있었거든요.

그래요. 그날은 영애 씨 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장 과장은 왜 영애 씨 생일 날, 그것도 구름 위에 올라앉은 기분인 영애 씨 가슴에 대못을 박은 걸까요. 사귀자고 했다는 사실이 도통 기억 안 난다는 말을, 아무래도 술이 너무 취했었나 보다는 말을, 9년 동안 사귀다 딴 남자와 결혼한, 그러나 이제는 돌싱인 옛 애인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 자신이 싫어 그냥 해본 소리인 모양이라는 맘 아픈 말을 왜 굳이 영애 씨 생일 날 했어야 되느냐는 겁니다. 딴에는 한시라도 빨리 확실히 해두는 게 도리라 여겼나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올 뻔 했습니다. 미친 거 아니냐며 등짝을 한 대 갈기고 싶기까지 했어요. 연신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영애 씨가 얼마나 처참한 기분일지는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하기야 장 과장이 워낙 무심하고 눈치 없는 사람이긴 합니다. 무엇보다 괘씸한 건 말이죠, 옛 애인인 현주와의 어정쩡한 감정은 아무 소리 못한 채 감수하고 있으면서 영애 씨에겐 잘도 선을 그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영애 씨를 만만하게 본 거라고요. 지금 영애 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

물론 그간의 장 과장의 섬세한 배려들이 죄다 일종의 어장관리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솔직히 장 과장이 그 정도로 치졸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영애 씨를 쉽게 여겼다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네요. 소탈하고 속 깊은 영애 씨가 누구보다 편하고 좋았겠지만 배우자로는 선뜻 내키지 않았던 걸 거예요. 산호가 영애 씨에게 타박을 줄 때마다 무례하다며 나무라더니 결국 영애 씨 평생 최고의 상처를 안겨 준 장 과장에게 가위표 백만 개를 날립니다.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아이가 “엄마, 나는 쟤가 너무 너무 좋은데 쟤는 내가 싫대”라며 괴로워할 때 아닐까 해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돈으로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대신 얻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영애 씨가 얼마나 오래도록 장 과장에 대한 마음을 키워왔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남녀 사이의 필수 덕목이다 생각하는 저로서는 영애 씨가 어서 장 과장에 대한 마음을 접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한 가지, 제발 자신을 좀 더 사랑하세요. 만약을 대비해서 눈 화장 제품은 워터 프루프로 바꾸고 상처 치료용 밴드도 챙겨 다니시고요. 장 과장에게 상처 받았다고 산호에게 유턴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마시고요. 그저 자신을 돌보는 데에 힘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서른셋이라는 인생의 절정기를 남 때문에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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