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만에 보는 풍경이었을까.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데도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가만히, 묵묵히, 숨죽여,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 여운을 남기는 당신의 마지막 표정이 사람들을 그렇게 오래도록 붙잡아두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송우석(송강호), 변호사가 아닌 변호인으로 불린 송우석이다.

#당신의 세계는 안녕했다. 그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는.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당신은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 판사자리에까지 올랐다. 사시에 패스하는 날, 당신은 장밋빛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당신에겐 명문대 명패가 없었다. 든든한 집안이 없었다. 동아줄이 되어 줄, 잘 나가는 처가도 없었다. 학연 지연 혈연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엮인 현실은 결국 당신의 발목을 낚아챘다. 실력을 대학 이름으로 재단하는 학벌사회에서 당신이 느꼈을 콤플렉스를 온전히 이해는 못한다. 그저 “다들 서울대, 연대, 고대… 나 같은 상고 출신은 껴주지도 않아” 라는 말과 TV 뉴스에 등장하는 학생시위 장면을 보고 “서울대생이나 돼갖고 지랄한다. 데모 몇 번 한다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아?” 일갈하는 모습에서 당신 마음 깊숙한 곳에 거주하고 있는 자기연민과 자격지심과 황폐함을 엿볼 따름이었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선택한 것은 돈으로 출세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말마따나 “돈 버는 거야 뭐, 귀천이 따로 없는” 거니까. 가난을 먹고 살아 온 자의 열패감을 다독이기에 돈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판사복을 벗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당신은 나이트 삐끼마냥, 명함 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순간의 쪽팔림? 변호사로서의 위신? 권력의 한복판에서 수모를 겪었던 당신에게 이 정도 시선쯤이야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더 큰 것은 얻기 위해 치르는 작은 수업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신의 사업수완은 기대 이상으로 탁월했다. 부동산 등기대행부터 세금자문까지. 통장에 돈이 쌓이는 사이, ‘쥐새끼’들로 들끓었던 누추한 집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고층 아파트로 바뀌고, 취미로 요트를 몰 여유도 생겼다. 자랑스러운 사위, 믿음직한 남편, 존경하는 아버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당신의 세계는 안녕했다. 그 사건을 만나기 전까지는.#그곳에서 당신이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1981년 가을 어느 날, 한 여인이 당신을 찾아온다. 당신 앞에서 “실종된 아들 진우(임시완)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싹싹 비는 이 여인, 누구인가. 막노동을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시절의 당신이,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친 국밥집의 주인 순애(김영애)다. 빚을 갚겠다고 찾아온 당신을 비난 대신 따뜻한 말로 품어줬던 어머니 같은 분이다. 당신이 법조인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은인이다. 그런 순애의 청을 외면하기엔 당신은 태생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신은 순애와 함께 진우가 잡혀있는 구치소로 향한다.

그날, 그곳에서 당신이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면회를 가로막는 이상한 움직임,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진우의 처참한 몰골, 고문과 구타와 강제 자백이 의심케 하는 정황들. 그때였을까. 앞만 보며 미치게 달려왔던 당신이 멈춰야 할 때임을 느낀 것은. 면회에서 돌아온 당신은 정부가 불온하다고 지정해 놓은 책들을 밤새워 읽어나갔다. 그날 당신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 날이 밝았을 때, 세상을 응시하던 당신의 눈빛을 기억한다.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질 못했던 당신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딴 사람이 돼 있었다.
#당신은 고독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살다보면 운명을 바꿀만한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사실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다만, 대대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거나, 봐도 못 본 척 도망가기에 ‘극적인 삶’은 TV에서나 나오는 남의 일로 치부될 뿐이다. 당신에게도 도망갈 기회와 핑곗거리는 충분히 있었다. 당신의 아이들을 위협하는 전화가 왔을 때. 굴지의 건설회사에서 달콤한 제안을 해 왔을 때. 하지만 당신은 굽히지 않았다.

진우의 변호를 맡겠다는 당신에게 사무실 사무장 동호(오달수)가 말했다. “오늘 부로 송변 니는! 니 편한 인생, 니 발로 잡아 찬기다!” 동호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당신은 이미 명징하게 예감했을 것이다. 지금 이 길에 들어서면 당신의 인생은 통째로 뒤집힐 거라는 걸. 어렵게 쌓아올린 안위와 작별하게 될 거라는 걸. 외부로부터 공격받고, 진심을 의심받고, 언론의 먹잇감이 되고, 그 속에서 고독할거라는 걸. 그래서 언젠가 당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위험천만한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그렇지만 당신은 안온한 삶이 손 흔드는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 그리고 가시밭길 드리운, 당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변호인’은 이 시대를 버텨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 당신은 변호인이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판사에게 건네진 명단에는 해당 재판장에 착석해 있는 변호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판사의 호명에 “네!”라고 이어지는(질) 99개의 응답들. 영화는 “이날 법정에는 부산 지역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출석했다”고 했지만, 틀렸다. 그날의 법정을 바라본 수는 5일(일) 기준으로 786만 명이고, 그 중에는 당신을 변호하고 싶어 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이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나의 이름도 호명되길 바라마지 않는 마음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 하수상한 오늘을 버텨내고 있는 또 다른 변호인들인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감사하다. 연대의 힘을 다시금 일깨워 줘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과 싸워줘서. 어딘가에 있을 당신, 그곳에서 밥은 잘 챙겨 드시고 계십니까?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