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윤준필 기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배우 한이서는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연기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긴 무명생활 끝에 MBC ‘여자를 울려’로 드라마에 데뷔했다. 그러나 여전히 배우 한이서보다 철부지 부잣집 막내딸 강진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늦게 데뷔한 만큼 얼른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을 법도 한데, 한이서는 배우로서의 내실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천천히 배우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이서에게 ‘여자를 울려’ 속 악녀 강진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Q. 첫 드라마가 끝났다. 소감이 어떤가?
한이서 : 아직 ‘여자를 울려’가 방영 중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직 내 안에 강진희가 남아있는 상태다. 얼른 다시 한이서로 돌아와서 또 다른 좋은 작품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마음뿐이다.Q.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한이서 : 진로를 빨리 정한 편이다. 중3 때 어머니와 연극을 처음 보고 연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후 국악예고 음악연극과로 진학하고, 대학도 영화예술학과로 진학해서 꾸준히 연기자의 길을 준비해왔다.
Q. 그런데 연기자로 데뷔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이서 : 물론 힘들었다. 어떤 것을 성과 없이 계속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앞만 보고 계속 조금씩 걸어갔다. 수백 번 오디션에서 떨어져도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가만히 앉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조금이라도 시도하면서 좋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Q.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드라마 속 진희의 모습과 다른 것 같다. (웃음)
한이서 : 평소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 진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굉장히 조급해하는 캐릭터였지만 나는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배우한테도 조급한 마음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내 자신을 긍정적으로 컨트롤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성실하게 꾸준히 연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Q. ‘여자를 울려’에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한이서 : 나도 드라마에 캐스팅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첫 작품이니 ‘잘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이 작품에 누가 되지 말아야할 텐데’란 걱정이 먼저 들더라.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 하니까 정말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Q. 그럼 본인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훨씬 더 좋아했겠다.
한이서 :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 한동안 캐스팅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잘해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고, 내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나서 괜히 조심스러운 마음에 알리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여자를 울려’ 예고편에 내가 나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봤다.
Q. 캐릭터 연구는 어떻게 했는가?
한이서 : 강진희란 캐릭터가 살아온 방식이나 주변 환경이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했으면 준비하기가 편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힘들었다. 그래서 ‘청춘의 덫’ 같은 드라마에서 악녀 연기하셨던 선배님들의 모습이나 불륜을 다룬 시사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캐릭터 연구를 많이 했다.
Q. 시사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한이서 : 의외로 그런 프로그램에서 불륜을 많이 다룬다. (웃음)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들 인터뷰를 보면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더라.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강조한다. 그런 사람들의 인터뷰들을 보면서 ‘여자를 울려’에서 강진희가 경철을 사랑하는 진희만의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Q. 악녀 연기를 했던 선배들 중에선 누구를 많이 참고했나?
한이서 : 강진희가 보여주는 감정 신이 멜로의 느낌보단 에너지를 폭발하는 감정 신이다보니 장서희 선배님의 ‘인어아가씨’를 많이 참고했다. 장서희 선배님도 ‘인어아가씨’에서 멋진 악역 연기를 보여주고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지 않았나. 드라마 외적인 모습도 지금 내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장서희 선배님의 연기를 열심히 봤다.Q. 바깥을 다니다보면 알아보는 사람도 많이 늘었을 것 같다.
한이서 : 촬영 현장에서 지나가시던 분들이 ‘여자를 울려’ 촬영 구경하시다가 저를 보고 욕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주변 분들이 문자나 메신저를 통해 ‘내가 지금 커피숍에 왔는데 옆 테이블 아주머니들이 진희 욕을 엄청 하고 있는 중이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한다. 이런 반응들이 진희를 연기하는데 큰 에너지를 줬다.
Q. 한이서가 강진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한이서 : 진희와 달리 사랑할 때 집착하지 않는다. 나 싫다고 하는데 좋다고 매달리지도 않고, 임자 있는 것은 욕심내지도 않고.(웃음) 남녀 간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Q. 기억에 남는 촬영이 있다면?
한이서 : 첫 촬영하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그야말로 ‘얼떨떨’이었다. 첫 신부터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감정 신이었는데 마치 경마장 말처럼 미친 듯이 전력 질주를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달린 것 같다. 촬영이 다 끝나고 내가 뭘 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Q. 첫 촬영에선 잔뜩 긴장했다고 했는데, 언제쯤 여유가 생겼나?
한이서 :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여유보다 진희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희의 행동이 이해가 되니까 가엽고 안쓰럽더라. 감정 신을 찍는데 내가 진심으로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Q. 완전히 강진희에 몰입을 했나보다.
한이서 : 평상시에는 화장을 안 하고 편하게 지내는데, 진희에 몰입했을 때는 도저히 화장을 하지 않고 거울을 보지 못하겠더라. 화장을 안 한 내 모습이 너무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심지어 민낯으로 밖을 돌아다니기가 창피할 정도였다. 이제는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신기하다.
