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 1986년 두산 베어스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87년 두산 베어스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89년 태평양 돌핀즈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92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2002년 LG 트윈스 감독 – 한국시리즈 진출. 그러나 패.
2007년 SK 와이번스 감독 – 한국 시리즈 우승. 이후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및 3회 우승.
그리고 “지금 SK는 50%도 안 갔다.”
–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2010년 한국시리즈 이후 한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
김성근 감독
가네바야시 세이콘 : 김성근의 일본 이름. 부모가 일제 강점기에 생활고로 도일, 교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가족 대부분이 일을 했고, 김성근도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일찍부터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았고, 어머니는 그가 한국에 영구귀국하자 그 날 바로 김성근의 짐을 모두 치울 만큼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이런 가정환경은 그가 자신의 야구를 관철시키고, 언제나 바로 그 순간에 충실한 야구를 하는 바탕이 됐을 듯. 이런 성격 탓인지 그는 재일 교포임에도 연극과 축제 사회를 보는 등 활발한 학교 활동으로 인기를 모았다. 특히 중3 때부터 한 야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했고, 그는 “야구는 사는 목적이고 이유”라고 할 만큼 야구에 푹 빠진다.

이승만 : 김성근이 고교시절 재일학생야구단 자격으로 방한했을 당시 만난 전 대통령. 그는 느린 주력을 빠르게 하려고 자전거로 우유 배달을 하는 동안 서서 페달을 밟는 등 스스로 훈련 계획을 짜는 노력으로 학교 에이스가 된다. 그러나 학교는 매우 약체였고, 진로는 불투명했다. 이 때 재일 동포 야구협회의 추천으로 재일학생야구단에 참가, 빼어난 성적을 올리며 주목받는다. 결국 김성근은 한국 선수로 뛰는 것을 선택한다.

하일성 : 야구 해설위원. 김성근 감독은 한 때 야구 해설위원으로 일했는데, 해설 도중 쇼부(승부)같은 일본어를 자주 써 하차했다. 그 후임이 하일성. 또한 김성근은 충암고 감독 시절 선수의 배팅 연습을 지도하다 앞니 세 개가 부러져 의치로 교체, 발음이 부정확하다. 언어 문제는 김성근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빼어난 실력으로 동료들과 동아대에 스카웃 됐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장래를 확신하기 어려워 일본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경기 중에는 ‘쪽발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의 한국말은 술로 외로움을 달래며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재일 교포로서 실력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도 없다”는 걸 느꼈고,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다”는 절박함이 거의 전 경기에 나서 공을 던지도록 했다. 그는 결국 혹사로 스물다섯에 투수를 관뒀고, 몇 해 후 은퇴했다.

조범현 : 선수시절 김성근과 충암고, OB 베어스 (현재 두산 베어스) 등에서 함께한 기아 타이거즈 감독. 김성근은 은퇴 후 충암고 감독으로 재직, 약체인 학교의 전력보강을 위해 당시 해체한 대건고에서 조범현을 비롯한 18명의 선수를 스카웃했다. 따라서 원래 충암고 선수들과 대건고 출신들의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사람 새끼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선수들과 산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며 팀워크를 다졌고, 선수들이 일으킨 각종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모두 지며 신뢰를 얻는다. 특히 고교생이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려면 무조건 전국대회 4강에 올라가야했던 당시, 약한 전력으로 봉황대기를 우승시켜 선수들의 지지를 얻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야구를 선수들이 따르도록 하고, 대신 확실하게 책임지고 보상하는 ‘오야’(리더, 대장) 김성근 야구의 시작. 조범현은 감독이 된 뒤 “오늘의 조범현이 있기까지 김성근 감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지훤 : 김성근의 OB 베어스 감독 시절 선수. 1987년 OB 베어스가 3-2로 앞서던 해태 타이거즈(현재 기아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아웃에서 실책성 플레이로 동점의 빌미를 줬다. 결국 OB 베어스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김성근은 “시합 전 선수들에게 너무 승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지나치게 긴장을 준 내 실수”고 말했다. 또한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5선 3승제에서 미리 2승을 얻은 뒤 심적으로 여유를 갖다 시리즈를 내줬다. 그는 한국야구 최초의 전담 마무리 투수를 기용했고, 선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2군을 운영하는 등 선진 야구를 도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아직 코치가 팀당 서너 명 밖에 되지 않을 만큼 기반이 열악했고, 선수들은 구단이 보너스를 안 준다는 이유로 선수단을 무단이탈하기도 했다. 프로야구는 아직 근대였고, ‘야신’은 인간이었다.

