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영화인들이 작품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무당이라면? 게다가 사투리까지 소화한다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건 카메오 수준을 넘어선, 제대로 된 연기를 요하는 일이니 말이다. ‘극비수사’ 기자시사회 현장에서 객석이 술렁인 건 이 때문이다. 극중 “아가 벌써 눈을 감아부따”라는 말로 아이를 유괴당한 여성을 한방에 쓰러뜨린 애기무당. 바로 ‘극비수사’ 홍보를 맡고 있는 ‘영화인’ 신유경 대표였다. 평소 ‘포스가 장난 아닌’ 홍보사 대표로 불려온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 데뷔가 아닐 수 없었다.

영화 홍보라는 것이 “신문에 조그마하게 공고 형식으로 내는 게 전부”였던 시절, ‘영화인’이라는 전문홍보사를 차린 신유경 대표는 1999년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를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영화들로 관객들을 유혹하고 유인해 왔다. 그 중엔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해운대’ ‘아바타’ 등 천만관객을 매료시킨 작품도 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처럼 디즈니가 득세했던 애니메이션 시장에 파문을 던진 작품도 있다. 영화 흐름이 바뀌는 주요 길목 길목에 그녀가 있었던 셈이다.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그녀의 영화인생을 돌아 봤다.

Q. 요즘 ‘신배우’라 불린다고.(웃음)
신유경:
미치겠다. 이 정도일 줄이야.(웃음) 캐릭터가 평범하지 않아서 ‘영화가 개봉하면 한 마디씩 하겠구나’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하긴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신기하게 보는 것 같다. 놀라는 중이다.Q. 왜 안 그렇겠나. 하물며 무당 캐릭터인데.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신유경:
곽경택 감독님-투자배급사와 ‘극비수사’를 위해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일종의 상견례 같은. 곽경택 감독님과는 ‘친구2’ 등을 통해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편하게 얘기하는데 감독님이 “사무실을 구하고 있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저희 건물 5층으로 오시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영화인’ 자리가 논현동의 모든 수맥이 모여드는 곳이라서 기가 약한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기가 센 사람은 버티거나 대박이 난대요. 감독님 기라면 충분히 대박 나실 수 있을 거예요”했다. 그 이야기를 내가 좀 진지하게 하긴 했다. 감독님이 가만히 보시더니 뜬금없이 “영화 출연 한 번 안 하실래요?”하셨다. “무슨 영화요?” “‘극비수사’죠.” “아니, 제가 거기에서 할 만한 역이 뭐가 있다고.” “딱 맞는 게 있어요.” “뭐죠?” “애기 무당이요.” 이렇게 된 거다.(웃음)

Q. 수맥(水脈)을 논하는 걸 보고, 무당 캐릭터를 떠올리시다니.
신유경:
당시 시나리오를 읽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당이 극 중 어떤 캐릭터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연기를 정말 잘 하는 배우가 리얼하게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역할을 연기 경험 없는 나 같은 초짜가 감히?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도 감독님이 계속 “하자”고!(웃음) “영화에 내가 등장하면 언론시사회 때 기자들, 모두 빵 터져요.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서 분위기가 깨지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해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거절 이유를 백가지 갖다 대도, 다 괜찮다고 하셔서 결국 출연하게 됐는데, 어떻게 보면 감독님 기에 말린 거다. 감독님도 기가 상당하시니까.

Q. 출연한다고 했을 때 ‘영화인’ 내부 반응은 어땠나.
신유경:
자기가 매니저 하겠다는 둥, 배우 스케줄을 따로 받아보겠다는 둥, 난리가 났다. “내가 출연한다는 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 했더니, “여러분! 엠바고가 생겼습니다!” 이러고. 자기들끼리 신난 거지, 뭐.Q. 배우들 입장에서도 마케팅사 대표가 출연하다고 하니, 재미있었겠다.
신유경:
예고편이 공개된 후, (유)해진 씨가 나만 보면 자꾸 씩 웃는다. 직원들에게 “대표님 연기,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했다더라.(웃음)

