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백수 생활 중인 남편과 딸을 먹여 살리는 생활력 강한 슈퍼맘 지수, 대형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싱글맘 혜미 그리고 남편의 과거 여자와 우정을 나누는 지은까지. 최근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통해 대중과 만난 문정희의 모습이다. 모두 ‘엄마’라는 공통점 속에 각기 다른 옷을 입혔다. 이 때문에 연이어 ‘엄마’를 연기했음에도 다른 느낌을 전했다. 문정희를 직접 만나 ‘엄마’를 물었다.

Q.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카트’ 그리고 ‘마마’ 등 최근 작품에서 모두 ‘엄마’를 연기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숨바꼭질’, ‘연가시’ 등에서도 엄마다. 그런데 뭔가 버라이어티하다.
문정희 :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엄마라는 게 커 보이는 것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엄마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숨바꼭질’은 헬멧을 쓴다는 캐릭터의 특징이 강했고, ‘연가시’는 감염자라는 특성이 있었고. ‘마마’는 여자 자체의 정체성(아이텐티티)을 찾아가는 성장기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는 미용사란 직업적인 것도 있지만, 전작이 ‘숨바꼭질’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따뜻함을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를 하고 싶었다. 엄마를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엄마라는 게 덧입혀져서 잘 보였다.

Q. 실제 아이가 없는데 계속 엄마로 나온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조금 수월하겠다.(웃음)
문정희 :
시기가 오지 않았나 싶다. 미뤘다기보다 몸을 많이 쓰는 걸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생기면 막진 않을 거다. 분명 역할이긴 하지만, 아이와 함께한 경험들이 도움되지 않을까. 아역배우들하고 있어보고, 조카가 두 돌 넘었는데 같이 있어 보니까 육아가 힘든 건 분명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익숙할 순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모성을 잘 표현하는 건 모르겠다. 윤아 언니, 정아 언니 보고 느꼈던 건 아이만 생각하면 울컥하더라. 그건 뭔지 모르겠다. 일하는 게 잘못이고, 죄책감이 왜 들어야 하는지. 아이만 생각해도 울컥한 게 있나 보다. (아이를 낳으면) 그런 게 더 생기지 않을까.Q.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로 만났으니까 먼저 이 작품의 좋았던 부분을 말해 달라.
문정희 :
요즘 예능도 아빠 중심이고, ‘국제시장’ ‘나의 독재자’ 등 영화도 아빠 중심의 영화가 많다. 여자들의 니즈가 아빠의 존재로 가는 것 같다. 아빠가 하는 육아, 살림 등이 좋아 보인다고 하지 않나. 부성하고는 좀 다른데, 아빠란 존재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영화의 장점이라면 따뜻함 안에 재미 코드가 있다는 점이다. 기대를 안 하고 보셨는데 재밌다는 분들이 많았다. 재밌는 요소가 많이 숨어 있는 게 장점인 것 같다.


Q. 그럼 이번 영화에서 엄마는 어떤 엄마인가.
문정희 :
엄마라는 게 참 강력한 것 같다. 일부러 엄마를 하지 않아도, 엄마 위치에 있으면 남편, 아이를 건사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게 이기적으로 표출돼 ‘숨바꼭질’처럼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모성이기도 하고. 이번엔 그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내고 싶었다. 남편을 구박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낡은 신발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그래서 예쁜 엄마라고 생각했다.

Q. 예상되는 지점이지만, 어쨌든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을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나.
문정희 :
아빠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불쌍한 것 같다. 아빠의 여러 역할이 있는데 이 아빠는 딸의 숙제를 봐준다거나 엄마 대신 집안 살림을 한다. 여자를 그렇게 그리면 이상하게 보지 않는데, 우리 아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질감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아빠를 남자로 생각해보게 만든 영화다.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는 건 맞는데, 내 입장에선 아빠를 남자로 생각해본 영화가 됐다.Q. 극 중 지수는 10년째 백수인 태만(김상경)을 더 키우는 셈이다. 쉽게 생각해서 10년째 백수면 헤어질 법도 한데.
문정희 :
운명공동체가 되면 다르다. 결혼 안 했을 땐 몰랐고, 그런 남자였다면 결혼을 안 했을 거다. 그런데 막상 결혼했는데 남편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면 그건 곧 내 자존심인 거다. 남편이 더 일을 못할까, 외부에 나가서 기를 펴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희한하게도. 결혼생활에 들어가면 ‘그는 나’가 된다. 나 때문에 피해받는 게 싫다. ‘누구의 남편’ 이런 걸로 인해서 남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게 늘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

