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경기도 고양시 끝에 자리한 산골의 한 요양원. OCN (이하 < TEN >)의 마지막 회 촬영 현장인 이곳은 오후 3시란 시각이 무색할 정도로 그늘 속 적막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요.” 택시 기사가 남긴 말이 귓가에 울릴 때쯤, 두터운 방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차가운 공기 속 백도식 역의 김상호와 스태프들의 바쁜 준비 후 촬영이 시작됐지만 얼어붙은 현장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화면에 스태프 그림자가 자꾸 보여요. 자, 택시 들어오는 것부터 다시 갑시다.” 여지훈(주상욱)의 과거를 ?다 요양원으로 들어오는 백도식을 멀리서 찍는 짧은 신에서도 쉽게 OK 사인이 나지 않는 상황. 뚫어져라 모니터를 바라보는 이승영 감독의 눈이 단서를 추적하는 TEN 팀원들 못지않게 날카로워질수록, 멀리서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 TEN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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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현장의 서늘한 공기도 은근하게 발휘되는 파트너십 안에서 누그러든다. 김상호는 백도식이 심각한 여지훈과 남예리(조안), 허둥대는 박민호(최우식) 사이에서 가벼운 농담으로 긴장된 수사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처럼 눈웃음 한 방으로 스태프들을 웃게 한다. 특별한 방한도구 없이도 펄펄 날던 그가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 비슷한 연배의 스태프들 사이에선 “여러 번 말해줘야 알아듣는다니까”라는 농담이 나온다. 현장의 온도를 높이는 짓궂은 장난과 격의 없이 주고받는 대화. 이들 사이에는 알콩달콩 서로를 챙겨주는 요란함은 없었지만 전화 통화 신에서 상대방 없이 연기해야 하는 김상호를 위해 즉석에서 스태프가 자연스럽게 상대역을 해주고 “다른 사람은 다 바쁜데 평소에 찍을 신이 많이 없어 여유로운” 김상호를 가리켜 ‘할리우드 스타’라고 놀려도 ‘허허’ 웃을 만큼 함께 고생한 이들에게서 나올법한 동료애가 있었다. 냉철하기만 했던 여지훈이 김상호에게 조용히 내뱉은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이 친절한 인사보다 마음을 건드렸던 것처럼, 스태프와 배우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진행된 < TEN >의 촬영은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더욱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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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 “< TEN >은 나에게 더 큰 행복과 좋은 기운을 줬다”
< TEN >은 서로 다른 수사 스타일의 네 사람이 각자의 조각을 맞추며 사건을 해결하는 서사 구조를 보여주며 주목을 받았다. 냉철한 여지훈과 엉뚱한 듯 날카로운 남예리, 어리지만 열정이 넘치는 박민호, 온 몸으로 현장에 뛰어드는 백도식 등 네 명이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은 극 중 < TEN >이란 조직의 특수성만큼이나 한 가지로 정형화할 수 없는 개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긴장된 분위기를 풀며 천재적인 감각을 믿고 수사에 뛰어드는 독사 백도식이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 뒤에 날카로운 추리력과 집념을 가진 숨은 고수. 때로는 친근한 아빠처럼, 때로는 우직한 친구처럼 세 명의 배우 속에 녹아든 김상호가 궁금한 건 그래서다. “< TEN >하면 네 명이 골고루 생각나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배우 김상호. 유머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백도식에 빠져있던 그와의 대화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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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N > 촬영이 거의 끝나간다. 기분이 어떤가.
김상호: 좋다. 무슨 일이든 끝이 나는 거고. 특히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반응을 피부로 느끼면서 가는 거라, 그런 부분이 좋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캐릭터 백도식과 ‘뿡뿡이’를 비교하는 패러디도 나왔다.
김상호: 안 그래도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무슨 말인가 해서 굉장히 놀랐다. 검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아침 뉴스에서도 나왔다고 하더라. 아이들의 영웅이지 않나! 하하하. 어쨌든 배우가 좋은 쪽으로 관심을 받는 거니까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얼굴 각도부터 마음가짐까지 < TEN >을 촬영하며 여러 가지를 신경 쓴다고 들었는데.
김상호: 얼굴 각도야 어떻게 하든 똑같다. ‘뿡뿡이’가 아무리 해봐야 동그랗지 않나. (웃음) 다만 분명한 마음가짐은 있었다. < TEN >이 드라마이기 때문에 1회가 재밌다고 소문이 나면 분명 찾아서 보는 사람이 생길 텐데 그 사람들이 ‘2, 3회는 별로네. 에이, 저거 다 거짓말이야.’ 이런 생각만 안 하도록 하자는 다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되어 있다. ‘최소한의 수준만 되면 칭찬해 주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데 그 수준에서 조금만 더 높이 채워주면 극찬이 나오는 거다. 그래서 욕이 더 잔인하다. 그 정도도 안 된다는 거니까. 어쨌든 그런 한국 관객들이 MBC 이후로 ‘수사물’ 하면 미국 드라마만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도전장을 냈으니 그 용기만큼 좋은 결과도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백도식은 어떤 작품에 있든 매력있을 놈”
< TEN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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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출연했던 영화에서도 형사 캐릭터를 많이 했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그 역할들과 백도식은 차이가 있었나.
김상호: 배역의 좋고 나쁜 걸 떠나서 인물의 두께를 봤을 때 백도식은 전 캐릭터보다 두껍다. 그래서 좋다. 두껍다는 것은 감정의 파장이 크다는 거다. 감정 기복도 있고 흐름이 있다. 그럼 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예를 들면 < TEN >에서 가장 좋은 대사라고 평가받고 있는 ‘다 마음속에 있는 거죠?’ 딱 이거다. (웃음) 백도식 자체가 주는 인간적인 냄새가 한 축이라면 사건의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다른 축에 있다. 그렇게 다양한 게 재밌었다. 백도식은 그런 두께가 있기 때문에 어느 작품에 있든 그 자체로 매력있을 놈이다.