Q. 예고편이 공개되고 여러 문자를 받았을 텐데, 어떤 문자가 가장 인상 깊던가.
신유경:
글쎄… 아, 5-6년 연락이 끊겼던 분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출발 비디오 여행’ 보는데 당신 나온 거 보고 깜짝 놀라서 연락했다”고.(웃음)

‘극비수사’ 속 애기무당으로 분한 신유경 대표
Q. 배우/영화를 홍보하다가 직접 배우가 돼 보니 어떻던가.
신유경:
날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웃음) 출연 결정이 난 다음날, 바로 조연출에게 전화가 왔다. 프로필 사진을 보내달라고. 연습도 해야 했다. “리딩 하러 오세요.” “그런 것도 해야 해요?” “사투리 배우셔야죠.” 부산 사투리는 극중 유해진 씨 와이프로 나오는 진선미 배우에게 배웠다. 감독님께도 두 번 정도 점검을 받았다. 이후엔 틈틈이 혼자 연습을 했다.

Q. NG는 얼마나…
신유경:
NG는 안냈다. (Q. 오, 타고난!) 촬영 들어가기 전에 분장실에서 장영남 배우, 어머니 역할 하는 이정은 배우와 잠시 대사를 맞춰봤다. 이정은 씨는 배우 고창석 씨 실제 와이프다. 굉장히 활달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갔을 땐, 링거 투혼 씬을 앞두고 계셔서 기운이 없더라. 식사를 안 해서 피골도 상접했는데, 나를 보면서 계속 “무서워, 무서워” 하셨다. 극중에서 내가 “당신 딸. 죽었어!”라고 하니까, 그런 감정을 미리 느끼고 계셨던 거다. 대단하다 싶었다.

Q. 많은 배우들을 지켜봤을 텐데, 대단하다 싶었던 또 다른 배우가 있다면.
신유경:
‘7광구’ 촬영 때 간식으로 치킨을 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하지원 씨는 캐릭터상 몸을 만들어야 해서 정말 풀만 먹더라. 그들은 그게 직업이니까 당연하다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쉬운 일만은 아니지 않나. 류승룡 씨도 ‘표적’에서 중년의 복근을 만들기 위해 엄청 고생했다. 정말 독하게 몸을 만들고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몸을 만든다는 게 단순하게 ‘벗어서 보여준다’의 개념이 아니다. 몸을 만들지 않으면 옷을 입어도 태가 안 나거든. 액션영화인데 주연 배우 몸이 동글동글하면 조금 그렇지 않나. 그래서 더 독하게 노력하셨던 것 같다.Q.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홍보하는 건 아무래도 다를 것 같다.
신유경:
어떤 분들은 “곽경택 감독님, 신의 한수다. 홍보하는 사람 출연시켜서 열심히 홍보하게 한다”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영화는 영화고, 홍보는 홍보다. 별개의 느낌인 것 같다.

Q. 오래 전, 그런 소문(?)이 있었다. “영화 홍보계에 세 마녀가 있다”고.(웃음)
신유경:
하하하. 나하고 누구지? ‘올댓시네마’ 채윤희 대표님과 ‘이노기획’ 김은성 대표님이었나? 그게 영화잡지 엔키노 기획 기사였을 거다. ‘영화홍보계의 세 마녀’로 인터뷰가 나갔던 기억이 난다. 하하.

