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 쏴’ 문제든 장녀의 임신 중절 문제든 장남의 커밍아웃 문제든, SBS 의 양씨 일가는 온갖 사안을 다 가족회의에 붙인다. 3대에 걸쳐 세대도 성별도 취향도 입장도 각기 다른 이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캐릭터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군을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작품 안의 세계에서 이 사회 안의 그 어떤 공간에서보다 마음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의견을 정립하고 접점을 찾아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느 저녁 양씨 일가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토론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는 특정 사안과 관련이 없다. 정말이다.
“다음 주 목요일에 우리 마을 이장 선거가 있어. 알다시피 지난 12년 동안 이장을 하셨던 분이 거소 투표 부정으로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이번에 처음으로 주민 직접 투표가 이루어지는 만큼 우리 식구들은 모두 참여했으면 좋겠는데…” 비교적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던 중 병태가 모두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명 후보 공보물 집집마다 다 갔으니까 한 번씩 읽어보라구 한 거 잊지 않았지?” 부지런히 참외를 깎던 민재가 재빨리 거들자 멀찌감치 앉아 이를 쑤시고 있던 시부가 제일 먼저 나섰다. “느이들 모두 1번을 뽑아라. 그 친구가 되면 저짝 다리부터 이 동네 밭 사잇길까지 싹 다 도로를 내준다니 차 다니기가 좋아질 것이다. 바깥 외출 다닐 때 택시 부르기도 쉽구 땅값도 더 오를 것이구…”
신나서 떠들어대는 시부의 말을 막아선 것은 낮부터 속이 불편하다며 매실액을 한 모금 부어 입 안에 굴리고 있던 시모였다. “아니 그 영감이 젊었을 땐 지 회사 경리랑 눈 맞아 살림 차리구, 늙어서는 경로당에서 만난 할망이랑 바람나서 그 때마다 마누라가 농약 들이구 난리났던 종자 아니우꽈? 어디서 그런 빌어먹을 늙은이가 나선다구 나서길! 그런 걸 뽑아주는 눔들도 죄다 밸 빠지고 노망난 것들이지. 쯔쯔” 오랜만에 또 시작되는구나…눈치를 살피던 가족들이 각자 들고 있던 포크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너무 열내지 마시오. 잘헌 짓이라고는 못하지만 사내가 살다 보면 미모의 여인에게 혹할 때도 있고 또 두 집 살림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단 돈이 많으니 동네사람들 돈 탐허지 않을 것이고. 또 아주 성품이 호탕한 것이 큰일 헐 사람이오.” 아버지, 제발 닥치…입 다무세요. 병걸이 초조하게 접은 다리를 달달 떨었다. “허얼씨구 호탕은 죄다 첩년들 치마폭에 갖다 부었수꽈? 뭐는 무엇끼리 논다더니 기집질하는 종자들은 다들 그렇게 끼리끼리 위해주구 편들어주꽈?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소? 으응? 그렇게 그놈하고 마음이 맞으면 거기 가서 밥 얻어먹고 살라고마씨!” 인왕산 호랑이가 부럽지 않을 시모의 노성이 천둥처럼 거실을 울리자 움찔하는 경수의 손을 태섭이 가만히 잡았다. 괜찮아, 끼어들지만 않으면 돼. 입모양으로 말하는 태섭에게 경수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몰래 적어 내밀었다. [우리 엄마보다 목소리 크신 분 처음 본다. 앞으로 할머니께 밉보이면 안되겠어.] 모두들 시모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앉아 있는 거실에 시부의 허망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흐흐…허허허허허허…알었소. 당신 성미는 여전히 짱짱하구려. 차암 고마운 일이오.” 아버지, 허세부리지 마세요…그 순간 병걸의 눈에 흐르는 것이 분명 엄마의 양수는 아니었다.
