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쳤다는 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인 동시에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희망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막장 드라마가 새로운 대세로 군림하고 복고를 빙자한 퇴행이 거듭되던 지난 2년에 비하면 2010년 상반기는 한 차례 저점을 찍었던 한국 드라마가 주춤거리면서도 다시 앞으로 나가려는 움직임과 가능성을 보인 시기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2009년 MBC 이 대중성 있는 정치 사극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면 2010년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KBS 였다. 도망 노비와 그들을 쫓는 추노꾼들을 중심으로 왕조사 대신 민중사를, 궁궐 안 권력 다툼에 가려진 저자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감각적인 영상 안에 담아낸 이 작품은 모순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길을 제시했다. 사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KBS가 낙하산 사장 인사 논란과 보수적 색채가 뚜렷한 드라마 편성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의 이러한 등장은 아이러니에 가깝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던 경주 최부자 이야기를 다루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방송통신위원회 최시중 위원장이 경주 최 씨 중앙종친회 회장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기획 의도를 의심받았던 를 비롯해 , , 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공과 경쟁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양극화의 두 꼭짓점에서
2010 상반기 결산│진보와 퇴보의 동거 - 드라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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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MBC 은 가난한 입주 도우미 자매의 시선을 통해 2010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새로운 카스트 제도를 형성하고 있음을 통렬히 까발렸고, MBC 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상하관계의 로맨스를 현실성 있게 그렸다. KBS 는 과거의 정서로 여겨졌던 첫사랑의 순정에 서정성과 기업 드라마의 형태를 더해 시청자의 눈을 붙들었고, SBS 와 는 ‘미드’ 세대에 걸맞은 설정과 감수성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 드라마의 대표적 현역 노병 김수현 작가와 이병훈 감독은 각각 SBS 와 MBC 에서 진보적 세계관으로 대중을 움직이거나 진부한 방식의 답습으로 대중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2010년 상반기는 어떤 작품들은 한 발 더 나아갔고, 어떤 작품들은 과거보다도 훨씬 낮은 완성도를 보였다. 문영남 작가의 ‘막장 시청률 파워’를 확인시킨 KBS 와 쓴웃음만 불러일으킨 MBC 는 이러한 드라마의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킨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드라마도 퀄리티에 대한 평가보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2년 전 폐지되었던 KBS 단막극이 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것은 결코 작지 않은 성과다. 는 이토록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던 2010년 상반기 드라마의 인상적인 10가지 순간과 경향을 되새겨 보기로 했다.
2010 상반기 결산│진보와 퇴보의 동거 - 드라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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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소재, 낯선 이야기에 흥행 대박 카드 하나 없이 시작된 KBS 가 30%를 훌쩍 넘기는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계의 부동층이라 할 수 있는 남성 시청자들을 대거 끌어들인 덕분이었다.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이지만 주인공 대길(장혁)을 비롯한 남자들의 액션은 영화 을 떠올리게 하는 세련된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특히 6부에서 대길과 태하(오지호), 철웅(이종혁)이 격돌하고 죽은 임영호(이대로) 대감의 책상에 놓인 종이뭉치가 바람에 흩날리는 신에서의 박진감은 남자의 로망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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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란 말은 스토리의 개연성 따위 내던져놓고 주인공들의 애정행각에만 치중하는 드라마를 비웃는 데 쓰였다. 그러나 ‘주방에서 연애하는 이야기’였던 MBC 는 함께 일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일 때문에 사랑이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현욱(이선균)과 유경(공효진)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서, 드라마가 직업 세계와 로맨스를 혼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었다. 설레는 연애의 초반, 일상의 한 순간을 잡아낸 듯한 ‘눈알 키스’가 대표적이었다. SBS , 역시 일과 함께 싹트고 움직이는 로맨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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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하던 지훈(최다니엘)의 차로 이민 갈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세경(신세경)은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경쟁 사회에 대한 회의와 지훈에 대한 감정 등 숨겨왔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요.” 다음 순간 화면 정지와 흑백 효과, MBC 그렇게 끝났다. 