Q. 촬영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이 있었을까?
한이서 : 늘 모든 장면이 아쉽다. 방송 모니터링을 하면서 아쉬운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촬영이 마치고 돌아가는 차에서도 항상 자책한다. 찍을 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나서 늘 아쉬워한다. 이런 것들도 다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를 울려’를 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바탕으로 다음 작품에서 더 좋은 연기를 하고 싶다.
Q. 신인 배우로서 이순재라는 대선배 앞에서 촬영했을 때는 힘들지 않았나?
한이서 : 이순재 선생님과 일대일로 있는 신보다 거실에서 가족들 사이에 앉아 계시는 이순재 선생님과의 촬영이 힘들었다. 이순재 선배님 곁에 서계신 선배님들도 다들 경력이 어마어마하신 분들 아닌가.(웃음) 그래도 이순재 선배님께서 매 신마다 많은 도움을 주셨다.
Q. 대학생 시절 연기를 가르쳐주신 은사님과 같은 드라마에서 연기한다는 것 또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한이서 : 물론이다. 촬영장에서 뵙는 이순재 선배님은 학교에서의 모습과 또 달랐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서 한없이 자상하시고, 하나라도 제자들에게 더 알려주시는 그런 부드러운 분이셨다면, 촬영장에선 그런 모습들보다 항상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연기에 전념하시는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의 모습이었다.
Q. 그런 선배님과 연기를 하는 매순간이 배움의 연속이었겠다.
한이서 : 물론이다. 이순재 선배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배님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겐 모두 배워야할 점이었다. 대본 리딩을 할 때도, 물론 내 것도 잘 해야 했지만, 선배님들이 어떻게 하시는지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고 노력했다.
Q. 상대 배우였던 인교진과의 호흡은 어땠나?
한이서 : 처음에 내가 낯도 가리고 어려워했었는데 인교진 선배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려워하면 맞춰보자”고 이야기해주셨다. 또, 내가 선배님을 때리는 장면에서도 “괜찮다. 편하게 해라”라고 먼저 배려해주셔서 늘 감사했다. 그리고 현장 분위기를 밝게 해주시고 항상 유머러스하게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신다. 정말 고마운 선배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정말 내가 진희가 된 것처럼 선배님을 두고 떠나는 것만 같아 특별한 느낌이었다.
Q. 김정은과 부딪히는 장면도 많았다. 김정은은 한이서에게 어떤 배우였나?
한이서 : 김정은 선배님은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도 정말 좋으신 분이다. 김정은 선배님은 촬영이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덕인이 된다. 그때부터는 배우 김정은이 아니라 ‘여자를 울려’의 덕인인 것이다. 김정은 선배님과 연기를 하면서 선배님만의 아름다운 감성이 많이 느꼈다. 배우로서 나도 그런 아름다운 감성을 갖고 싶다.
Q. 첫 작품이 끝났는데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본다면?
한이서 : 어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웃음) 원래부터 내 자신에게 후하지 못한 편이기도 하고,스스로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좀 닭살스럽다.
Q. 본인에게 좋은 점수를 못 주겠다는 뜻인가? (웃음)
한이서 : 배우는 만족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그건 감독님과 선배님들 덕분인 것이지 나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Q. 배우 한이서의 롤 모델은 누구인가?
한이서 : 드라마를 하기 전까지 나도 좋아하는 배우, 닮고 싶은 배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여자를 울려’를 하면서 내가 속해있는 드라마의 모든 선배님들을 롤 모델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신인 배우인 내가 롤 모델로 누군가 한 명을 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Q.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한이서 : ‘여자를 울려’를 찍으면서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여러 선배들에게 배운 것들이 많았다. 배우가 작품을 통해 비쳐지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챙기는 마음, 배우로서의 감성, 연기에 대한 집중력, 힘들어도 현장을 밝게 하는 마인드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을 더 먼저 배우고, 겸손해지는 것이 롤 모델을 정하는 것보다 먼저라고 생각한다.
Q. 앞으로 맡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한이서 : 평소 승마도 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액션 연기를 한 번 해보고 싶다. 진희랑은 전혀 다른 캐릭터였으면 좋겠다.
Q. 그럼 악녀 캐릭터가 들어온다면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한이서 : 아니다. 진희보다 더 센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Q.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한이서 : 꼭 한 명만 골라야 하나? (웃음)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하는 단계인 나한테는 최대한 많은 선배님들과 함께 하면서 그분들의 장점을 스펀지처럼 막 빨아들이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조금 더 내 인생을 살아보고, 다양한 작품에서 여러 캐릭터를 맡고 또 작품을 함께 하는 선배들의 좋은 점들을 닮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면 배우 한이서의 틀이 점차 잡힐 것이라 생각한다.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는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Q. 연기자 한이서의 각오를 듣고 싶다.
한이서 : ‘다음에는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하고 시청자들에게 기대감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일단 다음 작품을 잘하고 싶다. 열심히 하다보면 다음 연기를 기대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계속 인정받다보면 언젠가 배우 한이서의 이름을 기억해줄 날이 오지 않을까.
윤준필 기자 yoon@
사진. 아이오케이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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