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기자]
영화 ‘사자’에서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 안 신부 역을 연기한 배우 안성기./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로 데뷔한 안성기는 62년 차 배우다. 한국영화의 나이테 같은 존재로 함께 숨쉬고 있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은 시간의 음영이 드리워져 더욱 그윽해졌다. 한길을 걸어온 그의 영화 인생은 그 누구에게든 특별한 울림을 전한다. 그래서 한국영화 100주년인 올해가 그에게는 각별한 의미일 듯싶다. ‘사자’(감독 김주환)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안 신부는 바티칸의 구마 사제단 ‘아르마 루치스(Arma Lucis·빛의 무기)’ 소속 사제다. 어느 날, 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격투기 챔피언 용후(박서준 분)가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악의 세력인 검은 주교 지신(우도환 분)을 쫓으며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 오는 31일 ‘사자’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안성기를 만났다.

10.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점이 있다면?안성기: 시나리오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 역을 내가 할 수 있겠구나, 없겠구나, 매력이 있겠다, 없겠다를 판단한다. 시나리오 이전에 연출자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는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리고 김주환 감독의 ‘청년경찰’(2017)을 봤는데, 재미나게 잘 만든 영화였다.

10. ‘사자’의 시나리오는 어떠했는지?

안성기: 시나리오를 보면서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예산이 많이 들어간 영화를 좀 하고 싶었다. (웃음) 그동안 작은 영화를 많이 했더니 부대끼는 것들이 있더라. 관객들도 너무 못 만났고, 동년배들을 만나면 왜 이렇게 활동이 뜸하냐고 하고, 아이들은 ‘김상중’ 아니냐고 하고···. (웃음) 특히 젊은 관객들과의 만남이 오래됐다. 영화가 TV를 통해서 다시 보여질 때 보는 정도인데, TV와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느낌이 완전 다르다. ‘사자’는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했다.10. 안 신부라는 인물을 어떤 식으로 접근했나?

안성기: 시나리오를 보면 긴장감도 있지만 쉬어가면서 인간적인 모습, 어떤 유머 같은 것도 있었다. 잘하면 이 인물이 굉장히 좋은 느낌을 줄 수 있고, 영화적으로도 플러스가 되겠구나 라는 것이 보였다. 물론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10. ‘사자’는 용후와 안 신부가 이끌어가는 버디 무비다. 현장에서 박서준 배우와의 호흡은 어떠했나?안성기: 아주 좋았다. 내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서준 씨가 리드하는, 그런 느낌을 가질 정도로. 또 서로 배려도 하면서. 둘의 호흡이 쫙쫙 맞아 들어가는 장면은 찍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영화 ‘사자’ 스틸컷.

10. 사제복 차림에서 ‘퇴마록’(1998)의 박 신부가 슬쩍 겹쳐지던데.안성기: 완전히 다르다. 신부의 옷만 입었을 뿐이지 전혀 다른 캐릭터다.

10. 구마 의식에서 했던 라틴어 연기가 힘들지는 않았는지?

안성기: 사실 틀려도 그 누구도 모른다. (웃음) 그래도 아마 다른 말이 나오면 이상했을 것이다. 우리말로 써서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외웠다. 단어들이 무슨 의미인지 거의 몰랐다. 대략적으로 이런 뜻이라고만 이해하고 통째로 외웠다. 중간에 하나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구마 하는 영화들이 좀 무서운 게 많다. 그래서 어떻게들 했나 비교해서 다르게 가보려고 생각은 했는데, 보는 것이 힘들었다. 나 나름대로 해야겠다 싶었다. 분명히 차이점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쪽에서는 기도하듯 주문 외우듯이 하고, 나는 악령하고 실제 싸우듯 소리치면서 했다. 좀 달랐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은가?10. 라틴어 연기의 경우에도 이질감 혹은 이물감 없이 들렸다.

안성기: 감정에 굉장히 충실했다. 이 사람의 무기는 주먹도 아니고 오로지 기도였다. 그래서 거기에 감정을 굉장히 실어서 했다.

10. 안 신부의 능청스러우리만치 척척 받아내는 말솜씨가 일품이었다. 특히 용후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압권이던데.