Q. 그런데 흥미로운 게 결혼한 거의 모든 여자는 ‘큰’ 아들 하나 더 키운다는 생각을 하나 보다.
문정희 :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싫다.(웃음) 앞서 말했지만 ‘내가 그’고, ‘그는 나’다. 어쩔 수 없이 그렇다. 손길을 안 줄 수가 없고, 그런 존재가 귀엽기도 하다.

Q. 김상경은 문정희에 대해 ‘늘 궁금한 배우’라고 말했다. 그럼 문정희는 김상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리고 직접 겪은 김상경은 어떤 배우였나.
문정희 :
진중한 배우일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정말 재밌고 유쾌 통쾌하다.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유도할 수 있는 배우다. 내 파트너인 것이 감사하다. 다 떠나서 작품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어떤 역할이든, 어떤 식의 파트너든 합에 대해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너지를 위해서 뭐라도 할 분이다. 그런 면에서 진짜 배우 복이 있었구나 싶다. 최근 작품에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입이 마르도록 말해도 끝이 없고, 남자 배우 중 손꼽을 만하다.
Q. 그런데 김상경도, 문정희도 실제 10년 차 부부가 아직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10년 차 부부를 표현해야 했다.
문정희 :
원작이 10년 차 부부 이야기긴 하다. 서로의 관계적인 면에서 잘 보이는 신들이 많이 없는데, 그중 하나가 방귀 장면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의리를 보여주는 거다. 태만을 참아주는 지수, 무거운 짐을 지게 하지 않으려는 지수의 의리 등 부부로서 의리를 보여주는 게 10년 차 부부의 단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과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방귀 트는 것도 즐거움으로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연애할 때 키스와 10년 차 부부의 키스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진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관계 회복의 상징으로서 잘 살리자 했다. 성적인 것도 오락이 되기도 하고. 그건 건강한 거다. 에로틱은 잠시 잠깐이다. 가족으로 확산했을 때 건강해지고, 밝아진다. 의리를 부릴 수 있는 평생 친구가 생긴다는 건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거다.

Q. 최근 개봉한 두 작품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와 ‘카트’를 보면 뭔가 묘하게 엮인다. ‘카트’에서는 하루아침에 해고 위기에 놓이고,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에서도 하루아침에 미용실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지 않나.
문정희 :
사회의 단면들이니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고. 전세대란이기도 하고. 현실로 와 닿는다. ‘카트’도,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도 그러네. 지금 내 현실도 집이다. 전세가 너무 올라서.(웃음)

Q. ‘카트’에서 부당해고에 맞서 파업할 때 도화선은 문정희가 맡은 혜미다. 실제로도 그런 성격인가. 미디어데이 때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문정희 :
약간 그런 성격이다. 정리가 안 되거나, 누가 어레인지를 똑바로 안 하거나 그러면 나서서 하는 편이다. 배우 일을 하지만, 내 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주변 여건도 중요하다. 경력이 쌓이다 보니 마케팅, 홍보 전략을 건의하기도 한다. 삐딱하면 닭 잡듯 하고.(웃음) 아무래도 옳은 건 아닐 수 있겠지만, 진행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빨라 나가서 하는 스타일이다.Q. 그렇게 앞장서다 보면 원치 않게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문정희 :
현실에 부딪혔을 때 결국 복직할 수밖에 없는, 그게 현실이다. 그런 모순을 보여주는 것 같다. 뭔가 앞장서는 사람은 먼저 가 있기 때문에 피해가 있다. 그걸 두려워하면 못 했을 거다. 모난 돌이 풍파에 노출됨으로써 해서 얻어진 경험으로, 어떤 노하우가 생기기도 한다. 해보면서 얻는 게 더 크다고 생각한다. 주책없이 그러면 왕따 당하는 거고. 적절한 면에서 치고 빠지는 건 필요하다.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다. 어쨌든 추진력은 강한 편이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융통성이 더해지는 것 같다.


