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는 푸르다. 청신한 5월의 초목처럼 푸릇푸릇한 청춘들이 있다. 누군가의 스무 살 언저리 기억들을 도려내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것처럼 그들은 생생하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시련을 겪지만 그것을 딛거나 혹은 껴안고 앞으로 계속 걸어간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거나 가족 같은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 갑자기 자궁암을 선고받는 것. 혹은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와 한 공간에 있는 걸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늘 장애물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누도 잇신 감독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극복해가는 청춘들을 찬찬히 비춘다. 온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가만히 말을 거는 친구처럼. 그는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대신 아주 작은 변화로 훌쩍 자란 이들을 필름에 새겨 넣는다. 더 이상 2인분이 아닌 혼자 먹을 생선을 굽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의 뒷모습에 머무는 카메라는 어떤 말보다 그녀의 홀로서기를 보여준다. 에서 자신을 버리고 게이 바의 마담이 된 아버지를 증오하던 사오리(시바사키 코우)가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릴 때, 화해로 발을 내딛은 그녀가 보인다.

이누도 잇신의 청춘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 안에서는 분명 뭔가가 자랐고, 그 무언가는 관객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로 남는다. 성공이나 야망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청춘의 특권을 그만큼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이가 있을까? 그래서 최근 개봉한 는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마츠모토 세이쵸의 추리소설 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남편의 실종을 추적하는 아내 데이코(히로스에 료코)가 맞서는 사건들을 다뤘다. 추리소설의 문법에 충실하면서 그의 어떤 전작보다도 큰 스케일을 자랑하는 시대극은 이누도 잇신의 이름과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데이코가 단순히 사건을 추리해 가는데 그치지 않고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조제나 사오리와 겹쳐진다. “결혼 전엔 순진하기만 했던 여성이 남편을 찾아가면서 진정한 아내로 성장해간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요.”생물학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멈춰있거나 노화하지 않고 늘 자신을 깨고 나가는 그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이누도 잇신 감독 또한 로 새로운 모험을 했다. 더 이상 청춘과 사랑, 감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길 거부하는 그가 자신에게 너무도 특별한 다섯 편의 영화를 말했다. 다음은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에서 CF감독으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그를 키워낸 영화들이다.



1. (Dirty Harry)
1971년 | 돈 시겔
“중2 때 처음 본 뒤로 어른이 되어서도 여러 번 본 영화예요. 어렸을 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대스타가 나오는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하루 종일 만 분석하는 시간을 가질 정도로 교과서적인 영화죠. 요즘 학생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더 잘 알고 있는데, 사실 이 영화를 만든 돈 시겔 감독이 그의 영화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는 돈 시겔에게 바치는 작품이기도 해요.” 근무 중 희생된 샌프란시스코 경찰을 추모한다고 밝히고 시작하는 영화는 강한 경찰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고 있다. 형사 해리(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자비하게 범인들을 잡아들이고, 그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다. 정의의 화신이지만 악당에게는 가차 없는 그는 새로운 영웅이었다. 총 5편에 이르는 시리즈가 나오는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모두 주연을 맡았고, 4번째 시리즈는 직접 감독을 하기도 했다.



2. (Still Walking)
1957년 | 페데리코 펠리니
“의 젤소미나와 함께 카비리아라는 캐릭터를 아주 좋아해요. 카비리아는 끊임없이 남자들에게 속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는 순수한 여자예요. 항상 속으면서도 남을 믿으려고 하는. 특히 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죠. 여느 때처럼 또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한 카비리아에게 한 젊은이가 말을 걸어요. 그 분위기가 희망적이면서도 구원적이예요. 그냥 안녕이라는 말인데도 그의 한마디를 통해 심플하면서도 멋진 장면으로 완성되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영화상 가장 멋진 라스트 신입니다.” 거리의 여자 카비리아(줄리에타 마시나)와 마주치는 모든 남자들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거나 얼마가지지 않은 것을 빼앗거나 실망만을 안긴다. 카비리아는 애인과 함께 간 소풍에서 지갑을 빼앗기고 물에 빠지거나 운명이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전 재산을 털린다. 그러나 카비리아는 슬퍼할지언정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의 젤소미나에 이어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과 줄리에타 마시나는 또 다른 천사의 모습을 선보인다.