“당신은 무조건 2번 뽑아. 그 사람이 우리 동네에 무료 놀이방 만들어주기로 했어. 지나 동생 태어나면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야.” 정적을 깨고 다시 나선 것은 지혜였다. “어, 어? 난 4번이 우리 동네에 케이블 방송 놔 준다고 해서 그 사람 뽑으려는데…그거 나오면 프리미어 리그 볼 수 있단 말이야!” 흔히 보기 힘든 수일의 미약한 반항이 가족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지만 지혜는 완강했다. “어차피 지나 동생 태어나면 당신 축구 볼 시간 없어. 내 말대로 해.” 난 절대, 누나 같은 여자랑 결혼 안 할 거야. 속으로 생각하던 호섭은 연주의 얼굴이 떠오르자 부쩍 우울해졌다. “당신 말이라면 가능한 한 뭐든지 다 수용하려고 노력했고 노력하는 나지만 그것만은 못해 안 해. 다른 거 다 포기해두 나만의 투표권은 포기 못해. 나의 축구시청 권리만큼은 포기 못해. 그건 마치 나의 마지막 남은 남성성을 거세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비록 하루 종일 헤헤거리며 당신 떠받들고 지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지나 동생 포대기 둘러 등에 업고 보는 한이 있어도 축구는 볼 거야. 나도 남자, 남자라고!” 형부가 뭘 잘못 먹었나? 저러다 된통 뒤집어쓰려고. 초롱은 언제쯤 수일에게 그만 하라는 사인을 보낼까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누가 당신한테 남자 포기하래? 남자로서보다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그것도 포기 못하면서 둘째를 낳으라고 하다니 야비해! 이건 우리 결혼할 때의 약속과도 다르고 내가 지나 동생 낳기로 했을 때의 약속과도 달라! 부부간의 신의를 배반하는 건 중대한 이혼 사유라는 거 몰라?” 어째서 데리고 들어온 아이가 이 집안에서 내 마누라를 쏙 빼닮았을꼬, 시부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 엄마도 4번이…매주 유기농 식품 장터 마련해 준다고 해서 끌리던데 너 이 서방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니니? 각자 뽑구 싶은 사람 뽑아야지이…” 겁도 없이 격전의 한복판에 뛰어든 것은 역시 민재였다. “엄마! 놀이방 안 생기면 엄마가 지나 동생 봐 줘야 해요. 그래도 이 서방 편 들 수 있어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측면 공격은 역시 강력했다. “아니 얘, 너희들 애 문제는 일차적으로 너희들이 해결해야지, 그렇게 무조건 나한테 보라고 하면 어쩐다니? 지금 놀이방이 문제가 아니라 투표가…” 한 발 물러나자 두 발 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엄만 나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어. 빈말로라도 내 편 한 번 들어준 적이 없어! 언제나 할머니, 아버지, 태섭이, 호섭이, 초롱이…그 다음에야 내 생각 해줬잖아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엄마가 알아요?” “그러는 넌, 뭐 쉬운 자식이었는 줄 알아? 세상에 뭐 하나라도 지 맘대로 안 되는 거 있으면 며칠이고 온몸으로 나 불쾌해요- 하고 다니는 모양이 엄만들 맘에 들었을 것 같애?”
“하하, 어차피 이장 누가 되든 다 약속 안 지킬 게 뻔한데 왜들 이렇게 거품 뿌글거리며 싸우고들 그래요? 그냥 적당히 괜찮은 데서 밥 한 끼, 술 한 번 사주면…” 설레발치는 병걸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병준이 일침을 놓았다. “넌 가만 좀 있어. 조용히 해. 얘기 중구난방 만들지 말고.” 그러나 “아니 요즘 세태가 그렇잖아. 투표할 시간 있으면 놀아야지 뭐하러 진지하게 죽네 사네, 그런 거 결국 전혀 무의미 무가치 불필요한 일 아니야? 어차피 그럴 거면 나에게 실질적으로 주는 게 있는 사람으로…” “무지몽매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내 말이 틀려요? 에?” “말 안 들어? 안 들어?” “안 들으면, 안 들으-” 뻑 소리와 함께 병준의 불 주먹이 병걸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아으으으- 병걸이 머리통을 쥐고 바닥을 뒹굴었지만 감히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삼촌, 그러니까 아까 닥치…입 다무시지…병걸을 애잔하게 바라보던 호섭은 문득 형 태섭을 향한 샘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음…저기, 태섭이는 어떻게 할 셈이냐?” 