Q. ‘카트’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마마’는 전혀 다른 내용과 소재다. 그럼에도 여자들의 우정과 의리 등의 정서를 그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 가운데 문정희가 있는 거고.
문정희 :
공교롭게 그렇게 됐다. 사람들도 그렇게 볼까 했는데. ‘여여케미’에 많은 분이 호응을 해주시더라. 요즘 단어를 잘 모르는데 ‘마마’ 팬들이 ‘문정희 입덕’ ‘덕통사고’ 등의 말을 해주더라.(웃음) 남자들 의리만 다뤄져서 그렇지 여자들도 의리가 있다. 결혼한 여자들의 그런 것이 그려지는 게 신기했나 보더라. 목숨을 내놓고, 내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카트’에서는 운명공동체가 되는 거다. 부당해고 현실을 뒤로하고 언니로 받아들이는, 그런 여자들끼리의 공감대가 형성된다. 남자의 상황으로 이입하면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Q.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김상경, ‘카트’ 염정아, ‘마마’ 송윤아 등 극 중 문정희와 호흡을 맞춘 이들의 칭찬이 장난 아니더라.
문정희 :
세 분 모두 인격이 좋은 분이다. 개인적으로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좋으니까 나를 좋게 보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선배들이다 보니 내리사랑이 있다. 상경 오빠는 합이 잘 맞았다. 부부 호흡이지만, 사실 십년지기가 쉽지 않다. 성향 자체가 편하지 않으면 못 견뎌 한다. 정아 언니는 너무 털털하고 긍정적인 분이다. 언니와 함께하면서 느낀 건 배우로서 삶 이외의 삶도 이야기할 게 많았다. 주부로서, 여자로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런 노하우도 매우 좋았다. 윤아 언니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6년의 공백이 내공으로 쌓였다고 생각한다. 현미밥 지으면서 큰아들(설경구) 먹이시고(웃음), 아기 이유식 해주고. 그렇게 살림을 하게 되면 주변을 정리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게 태도로 나오는 것 같다. TV는 순발력이 필요한데 시너지를 냈던 것 같다. 언니 오빠들의 칭찬이지만, 그게 사랑이다. 이렇게 작품 하면서 언니들, 오빠하고 그런 연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좋은 추억일까 싶다. 그분들 이야기하면 3박 4일 걸린다.Q. 여배우와 여자,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나 힘든 점은 없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문정희 :
이제는 몸에 익숙하다. 아내라는 게 어떤 역할을 해야 아내인 것은 아니다. 가령 아내 역할을 해야 해서 밥을 먹는 건 아니다. 힘들 때는 밖에 나가서 밥도 먹고 하지만, 바깥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해서 집에서 먹는 편이다. 아내로서 내 남편을 잘 건사하고, 집안일 하고. 그런 걸 잘하면 연기할 때 도움된다. 그래서 배우한테 삶은 중요하다. 삶의 문정희는 배우보다 귀한 것 같다. 배우지만, 죽고 나서 30년이면 나란 존재를 다 잊을 거다. 이 시간에 성실하지 못한 거에 반성하면 했지,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내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내 인지도나 배우로서 경력 등이 다른 것을 새롭게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배우로서도, 아내로서도 그냥 문정희에 빠져 있는 게 좋다.

Q. ‘카트’와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각각 응원하는 지점이 다를 것 같다.
문정희 :
맞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이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한 거에 대해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무한 행복하기도 하다. 다른 장르, 다른 색깔을 보여드릴 수 있다. ‘카트’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영화로 쉽게 풀고 있다는 면에서 응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극적이지 않은 게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는 연말에 가족들이 웃으면서 생각 없이 왔다가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지점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다. 하나는 가볍고 편하고 따뜻하고, 하나는 우리 이웃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응원한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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