3. (The Castle Of The Spider`s Web)
1957년 | 구로사와 아키라
“셰익스피어의 를 원작으로 한 영화죠. 개인적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존경하기도 하지만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그 중에서도 를 가장 좋아해서 이 영화를 재밌게 보았어요. 특히 같은 경우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에 일본 전통 예술의 형식인 노(能)를 도입해서 더욱 의미가 있죠. 다른 일본영화에서도 노(能)를 이용한 것이 많은데 이 영화가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카부키는 즐기지 않았지만 노는 좋아해서 그의 또 다른 영화인 에서도 노(能)를 볼 수 있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유난히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일본의 전통적인 형식과 접목하길 즐겼다. 을 모티브로 한 , 을 차용한 와 함께 은 를 사무라이 시대로 옮겨왔다. 예언이라는 초현실적인 힘과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참극을 일본의 전통극 노(能)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4. (The Umbrellas Of Cherbourg)
1964년 | 자크 데미
“원래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해요.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오는 이나 우디 알렌의 도 좋아하고. 도 그렇고 이런 영화들은 마지막에 두 남녀가 꼭 재회하잖아요. 그런 느낌이 참 좋아요. 또 춤과 노래가 나오는 뮤지컬 영화를 좋아해서 나 에서도 응용해보기도 했구요. 뮤지컬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음악이 시작되면 따로 떨어져있던 사람들이 일체화가 됐다가 음악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에요. 모두 모였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현실에 가장 가까운 리얼함이 아닐까요?” 주느비에브(까뜨린느 드뇌브)와 기이(니노 카스텔누오보)의 사랑과 이별, 재회에 이르는 과정을 사탕처럼 달콤한 화면에 담아냈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처리되는 형식은 당시로선 매우 새로운 것이었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전 세계적인 흥행과 함께 1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뮤지컬 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5. (The Texas Chain Saw Massacre)
1974년 | 토브 후퍼
“제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게 의외라구요? (웃음) 은 최고의 공포영화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영화를 보는 편수 자체가 준데다가 공포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지만 원래는 공포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1970년대에는 엄청나게 많은 공포, 괴기영화들을 봤죠. (웃음) 공포영화는 원래 미국에서 만드는 것이 메인인데, 요즘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공포영화들은 예전에 비해 완성도가 많이 떨어져서 아쉽죠.”

1970-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공포영화의 대표작으로 현재의 틴에이저 공포물까지 이어지는 법칙을 수립했다. 시골로 놀러간 도시의 젊은이들과 한 명의 여자 생존자만이 남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더욱 재미있다. 토브 후퍼 감독의 원작을 시작으로 2003년까지 리메이크 작이 발표되었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무서움보다는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에서 가장 신기한 게 어떻게 같은 영화가 히트하는 거죠? 일본에선 같은 영화만 히트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나 처럼 좋은 영화들이 흥행하는 게 신기해요. 정말 훌륭한 일이죠. 일본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완성해서 한국에 찾아오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한국과 일본은 영화에 대한 사고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유난히 한국에서 사랑받는데다 신작 는 부천에서 작업하기도 한 이누도 잇신 감독은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국내에서 열리는 각종 영화제의 단골손님이면서 봉준호 감독의 팬이라고 밝히기도 한 그는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부러움 또한 크다.

“한국의 배우들이 일본 배우들에 비해 대담하게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거 같아 부러워요. 한국배우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일본의 배우들은 연기를 할 때 어느 정도 선을 긋고 거기까지만 연기하는 거 같아서 안타까워요. 한국배우들과 꼭 영화를 찍고 싶어요.”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허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타일로 돌아온 이누도 잇신 감독. 이제 다른 단계로의 진입을 노리고 있는 그가 송강호나 설경구와 작업을 한다면 어떤 영화가 완성될지 벌써 성급한 기대가 앞선다. 아마도 그 결과는 인디영화로 10만 관객을 동원한 전적을 훌쩍 뛰어넘지 않을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