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원
[텐아시아=장서윤 기자] “20대 때 때론 자만하고, 사람들의 반응 하나에 휘둘렸던 모습이 이제는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올해를 누구보다 강한 여운을 남기며 열어젖힌 김래원에게서는 이제는 쉽게 범접 못한 무게감이 읽힌다. SBS 드라마 ‘펀치’ 속 시한부 인생을 산 박정환 검사 역을 막 내려놓고 일상인 김래원으로 돌아온 그에게서는 아직 드라마 속 상처받은 들짐승같은 박정환의 모습이 가시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 고교생 배우로 시작, 어느덧 데뷔 20년을 바라보는 만큼 또래 배우들보다 성숙한 연륜도 느껴진다. 1월 개봉한 영화 ‘강남 1970’에 이어 ‘펀치’까지, 1년여를 눈돌림 틈 없이 숨가쁘게 지내오면서 연기에 대한 생각과 폭도 한층 진화했다는 그는 “이제 바람에 흔들리는 청춘은 지났다”며 웃음지었다.Q. SBS ‘펀치’가 올 초 신드롬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김래원: 열심히 하긴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좋은 작품이라 왠만큼 기대는 했지만, 늘 기대하는 대로 되지만은 않는데 이번엔 여러 박자가 잘 맞았다. 작가님, 배우들, 제작진 등 삼박자가 잘 맞았고, 특히 서로 간의 호흡이나 조화가 잘 이뤄졌다.
Q. ‘펀치’는 박경수 작가 특유의 대사가 큰 역할을 했다. 도치법이나 은유법이 많은 대사 특성상 소화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래원: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색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건 생각하면 끝이 없다. 20대 때는 대본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풀어가는 가는 배우들이 지닌 몫인 것 같다.
Q. 극중 박정환과 이태준(조재현)의 ‘짜장면 먹방’이 방송 내내 큰 화제를 모을 줄 알았나?
김래원: 재밌었다. 짜장면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처음엔 웬 생뚱맞게 짜장면인가 했다. ‘대검찰청에서 카리스마 있게 있던 이들도 결국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풀어주는 대사를 쓰신건가?’란 생각에 찍을 때는 잘 몰랐다. 짜장면이 이태준과 박정환의 살아온 환경과, 둘의 관계를 암시해주는 매개체일 줄은. 다만 짜장면 먹고 찍은 다음날엔 여지없이 얼굴이 부어 고생을 좀 했다.Q. 그러고보니 조재현과도 MBC ‘눈사람’ 이후 10여년 만에 만났다.
김래원: 이전에 함께 작품할 때 놀러도 가고 친하게 지냈는데 오랜만에 보니 선배라는 어려움과 어색함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선배님이 보자마자 그런 벽을 바로 무너뜨려주시면서 나를 끌어주셨다. 호흡은 환벽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연기가 환상적이었다. 대사를 안 외우고 가도 선배님과 촬영에 들어가면 생각이 날 정도였으니까.
김래원
Q. ‘펀치’는 특히 조재현 최명길 박혁권 등 동료 배우들과의 시너지도 각기 개성있었다. 동료들과 호흡하는 면에서도 변한 부분이 있나김래원: 극 안에서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시너지가 중요하다는 지점을 확실히 알았다. 함께 한 배우분들 한분 한분 모두 잘해주셨지만 나 또한 그분들을 열심히 받아줬다. 좀더 큰 욕심을 냈달까? 20대 때는 그저 내가 돋보이고 싶었다. 연기하면서도 삐딱선을 타고 홀로 빛나보이려 한 적도 있었다면 이제는 서로 잘 받아주는 게 더 큰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아, 거의 20년을 했는데 왜 이제서야 그걸 알았을까.(웃음)Q. 사실 박정환은 이분법적으로 놓고 보면 선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중적인 캐릭터임에도 시청자들이 박정환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김래원: 요즘 악한 게 대세인 것 같다(웃음) 포인트를 준 부분은 작가님이 ‘꼿꼿하고 당당하고 지능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굉장한 엘리트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 이상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만일 정환이 일을 할 때도 죽는다는 설정을 계속 의식하고 갔다면 지루하고 무겁고 힘들었을 거다. 일할 때만큼은 냉철하게, 그리고 아픈 장면에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나쁜 짓을 하는 정환에게도 연민이 가도록, 힘든 상황이 주어질 때 동정표가 가게 하려고 했다.