임호균 : 김성근 감독 시절 태평양 돌핀스 선수. OB 베어스에서 구단과 선수단이 보너스 문제 등으로 갈등하는 것을 본 그는 태평양 돌핀스에 선수단 운영의 전권을 요구하며 감독이 된다. 또한 “솔직히 말도 안 되는 훈련이었지만” 한겨울에 오대산 찬물 입수 같은 극기 훈련으로 흩어진 팀워크를 다졌고, 정명원, 박정현, 최창호 등 신인 투수를 발굴해 스타로 만들었다. 감독이 전권을 갖는 대신 모든 책임을 지고, 선수단에는 혹독한 훈련 대신 그만큼의 성과를 보장하는 김성근 특유의 리더십을 관철시킨 셈. 그러나 구단 측 인사가 갑자기 선수단에 와서 일장훈시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풍토에서 구단주도 선수단에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 김성근은 구단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결국 구단은 김성근이 “베테랑의 경험은 팀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용하던 노장투수 임호균을 두고 “5승을 올리지 못하면 감독직을 그만 둔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김성근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팀을 떠났고, 이때부터 그는 구단과 갈등이 많은 감독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김현욱 : 김성근이 감독을 했던 전 쌍방울 레이더스 투수. 과거 허리 부상이 있었음에도 김성근의 권유로 야구를 계속해 다승-승률-방어율 3관왕을 차지했다. 김성근은 태평양 돌핀스나 쌍방울 레이더스처럼 대게 전력이 안 좋은 팀을 맡았고, “어떤 선수든지 장점이 있고 그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게 지도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그는 늘 유명하지 않은 선수를 발굴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었고, 한국에서는 ‘쪽발이’였던 그에게 야구는 “자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그는 자신의 야구관을 선수들에게 전파했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부터는 정신교육을 통해 “야구가 힘들 때는 가족과 아내, 아이들을 생각해 봐라. 그 사람들이 누굴 믿고 있느냐”는 등의 말로 선수들에게 야구를 할 이유를 부여했고, 그 절실함이 야구에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 자신은 온갖 상황을 극복하며 “방송의 느린 화면처럼 상대방의 일거수 일투족이 눈에 들어”올 만큼 야구 보는 눈이 깊어졌다. 그에게 야구는 단지 운동이 아니라 투쟁하고 연구하여 완성하는 인생 그 자체다.

김응룡 : 2002년 코리안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김성근의 LG트윈스와 시합한 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 LG트윈스에 4승 2패로 이겼으나 김성근에 대해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았다”며 극찬했다. 당시 LG트윈스는 삼성 라이온즈에 절대적인 열세로 평가 받았지만 상황에 따라 계속 투수를 교체하는 투수 운영과 한 점 한 점 점수를 짜내는 작전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끝까지 괴롭혔다. 위기 때마다 한 박자 빠른 투수 교체로 중간 계투를 자주 등판, 어떻게든 경기를 물고 늘어지는 김성근의 경기 운영은 투수 혹사 논란과 함께 찬반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김성근은 투수 혹사가 단순히 얼마나 많이 던지느냐의 문제보다 코칭스태프의 철저한 관리와 투구 폼의 문제로 보고 있고, 이에 동의하는 선수도 있다. 또한 열세의 전력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의 야구는 팬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가 구단 측이 원하던 코치 대신 자신의 코치를 선임했다는 이유 등으로 LG트윈스를 떠나자, 팬들은 그의 해임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바비 발렌타인 : 김성근이 코치로 일한 전 지바 롯데 마린스 감독. 김성근과 술을 마시며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를 코치로 기용했다. 그는 야구에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더 즐거운 야구를 위한 상상력을 가지는 것을 중요시했다. 김성근은 그를 만난 뒤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라 생각했고, 그 전까지 좋아하지 않던 청바지가 매우 편하다는 걸 알고 즐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SK 와이번스 감독이 됐다.