3회 ‘미모사’ 편에서 백도식이 중심이 됐다. 겉으로는 재밌고 가벼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숨은 고수인 캐릭터의 특징이 잘 드러난 것 같다.
김상호: 맞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말 이면에 숨어있는 날카로움을 표현하는 게 재밌었고 일단 내 중심이라 좋았다. (웃음) 그리고 그 편에서 백도식이 흘린 눈물은 어린 아이의 맑은 눈물이 아니라 삶의 진액 같은 거다. 나이 40 넘은 한 사람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동성 간의 끈끈한 정에서 느끼는. 그런 걸 표현하는 것도 재밌었다.

기존의 푸근하고 친근한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그 점에서 부담감을 느끼진 않나.
김상호: 그런 건 없다. 사람들이 날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갖는 이미지에 부담을 느낀다는 건 내 존재를 부정한다는 거다.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하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카멜레온도 색깔만 달라지지 형체는 그대로 있지 않나. 같은 형체 안에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기본 바탕이 필요하다. 내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목표가 생기고 목표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나면 도전을 하는 거다. 예전 인터뷰 때 ‘김상호 씨는 어떤 역할을 해도 그 사람 같다. 그 자리에 존재했던 사람 같아 좋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건 굉장한 극찬이다. 형사를 연기하든 범죄자나 이웃집 아저씨를 연기하든 옛날부터 거기 있던 사람 같다는 게 내 장점이다. 단점은 없다. (웃음) 이게 단점인가? 하하.

극 중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촬영하는 모습을 보니 어떤 게 연기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럽더라. 캐릭터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연기하는 편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그림만 그리고 촬영에 임하는 스타일인가.
김상호: 난 계산 못 한다. 그냥 대충 대충 한다. (웃음) 계산을 하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부럽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수준이 높아지니까. 난 그게 굉장히 낮지만 한 번 작품이 와 닿으면 정신 못 차린다. 그래서 늘 기복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산을 하고 싶진 않다. 그저 한 장면에서 내가 필요한가, 아닌가만 이해되면 된다. 친한 친구 상갓집에 가면 할 일이 있지 않나. 그것처럼 내가 있어야 하는 장면이라면 왜 필요한지를 설명 듣고 이해되면 그냥 하는 거다. 그런 거에 무슨 계산이 필요할까. (웃음)

“작품 안에서 해매는 과정이 행복하다”
아까 목표에 맞는 작품을 만나면 바로 도전한다고 했는데 < TEN >은 어땠나.
김상호: 아우, 100% 부합했다. (웃음) 이 작품을 하면서 수사물을 매력을 느낀 건 분명하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건과 사건을 끼워 맞추고 만들어가는 게 굉장히 재밌었다. 쇳덩어리만 부딪히면 마모되니까 중간 중간 기름도 칠하고.

< TEN >은 각각 다른 수사 스타일을 가진 네 명이 퀴즈를 풀 듯 조각을 맞춘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김상호: 그렇다. 네 명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켜야 하고 < TEN >하면 네 명 모두가 골고루 떠올라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부족한 점을 남이 도와주고 반대도 가능해서 그런 걸 계산해야 했다. 그런 팀워크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처음에 혼자 그렸던 백도식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백도식이 ‘야, 이 XX야’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는데 그 분노를 남예리가 말하는 게 더 맞다면 백도식은 그 표현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조금 아쉽지만 내가 고집을 부리면 다른 캐릭터가 약해지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됐다. 축구할 때 체력 안배를 잘 하고 90분 내내 뛸 수 있어야 책임감 있고 좋은 선수인 것처럼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 TEN >을 촬영 하면서 스스로 달라진 것이 있을까.
김상호: 아직 작품 속에서 날 보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한 감정은 잘 모르겠다. 다른 작품을 하면 지금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 같다. 지금은 한창 작품 안에서 해매고 있다. (웃음) 분명한 건 이 과정이 굉장히 행복하다는 거다. 특히 < TEN >은 나에게 더 큰 행복과 좋은 기운을 주는 거 같다.

백도식과 < TEN >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작품 끝나면 아쉽겠다.
김상호: 난 그냥 날 놔둔다. 오늘까지 촬영하고 내일 촬영 안 한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날 두고 지켜본다. 사실 연기했던 캐릭터는 뇌에 저장된 게 아니고 여기(가슴)에 남는 거라 떼어낼 수 없는 거다. 항상 그립거나 아프게 남는다. 만약 어떤 작품에서 너무 아쉽게 연기했다면 평생 쪽팔리고 부끄럽게 따라 다닌다. 잘 되면 또 끝까지 가는 거고. 이 직업은 죽을 때까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욕은 받아들이면서 너무 상처받아서 죽지 않을 정도만큼의 뻔뻔함이 필요하다. 그게 스스로의 변화를 막으면 안 되겠지만 그 정도의 뻔뻔함을 갖추고 유연하게 연기하고 싶다.

글. 한여울 기자 six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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