분개한 시청자들 사이에는 귀신설, 도피설 등 다양한 가설이 난무했고 다른 드라마의 화면을 캡처해 흑백 효과와 종영 인사 자막을 넣어 패러디하는 ‘하이킥 스타일’ 엔딩 예상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파격적인, 혹은 파괴적인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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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남 작가의 KBS 와 임성한 작가의 MBC 빅 매치는 방영 전부터 기대를 모았지만 시간대가 다른 탓에 정면승부는 내지 못했다. 그러나 민폐의 지속성과 분노의 공감대만으로 보자면 장남만 편애하고 며느리는 노비처럼 부려먹는 의 시어머니 전과자(이효춘)가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의 엄마 피혜자(한혜숙)를 능가했다고 할 수 있다. MBC 의 민명석(정찬)이 남몰래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으로 열연했지만 그만한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던 것은 보통 막장이 커피라면 이들의 막장은 T.O.P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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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자수성가 권하는 시대다. MBC 는 천민이었던 동이가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낳는 신데렐라 스토리고, SBS 는 아버지가 음모에 희생된 뒤 맨주먹으로 살아남은 두 형제가 각각 권력과 부의 중심에 서는 이야기, KBS 은 제주도의 비천한 기녀가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성장하는 석세스 스토리다. SBS 에서는 백정의 자손과 여성이 의사가 되었고, KBS 의 주인공 역시 인간 경영으로 제빵계의 성공 신화를 이룰 전망이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산 증인’ 이라는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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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은 입시 제도와 학벌주의에 대해 별다른 성찰 없는 접근으로 비판받았지만 정작 수험생, 학부모들로부터는 사랑받았다. 명문대 입학이라는 주인공들의 ‘바람직한’ 목표 설정과 극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각 과목 공부 방법 소개 등은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를 드라마화한 듯했다. 이어 방송된 역시 ‘위대한 개츠비’를 모티브 삼아 지금은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멋진 부자가 될 날을 꿈꾸는 남자의 처세법을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KBS는 와 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좋은 부자 되는 법’을 꾸준히 가르쳐 왔다. 이제는 미니 시리즈 , 일일 드라마 이 나온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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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의 산부인과 의사 혜영(장서희)는 365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워커홀릭이다. 까다롭고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일에서만큼은 완벽한 혜영에게는 의사였던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나 아픈 가족사 따위의 진부한 배경 대신 결혼을 종용하는 중산층 부모와 자매들이 있다. MBC 의 유능한 동시통역사 다정(엄지원)은 어렵게 성공한 만큼 결혼을 통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이는 여성 캐릭터의 직업이 단지 로맨스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독립적인 인간, 현실적 욕망과 갈등을 지닌 존재로 그려낼 수 있는 설정으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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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에서 기훈(천정명)의 입에서 나직히 흘러나온 “은조야” 한 마디는 진짜 은조(문근영)만이 아니라 전국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잔잔한, 그러나 좀체 사라지지 않는 파문을 남겼다. SBS , 등에서도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김규완 작가는 은조에게 “한 번도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라는 피 토하듯 처절한 대사도 선물했다. 그러나 기훈이 은조를 가리켜 말하는 “나의 사랑하는 못된 계집애”는 한국어임에도 스페인어처럼 이질적인 느낌으로 듣는 이의 수족을 1.5초 가량 수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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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 누군가 돌아오는 곳과 떠나는 곳이 오로지 미국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의 드라마는 다르다. MBC 에서 강타(송일국)는 콧수염과 선글라스만 장착한 채 아랍 왕자로 변신해 원수에게 접근하고, MBC 의 악녀 미란(서유정)은 아랍계 거부의 14번째 부인이었다는 과거가 폭로되며 궁지에 몰린다. 뜬금없이 이용된 것이 아랍만은 아니다. MBC 에서 ‘게이’는 종종 여성적, 무성적, 비하적 존재로 비춰졌고 아우팅의 폭력성은 해프닝으로 희석되었다. 소재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그저 만만히 보이는 게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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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고 달콤한 대화를 속삭이고 결혼을 꿈꾸지만 그들의 사이를 반대하는 부모 때문에 괴로워한다. 주말 가족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플, 그러나 SBS 의 내과의사 태섭(송창의)과 사진작가 경수(이상우)는 둘 다 남자라는 특징이 있다. “동성애자는 어느 가정에서나 나올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수현 작가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사상 가장 ‘평범하고 멀쩡한’ 게이 커플을 그려냈고 송창의는 ‘모태 청순’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섬세하고 차분한 태섭 역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고 퇴보하는 세상에도 진일보하는 드라마는 나오는 법이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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