한 마디 말도 없이 아수라장을 지켜보고만 있던 병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곧 오피스텔로 이사 나갈 거라 누가 당선되든 크게 영향은 없을 것 같은데요. 혹시 특별히 추천하실 분이 있으면…” 태섭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2번 뽑아줘. 알았지? 이 사람이 배신했으니까 오빠가 한 표 줘야해” “배신이라니, 당신 말 다했어?” “아냐 태섭아, 엄마한테 한 표 줘. 응?” “이 할애비 말 듣거라! 도로가 생기면 너도 차를 가지고 다니기가 편허구…땅도 느이들 재산인데-” “할미는 기집질하는 놈들이 나랏일하는 꼴은 못 본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섭이 결심한 듯 말했다. “전, 아버지가 뽑으시는 분으로 할께요.” “나두!” “저두요!” 초롱과 호섭이 뒤를 이었다. “허허…그게 말이야. 투표라는 게 원칙적으로 비밀이라서 말이지. 내가 너희들 앞에 누굴 뽑겠다고 말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니? 비록 난 다른 가족들과 의견이 일치한 부분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너희들이 내 소수 의견을 따라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없구 말구. 내 보기엔 수질오염도 재조사나 마을 버스 개선이 참 의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허허” 3번, 3번, 3번이란 얘기구나. 저 무서운 사람…인자한 얼굴로 너털웃음 짓는 병태를 바라보며 양씨 일가의 밤이 깊어만 갔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다음 주 목요일에 우리 마을 이장 선거가 있어. 알다시피 지난 12년 동안 이장을 하셨던 분이 거소 투표 부정으로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이번에 처음으로 주민 직접 투표가 이루어지는 만큼 우리 식구들은 모두 참여했으면 좋겠는데…” 비교적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던 중 병태가 모두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명 후보 공보물 집집마다 다 갔으니까 한 번씩 읽어보라구 한 거 잊지 않았지?” 부지런히 참외를 깎던 민재가 재빨리 거들자 멀찌감치 앉아 이를 쑤시고 있던 시부가 제일 먼저 나섰다. “느이들 모두 1번을 뽑아라. 그 친구가 되면 저짝 다리부터 이 동네 밭 사잇길까지 싹 다 도로를 내준다니 차 다니기가 좋아질 것이다. 바깥 외출 다닐 때 택시 부르기도 쉽구 땅값도 더 오를 것이구…”
신나서 떠들어대는 시부의 말을 막아선 것은 낮부터 속이 불편하다며 매실액을 한 모금 부어 입 안에 굴리고 있던 시모였다. “아니 그 영감이 젊었을 땐 지 회사 경리랑 눈 맞아 살림 차리구, 늙어서는 경로당에서 만난 할망이랑 바람나서 그 때마다 마누라가 농약 들이구 난리났던 종자 아니우꽈? 어디서 그런 빌어먹을 늙은이가 나선다구 나서길! 그런 걸 뽑아주는 눔들도 죄다 밸 빠지고 노망난 것들이지. 쯔쯔” 오랜만에 또 시작되는구나…눈치를 살피던 가족들이 각자 들고 있던 포크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너무 열내지 마시오. 잘헌 짓이라고는 못하지만 사내가 살다 보면 미모의 여인에게 혹할 때도 있고 또 두 집 살림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단 돈이 많으니 동네사람들 돈 탐허지 않을 것이고. 또 아주 성품이 호탕한 것이 큰일 헐 사람이오.” 아버지, 제발 닥치…입 다무세요. 병걸이 초조하게 접은 다리를 달달 떨었다. “허얼씨구 호탕은 죄다 첩년들 치마폭에 갖다 부었수꽈? 뭐는 무엇끼리 논다더니 기집질하는 종자들은 다들 그렇게 끼리끼리 위해주구 편들어주꽈?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소? 으응? 그렇게 그놈하고 마음이 맞으면 거기 가서 밥 얻어먹고 살라고마씨!” 인왕산 호랑이가 부럽지 않을 시모의 노성이 천둥처럼 거실을 울리자 움찔하는 경수의 손을 태섭이 가만히 잡았다. 괜찮아, 끼어들지만 않으면 돼. 입모양으로 말하는 태섭에게 경수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몰래 적어 내밀었다. [우리 엄마보다 목소리 크신 분 처음 본다. 앞으로 할머니께 밉보이면 안되겠어.] 모두들 시모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앉아 있는 거실에 시부의 허망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흐흐…허허허허허허…알었소. 당신 성미는 여전히 짱짱하구려. 차암 고마운 일이오.” 아버지, 허세부리지 마세요…그 순간 병걸의 눈에 흐르는 것이 분명 엄마의 양수는 아니었다.