이만수 : SK 와이번스의 수석 코치. 김성근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있던 시절 선수이기도 했다. 김성근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을 “유일하게 감독으로서 실패한 시간”이라고 회상한다. 우수 선수들이 많았던 삼성 라이온즈를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이 된 후 그는 팬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는 선수에게 벌금을 물릴 만큼 자신의 야구에 팬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문제가 있어 보이는 선수를 일일이 붙잡고 가르치는 대신 코치에게 많은 부분을 맡겼다. SK 와이번스는 그의 부임 첫해 우승했고, 2010년까지 매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양준혁 : 올해 은퇴한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선수.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코리안시리즈에서 김성근이 은퇴로 선수 명단에 들지 않은 양준혁이 덕아웃에 앉는 것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여 논란이 됐다. 은퇴한 선수에게 야박하다는 것이다. 또한 김성근이 코리안시리즈에서 잦은 투수교체를 한 것은 ‘불펜야구’라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LG 트윈스 시절 코리안 시리즈에서 8회 말에 번트로 한 점을 더 못낸 것이 승부의 방향을 바꾼 것을 기억한다. 또한 올해 메이저리그에서는 포스트 시즌에서 SK 와이번스와 비슷한 투수 운영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의 야구는 단지 승리가 목표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최선의 야구를 하는 ‘지지 않는 야구’가 목표다. 그 철두철미한 야구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더 뛰어난 수를 짜내도록 만들어 수준 높은 경기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김성근 야구의 매력이다. 룰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길을 찾고, 상대 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대하는 야구. 그의 말대로, 그는 “높은 곳에 선” 야구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또한 김성근은 양준혁이 코리안시리즈 3, 4차전에서 덕아웃에 있는 것을 용인했고, SK 와이번스의 투수 김광현은 양준혁의 은퇴 경기 당시 모자를 벗어 인사한 뒤 최선을 다해 공을 던져 그를 삼진으로 잡았다. 그게 김성근의 야구 아닐까.

김경문 : 김성근의 OB 베어스 시절 선수였던 현 두산 베어스 감독. 김성근이 SK 와이번스에 부임하자 “김성근 감독의 게임 지배 능력이 올해 SK의 초강세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근은 “2007년 우리가 주루플레이를 강조하자 5월에 곧바로 두산이 따라잡았다”며 김경문의 능력을 인정했다. 두 팀은 2007~2009, 3년 동안 포스트시즌에서 경기했다. 세 번 모두 SK 와이번스가 승리했지만, 언제나 치열한 접전으로 찬사를 받았다. 또한 두산 베어스는 올해 삼성 라이온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모든 경기를 한 점차로 끝내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아깝게 물러났다. 역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묘수를 찾고, 9회 말까지 승부를 예측하게 만들 수 없는 시합은 관중들을 열광시키고,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김성근 때문은 아니지만, 그의 “높은 곳에 선” 야구가 다른 팀에게 자극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딜레마일 수도 있다. 구단부터 코치, 선수까지 모두 그의 야구관에 따르도록 하는 그의 야구는 그만큼의 성과가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그러, 어느새 그의 야구는 그의 다음 세대에서 또 다른 형태로 진화 중이다. 기아 타이거즈는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를 이기기도 했다. 프로 감독만 27년 째. 김성근은 다시 진화할 수 있을까.

박경완 : SK 와이번스의 포수. 김성근이 전력의 핵심으로 꼽을 만큼 전적으로 신뢰한다. 이번 한국 시리즈에서도 투수가 흔들릴 때 적절하게 흐름을 끊고, 삼성 라이온즈의 도루를 저지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성근은 “SK가 2007년과 달리 2010년에는 선수들 스스로 생각하는 야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거쳐 발전했고, 그의 야구관은 드디어 선수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는 ‘일구이무(一球二無)’, 야구에서 두 번째 공은 없다는 마음으로 야구를 했고, 결국 한국 야구 현대사를 모두 견뎌내며 자신의 야구를 뿌리내렸다. 그러니,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가 꿈꾸는 야구를 할 토대는 이제야 마련됐다. 먹고 살기 위해 야구를 했다. 자기 인정을 받기 위해 야구했다. 그리고 야구를 위해 야구한다. 신의 영역에 도달하고픈 사람의 야구란 그런 것이다.

Who is next
김성근과 한 팀에서 뛰었던 김경문이 감독을 맡고 있는 두산 베어스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시구를 한 고아라와 KBS 에 함께 출연한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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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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