Q. 미녀도 아니고, 마녀다.(웃음) 남다른 포스가 느껴지긴 한다. 카리스마 있다는 얘기,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신유경:
내가 조선희 사진작가랑 친하다. ‘마이웨이’ 때 처음 만났다. 그녀에 대해서는 만나기 전부터 많이 들었다. ‘세다’ ‘컨트롤하기 쉽지 않다.’ ‘힘들다’ 등등.(웃음) 첫 미팅 때 내가 조금 늦었을 거다. 갔더니, 조선희 작가가 어마어마한 털옷을 입고 앉아있었다. ‘세다!’ 생각했다.(웃음) 친해진 후에 “야, 너는 그 ‘세다’는 느낌을 지워야 하지 않아?”라고 하니까, “아이고~ 사돈 남 말 하시네” 하더라.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언니 봤을 때 얼었었다”고, “들어오자마자 한마디를 딱 하는데, 너무 놀라서 ‘저 여자 누구냐?’ 했다”고 하더라. 나는 논쟁 같은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안 보이는 게 문제다.(웃음)
‘영화인’ 홍보 영화들

Q. 직업을 떠나 좋아하는 영화 취향은 어떤가.
신유경:
계속 변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황금박쥐’ 같은 만화영화를 극장에서 즐겨봤다.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와 서부극을 즐겨 봤는데 존 웨인 나오는 정통 서부극부터 안 본 게 없다. 중고등학교 때는 홍콩영화에 한동안 심취했다. ‘인디아니 존스’ ‘007’ 같은 시리즈물도 즐겨보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서 영화론 수업을 들었는데, 당시 교수님이 고전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셨다. ‘전함 포템킨’, ‘안달루시아의 개’, ‘시민 케인’ 같은 고전들을 수업을 통해 접하면서 영화에 대한 시선이 조금 더 넓어졌던 것 같다. ‘와, 이런 것도 있구나. 내가 알던 영화가 다가 아니구나’ 한 거다. 그런 와중에도 ‘다이하드’ ‘나인 하프 위크’ 등 그 시대 유행한 영화는 빼놓지 않고 봤다.

Q. 장르 취향이 다양한 게, 홍보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신유경:
많이 된다. 내가 초반에 마케팅한 영화들이 ‘중경삼림’ ‘일 포스티노’ ‘바베트의 만찬’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아트 영화들인데, 아마 고전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면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 내가 모든 면에서 얕고 넓다.(웃음) 어떤 거 하나에 푹 삐져 있다가, 또 다른 호기심이 생기면 옮겨가는 식이다.

Q. 그럼에도 정작 직업은 홍보 마케터 한 우물만 팠다.
신유경:
아, 단서를 달아야겠다. 영화라는 틀 안에서 옮겨 다녔다고.(웃음) 하는 일은 똑같지만 다루는 영화가 매일 바뀌니까 흥미를 잃지 않았던 것 같다.

Q. 전공이 신문방송학이다. 원래 광고 쪽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영화홍보와 연이 닿았나.
신유경:
원래는 PD가 꿈이었다. PD의 꿈을 품고 신방과를 갔다가, 2학년 때 우연히 광고론을 듣고 광고에 푹 빠졌다. 그때 또 ‘코바코’라고, 광고 관련된 심의를 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곳에서 칸국제광고제 등 세계의 많은 광고들을 접하면서 더욱 빠져들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86학번인데 우리 때는 신방과가 그렇게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이라는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면서 광고 PD가 인기 직종으로 급부상했다. ‘광고 고시’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내가 졸업할 즈음엔 광고회사들이 소위 말하는 ‘3대 대학’이 아니면 서류도 안 받아 볼 지경이 됐다. 결국 3군데 지원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Q. 나름의 방황기였을까. 방향을 트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신유경:
1990년 졸업 후, 교수님 추천으로 백화점 판촉팀에 들어갔다. 판촉도 마케팅의 일부니까. 1년 후 우진필름에서 영화기획실 카피라이터를 모집한다길래 지원했다. 그때는 영화 광고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신문에 조그마하게 공고 형식으로 내는 게 전부였다. 내가 좋아하는 광고와 영화를 접목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Q. 한국 영화 마케팅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다. 만약 대학 때 서류를 넣은 광고 회사에 합격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신유경: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 있겠지. 성공한 광고쟁의로 강의나 TV에 불려나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광고대행사에 들어간 친구들을 보니까 광고는 수명이 너무 짧더라.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독립을 해야 하는데, 독립된 시장도 너무 크니까 경쟁이 치열하다. 광고 쪽으로 갔다면 꾸준히 일을 못했을 수도 있다.

