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옥자연, 조재현/사진제공=수현재씨어터

받아들일 준비도 없이 시작된 갑작스러운 만남이지만, 빠져드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15년 전을 이야기하는 두 남녀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한다. 연극 ‘블랙버드'(연출 문삼화)는 갇힌 공간을 통해 상황의 갑갑함, 혹은 멈춰버린 그때 그 기억을 상기시킨다.

배경은 콘테이너박스. 15년 전 마흔이었던 레이(조재현)는 어느새 흰머리의 중년이 됐고, 당시 12살이었던 우나(옥자연, 채수빈)는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데, 서로의 입장만 늘어놓는다. 어딘가 괴기스럽고, 과격하면서 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둘의 대화는 움직임 없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뤄지지만, 대화의 시공간은 현재와 과거를 마구 넘나들어 자연히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절로 15년 전이 떠오른다.

조재현/사진제공=수현재씨어터

원 캐스트로 나선 조재현의 눈빛은 어딘가 애처롭다. 과거 자신의 처절했던 심정을 온몸으로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지만, 우나의 방어도 만만치 않다. 15년을 타인의 눈빛에 갇혀 살았던 그는 레이의 눈빛 따위 읽을 여유가 없다.90분간의 두 남녀의 대화는 편집 없는 리얼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고, 둘의 감정 충돌을 숨죽이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옥자연의 우나는 강하다. 15년을 절저히 고립된 채 살았다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대사 하나하나에 슬픔과 분노를 눌러 담았다. 채수빈의 우나는 가련하다. 또 환하게 웃는 미소에서는 15년 전 소녀와 같은 천진함이 묻어있다. 각기 다른 우나가 조재현의 레이를 만나 비로소 빛을 발한다.

분명 흐름은 불친절하게 이어지나, 극은 깊은 메시지를 녹여냈다. 가해자로 수감생활을 마친 이들이 사회로 나왔을 때, 그리고 피해자로 그 긴 세월을 보낸 이들의 울부짖음, 우리는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레이와 우나의 엇갈린 기억 속 감정 충돌에 끝은 없다. 실타래는 풀릴 듯 말듯하여, 모든 건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극이 저 깊숙한 곳에 숨겨둔 메시지 역시 모두 우리의 몫이다.

오는 11월 20일까지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공연된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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