Q. ‘박정환 어록’이 나올 정도로 의미심장한 대사가 많았는데 스스로 꼽는 최고의 장면이 궁금하다.
김래원: 늘 뻣뻣하게 센 척을 해 오던 정환이 아내 신하경(김아중)에게 ‘살고 싶다’고 고백하며 처음으로 무너진 장면이 있었다. 그 때가 가장 인간적이었던 것 같다. ‘더 살고 싶고, 딸의 입학식에도 가고 싶다’고 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영화 ‘해바라기’ 마지막 부분 울먹이던 장면에서 아쉬움이 있는데 그걸 해소했다. 그 때 감정이 굉장히 복합적이었다. 나의 삶에 대한 집착, 그들에 대한 분노, 현실에 대한 슬픔, 두려움, 아이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와이프에 애틋함이 눈물과 섞여나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실 대사도 다 틀렸는데 한 번만에 끝났다. 엔딩에 들어갔으면 먹방신에 버금가는 신이었을텐데(웃음)
Q. 인생에 있어 큰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스스로도 연민을 가졌을 것 같다.
김래원: 충분히 이해는 됐다. 나는 사실 유복하게 자랐고, 그의 힘든 시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려운 시기를 보낸 인물이 한번쯤 끝까지 올라가고 싶은 야망이 있었을 거다. 그러다 돌이켜보니 ‘내가 무슨 짓을 했었나’란 생각이 들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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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우 김래원은 어떤가, 박정환처럼 목표지향적이고 야망이 많은 편인가김래원: 야망이 있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다. 작품에 대해서도 그렇다. 잘 되서 좋긴 하지만 또 다음 작품에서 더 좋은 연기를 했는데 사랑 못 받을 수도 있고… 그런 과정이 이젠 되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살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야망이라기보다는 ‘소망’이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Q. ‘펀치’ 뿐 아니라 전작인 영화 ‘강남 1970’도 그렇고, 최근 작품을 보면 독해졌다는 느낌이 드다,
김래원: 독한 역할을 맡았다. 둘 다 어렵게 자라 야망도 크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남다른 인물들이었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다. 처음에 ‘펀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앞서 영화 ‘강남1970’에서 깊고 진한 걸 했는데 또 그런걸 하면 올바른 선택일까란 생각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라며 추천하더라. 사실 방송사 측에서는 내가 캐스팅 물망에 올랐을 땐 ‘글쎄’란 반응도 있었던 걸로 안다. 감독님이 적극적으로 밀어부치셨고, 굉장히 흡족해하혔다.Q. 영화 속 호흡이 ‘펀치’에도 그대로 묻어난 건가?
김래원: 영화의 깊고 진한 느낌을 드라마로 끌고 올 수 있었다.그런 면에서도 좀더 진정성있게 표현이 된 것 같고. 준비기간까지 영화를 1년 정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의 농도가 짙어졌다. 보여지는 연기가 아니라 많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내면 연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예를 들어 초반엔 감독님이 웃거나 우는 연기에서 “좀더 연기를 하라”고 주문하셨다. 나중엔 화면을 보고 아시더라. 내가 강하게 연기하지 않아도 내면으로 다 표현해내려고 하고 있었다는 걸.
Q. 겉으로 확실히 보여지지 않아도 시청자들이 정환의 작은 표정, 눈빛 하나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김래원: 좀더 사실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대본에 ‘미소 짓는 정환’이라고 돼 있으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환한 미소가 아니라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쪽으로 연기해봤다. 그래서인지 감독님이 초반엔 ‘대학원 연기하지 말고 중학생이 이해할만한 연기를 하라’고 하셨는데 감독님의 주문과 내 표현이 적절하게 잘 섞여 완급 조절이 된 것 같다.