안성기: 진짜 술을 마시고 했다. 내가 맥주 두어 잔만 마셔도 금방 벌게지니까 술 취한 분장보다는 마시고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10. 극 중 안 신부가 용후에게 “오늘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라는 대사가 참 뭉클했다. 한국영화 관객으로서 62년 동안 스크린을 빛낸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대사였다. “안성기 배우님,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안성기: (웃음) 아, 그런가?

10. 안 신부의 너스레웃음, 제복, 구부정한 어깨는 용후 아버지(이승준 분)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영화 내적으로 용후도 울컥했지만, 영화 외적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면서 울컥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당신이기에 가능한, 감정을 끌어올린 장면이 아닐까?

안성기: 젊은 층은 잘 못 느끼는 지점일 수도 있다.

10. 데뷔 62년 차의 배우에게 영화란?

안성기: 영화는 나의 행복. 영화는 나의 꿈. (웃음)

안성기는 한국영화가 100주년까지 올 수 있게끔 한 영화·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10. 오래 전, 무라야마 도시오가 쓴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라는 당신의 평전을 읽었다.

안성기: 무라야마 도시오는 1990년대 초 도쿄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통역을 맡아주신 분이다. 그때부터 나를 좋아해주고, 끊임없이 연구도 하고, 발췌도 많이 했다. 사실 책 제목은 마음에 좀 안 들었다. ‘안성기 평전’ 이러면 먼지 쌓일 것 같으니까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했는데…. (웃음) 진짜 잘 썼다. 나의 작품과 시대상을 잘 엮어서.

10. “촬영 전날이면 뛰지도 않고 빨리 걷지도 않아요. 가급적 큰소리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지내지요. 왜냐하면 다음 날 촬영을 위해 힘을 아껴두는 겁니다. 숨 하나라도 아껴두고 싶은 거죠”라고 말하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안성기: 지금 그렇게 하기는 좀 힘들다. 예전에 혼자였던 1980년대에는 그랬던 것 같다. 작품도 굉장히 많이 했을 때다. 지금은 내가 영화도 하고, 맡은 일도 있어서 거기에 소모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예전처럼 철저할 수는 없다.

10. 개인적으로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당신의 이름이 아이들이 즐겨 읽는, 존경할 만한 인물의 일대기를 만화로 풀어낸 시리즈에 추가되었으면 한다.

안성기: 제일 좋은 건 영화로 만나는 것이다. 일 년에 한 편씩은 해왔는데 한 4년 간 사람들이 쉰 걸로 안다. 다시 한 번 영화로 방점을 찍어야 할 것 같다. ‘사자’로부터 시작이 되면 좋고. 지난 봄에 ‘종이꽃’이라는 독립영화를 찍었다. 굉장히 따뜻하고 좋은 영화다. 그리고 가을에는 이정국 감독의 독립영화를 하나 찍는다. 예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이 오고 있다. 기다렸더니 이렇게 오는 것 같다.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한다. (웃음)

10. 준비라고 한다면?

안성기: 일단 특별하게 다른 일로 소모를 많이 안 하는 것. 또 오랫동안 운동을 했다. 예전에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정말 체력이 실력에 많이 도움을 준다. 배우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예를 들어 주름이 깊어지고, 얼굴에 이런 반점도 많이 생기고, 머리카락도 빠져 나가지만 어떤 에너지, 즉 체력 같은 것이 딱 버티고 있으면, 전혀 뭐랄까, 힘이 빠졌다는 생각을 (상대에게) 안 준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무슨 일이든 벌이고, 영화 속에서 어떤 역도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체력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 당신이 지켜본 한국영화는 어떠한가?

안성기: 기술적으로는 디지털화 되면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어떤 변화가 더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어떤 느낌, 감상, 감동보다는 즐거움, 재미 쪽으로 흘러가는 취향을 쫓아가다보면 영화가 어디로 갈지 약간 불안한 감이 있기도 하다. 우리 관객들은 드라마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일단 감정선이 있어야 좋아하더라. 그러한 부분을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늘 생각하고,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10.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이다. 한국영화의 나이테 같은 배우로서 소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

안성기: 어려움 속을 뚫고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기분 좋게 또 ‘기생충’이 영화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점을 딱 찍어줘서 그 의미가 더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전의 영화들, 또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자꾸만 새로운 것, 다가올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플러스로, 이전에 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말아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박미영 기자 stratus@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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