“당신은 무조건 2번 뽑아. 그 사람이 우리 동네에 무료 놀이방 만들어주기로 했어. 지나 동생 태어나면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야.” 정적을 깨고 다시 나선 것은 지혜였다. “어, 어? 난 4번이 우리 동네에 케이블 방송 놔 준다고 해서 그 사람 뽑으려는데…그거 나오면 프리미어 리그 볼 수 있단 말이야!” 흔히 보기 힘든 수일의 미약한 반항이 가족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지만 지혜는 완강했다. “어차피 지나 동생 태어나면 당신 축구 볼 시간 없어. 내 말대로 해.” 난 절대, 누나 같은 여자랑 결혼 안 할 거야. 속으로 생각하던 호섭은 연주의 얼굴이 떠오르자 부쩍 우울해졌다. “당신 말이라면 가능한 한 뭐든지 다 수용하려고 노력했고 노력하는 나지만 그것만은 못해 안 해. 다른 거 다 포기해두 나만의 투표권은 포기 못해. 나의 축구시청 권리만큼은 포기 못해. 그건 마치 나의 마지막 남은 남성성을 거세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비록 하루 종일 헤헤거리며 당신 떠받들고 지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지나 동생 포대기 둘러 등에 업고 보는 한이 있어도 축구는 볼 거야. 나도 남자, 남자라고!” 형부가 뭘 잘못 먹었나? 저러다 된통 뒤집어쓰려고. 초롱은 언제쯤 수일에게 그만 하라는 사인을 보낼까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누가 당신한테 남자 포기하래? 남자로서보다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그것도 포기 못하면서 둘째를 낳으라고 하다니 야비해! 이건 우리 결혼할 때의 약속과도 다르고 내가 지나 동생 낳기로 했을 때의 약속과도 달라! 부부간의 신의를 배반하는 건 중대한 이혼 사유라는 거 몰라?” 어째서 데리고 들어온 아이가 이 집안에서 내 마누라를 쏙 빼닮았을꼬, 시부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 엄마도 4번이…매주 유기농 식품 장터 마련해 준다고 해서 끌리던데 너 이 서방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니니? 각자 뽑구 싶은 사람 뽑아야지이…” 겁도 없이 격전의 한복판에 뛰어든 것은 역시 민재였다. “엄마! 놀이방 안 생기면 엄마가 지나 동생 봐 줘야 해요. 그래도 이 서방 편 들 수 있어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측면 공격은 역시 강력했다. “아니 얘, 너희들 애 문제는 일차적으로 너희들이 해결해야지, 그렇게 무조건 나한테 보라고 하면 어쩐다니? 지금 놀이방이 문제가 아니라 투표가…” 한 발 물러나자 두 발 밀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엄만 나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어. 빈말로라도 내 편 한 번 들어준 적이 없어! 언제나 할머니, 아버지, 태섭이, 호섭이, 초롱이…그 다음에야 내 생각 해줬잖아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엄마가 알아요?” “그러는 넌, 뭐 쉬운 자식이었는 줄 알아? 세상에 뭐 하나라도 지 맘대로 안 되는 거 있으면 며칠이고 온몸으로 나 불쾌해요- 하고 다니는 모양이 엄만들 맘에 들었을 것 같애?”
“하하, 어차피 이장 누가 되든 다 약속 안 지킬 게 뻔한데 왜들 이렇게 거품 뿌글거리며 싸우고들 그래요? 그냥 적당히 괜찮은 데서 밥 한 끼, 술 한 번 사주면…” 설레발치는 병걸에게 싸늘한 표정으로 병준이 일침을 놓았다. “넌 가만 좀 있어. 조용히 해. 얘기 중구난방 만들지 말고.” 그러나 “아니 요즘 세태가 그렇잖아. 투표할 시간 있으면 놀아야지 뭐하러 진지하게 죽네 사네, 그런 거 결국 전혀 무의미 무가치 불필요한 일 아니야? 어차피 그럴 거면 나에게 실질적으로 주는 게 있는 사람으로…” “무지몽매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닥치고 있어!” “내 말이 틀려요? 에?” “말 안 들어? 안 들어?” “안 들으면, 안 들으-” 뻑 소리와 함께 병준의 불 주먹이 병걸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아으으으- 병걸이 머리통을 쥐고 바닥을 뒹굴었지만 감히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삼촌, 그러니까 아까 닥치…입 다무시지…병걸을 애잔하게 바라보던 호섭은 문득 형 태섭을 향한 샘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음…저기, 태섭이는 어떻게 할 셈이냐?” 한 마디 말도 없이 아수라장을 지켜보고만 있던 병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곧 오피스텔로 이사 나갈 거라 누가 당선되든 크게 영향은 없을 것 같은데요. 혹시 특별히 추천하실 분이 있으면…” 태섭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2번 뽑아줘. 알았지? 이 사람이 배신했으니까 오빠가 한 표 줘야해” “배신이라니, 당신 말 다했어?” “아냐 태섭아, 엄마한테 한 표 줘. 응?” “이 할애비 말 듣거라! 도로가 생기면 너도 차를 가지고 다니기가 편허구…땅도 느이들 재산인데-” “할미는 기집질하는 놈들이 나랏일하는 꼴은 못 본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섭이 결심한 듯 말했다. “전, 아버지가 뽑으시는 분으로 할께요.” “나두!” “저두요!” 초롱과 호섭이 뒤를 이었다. “허허…그게 말이야. 투표라는 게 원칙적으로 비밀이라서 말이지. 내가 너희들 앞에 누굴 뽑겠다고 말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니? 비록 난 다른 가족들과 의견이 일치한 부분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너희들이 내 소수 의견을 따라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없구 말구. 내 보기엔 수질오염도 재조사나 마을 버스 개선이 참 의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허허” 3번, 3번, 3번이란 얘기구나. 저 무서운 사람…인자한 얼굴로 너털웃음 짓는 병태를 바라보며 양씨 일가의 밤이 깊어만 갔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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