Q. 영화 쪽은 수명이 어떻다고 보나.
신유경:
이쪽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스스로가 잘 버티면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다. 10년 넘게 영화 한 편 안 찍어도 감독이거나 작가인 분들도 있지 않나.(일동 웃음) 그런데 그렇게 버티면 정말 좋은 기회가 오기도 한다. 다시 일어서는 경우도 있고.


Q. 1999년 설립한 ‘영화인’ 첫 작품은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였다.
신유경:
그게 가이 리치 데뷔작이었을 거다. 기존 영국 이미지를 깨주는, ‘영국에도 저런 병맛들이 살고 있구나’ 싶은 바보들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그 영화 이후 캐나다 감독의 ‘엑시스텐즈’를 했다. 그걸 보고 콜롬비아 사장님이 ‘얘네, 뭔가 새로운 걸 하려나 보다’ 하셨던 것 같다. 덴젤 워싱턴-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본콜렉터’를 맡겨 주셨다. 당시엔 흑인이 주연인 영화가 드물었다. 안젤리나 졸리도 신인이었고. 나름의 전략을 짜서 홍보했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이후 콜롬비아 라인업을 가져오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됐다.

Q. ‘영화인’ 하면 ‘반지의 제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뭔가 흐름을 굉장히 잘 탄 느낌이다.
신유경:
운이 좋았다. 아트영화가 성수기였던 시절에는 ‘일 포스티노’ ‘라빠르망’ 등 아트영화의 꽃들을 홍보했다. ‘일 포스티노’의 경우 처음 개봉했을 땐 망했던 영화다. 이후 영화가 1996년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상을 수상했다. 당시 씨네코아 전무님이 “이 영화는 아깝다. 재개봉을 해 보자” 해서 배급사와 상의, 다시 재개봉을 했는데 그게 17만 명을 동원했다. 당시로 치면 상당한 관객수였다. 이후에도 아트영화 중심에 있는 영화들을 홍보하다가, ‘본콜렉터’로 콜롬비아 라인업을 맡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미녀 삼총사’ ‘패트리어트’ ‘버티칼 리미트’(2000년) 등을 했다. 외화가 블록버스터로 조금씩 옮겨가던 시기였다. 2001년도에는 판타지 영화의 붐을 일으킨 ‘반지의 제왕’을 맡았다.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년)이다. 디즈니 외에는 잘 안 됐던 시장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빵 터졌다. 전국 201만을 동원했다. 디즈니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는 첫 200만 돌파였다. 이후 ‘슈렉3’ ‘쿵푸팬더’ ‘드래곤 길들이기’ 등 좋은 애니메이션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Q. 영화 흐름이 외화에서 한국영화로 넘어오는 길목에도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년)가 전국에 깃발을 꽂았다.
신유경:
한국영화는 오래 전에 ‘세 친구’를 한 적이 있었지만, 이후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태극기 휘날리며’를 했는데, 1000만을 돌파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좋은 길목들에 있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다.

Q. 운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신유경:
하하. 물론 기회가 왔을 때 잘 했으니까 다음 기회가 주어진 건 있었을 거다. 뭐랄까. 절박함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던 것 같다.

Q. 과거가 영화와 묶여서 기억될 것 같다.
신유경:
맞다. 기준이 거의 영화다. ‘반지의 제왕’ 개봉하는 해에 애를 낳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애 낳은 다음 해에 개봉 했고. ‘슈렉3’ 홍보 시기엔 누구랑 함께 했다, 이런 식이다.(웃음) ‘영화인’ 창립기념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했던 2002년 7월 1일로 잡았다. ‘영화인’ 창립은 1999년도이지만, 내가 인수한 후 홍보한 첫 영화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었으니까.(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영화人②]신유경 대표 “개봉 눈치싸움? 과거엔 개봉일 사수가 일종의 자존심이었는데”(인터뷰)

정시우 siwoorain@
사진. 구혜정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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