Q. 감정을 적절히 억제하면서 표현한 지점이 오히려 진실된 표현 방법이 됐나보다.
김래원: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마음으로 소리 질렀다’는 느낌? 개인적으로 느끼는 건 내가 터트리기보다는 눌러서 연기했기 때문에 좀더 깊고 진정성 있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게 더 좋았을지는 받아들이는 사람 취향일 것 같다.
Q. 지난 1년간 영화와 드라마를 거치며 연기에 대한 생각이 변한 게 느껴진다.
김래원: ‘강남 1970’의 유하 감독님과 영화를 하면서 조금의 변화가 있는데 뚜렷하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 전부터 내 안의 변화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나이일 거다. 연기에 대해 말하자면 이 전에는 ‘멋있게 해야 돼’ ‘잘 해야 돼’란 생각이 컸다면, 이제는 ‘사람 사는 얘기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세상 사는 한 사람을 연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다큐에서는 굳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뒷모습만 나와도 그것이 사실이기에 충분한 슬픔이 드러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카메라를 쳐다보고 ‘나 연기해요’라고 얘기하지 않더라도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래원
Q. 변화가 필요한 계기가 있었나.김래원: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다. 20대 때는 청춘스타였다면 지금은 방향이 바뀌었다. 멋진 역할보다는 정말 진솔하게 사람 얘기를 담을 수 있는, 인생을 담을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지금 내 단계가 그런 것 같다.
Q. 구체적으로 20대 때와 배우로서 어떤 지점이 가장 달라진걸까.
김래원: 20대의 김래원은 ‘멋진 역할을 맡아서 인기를 얻어야 돼’라는 목표가 컸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래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인기에 대한 영향이 나를 지배했었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고 새로운 후배들이 올라오면서 내 방향이 조금 다른 쪽으로 바뀐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펀치’가 잘 돼서 흔들리기엔 나도 작품을 이미 많이 했으니까.(웃음)
Q. 최근에 영화와 드라마를 하면서 체중도 15kg 이상 감량했다.
김래원: 영화하면서 15kg 정도 뺐는데 드라마 하면서 4~5kg 정도 더 빠졌다. 석 달만에 12kg를 감량하고 추가적으로 더 감량하는 식이었는데 물론 힘들었다.(웃음) 그런데 어렵고, 노력하는 고통에 대해 무뎌진 것 같다. 일정이 무척 빡빡했음에도 예전에 드라마할 때보다 편안했다. 잠까지 못 자니까 오히려 퀭해보여 역할과 잘 어울리니 오히려 몰입에 더 잘 되더라. 나중엔 너무 보기 안 좋아서 억지로 먹기도 했다.
Q. 배우 김래원이 이번 작품으로 터닝포인트를 맞았다는 평가가 많이 들린다.
김래원: 나는 하던 대로 할 거고, 아마 앞으로도 똑같을 거다. 주변에서 표현해주는 건 고맙다. 20대 때는 이런 반응에 무너졌던 것 같다 .’네가 최고야’하는 반응에 연기에 허세가 들어가고 처음 가졌던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이젠 그저 내 길을 간다는 마음이랄까.
Q. 야망은 없다고 했는데 그럼 김래원의 소망은 뭘까.
김래원: 연기에 대한 욕심은 어릴 때부터 늘 많았다. 점점 무뎌지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 생각했을 때 열정은 변하지 않는 것 같더라. 아직까지도 마지막회 연기에 아쉬운 점이 생각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을 향한 비릿한 웃음을 한번 날려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 때 3일간 세수도 못하고 촬영했는데 아마 2시간만 잤으면 그 웃음을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난다. 이런 얘길 회사 대표님께 계속 했더니 ‘그만 좀 하라’고 하시더라(웃음) 여전히 연기에 많이 집착하는 것 같다.
Q. ‘연기 집착남’ 김래원의 길었던 1년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모두 잘 마무리됐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건 뭔지 궁금하다.
김래원: 시나리오를 천천히 보고 있는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멜로도 좋고, 남자들끼리 호흡을 맞추는 연기도 멋질 것 같다.
텐아시아=장서윤 ciel@
사진. 구혜정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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