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너무 아껴서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노래들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남들이 듣는다고 음악이 닳는 건 아니겠지만요.” ‘그의 플레이 리스트’를 위한 음악을 추천하며 유인나는 말했다. 아마 누구나 비슷한 경험 한 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메이저한 취향은 아니라고 여기며 한 권 한 권 모으던 폴 오스터의 소설이 언젠가부터 서점의 판매순위 수위를 차지하고, 전부터 좋아하던 케서린 비글로우의 영화들이 그녀의 아카데미 수상과 함께 영화 채널에서 주구장창 상영될 때의 뭔지 모를 아쉬움과 질투. 어쩌면 그것은 유인나라는 배우를 MBC <지붕 뚫고 하이킥> 초반부터 눈여겨보던 ‘매의 눈’의 시청자들이 지금 그녀를 보며 느끼는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거 드라마의 기준에서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인나 같은 캐릭터를 정의하는 건 단 두 마디다. 여주인공 친구. 수많은 드라마 속의 그녀들은 여주인공의 옆에서 그저 불필요한 푼수 짓을 하거나 냉소적인 조언 한 두 마디를 던지는 게 전부였다. 아마 인나 역시 전자 정도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어떤 캐릭터도 남의 주위에서 공전하는 행성이 아닌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으로 그려내는 김병욱 월드 안에서 서서히 그녀는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대형마트 시식 코너에서 만두를 먹는 구질구질한 일상 안에서도 남자친구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 없고,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친구 어머니 앞에서 저질 공연을 펼치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스스로 허투루 여긴 적 없는 그녀는 정음의 친구가 아닌 인나 자체로서 시청자에게 기억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걸그룹 포미닛이 <지붕 뚫고 하이킥> 안에서 스키니라는 그룹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포털 연예뉴스 메인에 오르던 순간, 신세경과 황정음에 이어 그녀를 주목했던 사람들은 조금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좀 더 유명해졌다고, 시트콤 안에서 그녀의 비중이 좀 더 늘어난다고 해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상큼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설레는 순간과 함께하고 싶다며 그녀가 추천한 다음의 곡들이 언제나 그 느낌 그대로 다가오는 것처럼.




1. 박정현의 < On and On >
“박정현 씨의 모든 노래를 다 알고 있는데 ‘알아볼께요’는 그중에서도 많이 좋아하는 곡이에요. 제가 원래 도입부가 좋은 음악에 잘 꽂히는 편이거든요. 도입부의 ‘I don`t need no superman/Don`t need no millionaire’라는 부분이 좋아요. 말 그대로 나는 슈퍼맨도 필요 없고, 백만장자도 필요 없다는 얘기거든요. 대신 ‘날 위해 준다면’ 내 짝을 알아보겠다는 그런 얘기예요. 그래서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착해지는 거 같아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날 위해줄 사람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리드미컬한 여자 보컬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유인나가 박정현의 곡을 추천한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탁월한 성량도 성량이지만 리듬 앤 블루스의 리듬감을 매끄럽게 소화하는 그녀는 ‘알아볼께요’에서 남성 아카펠라의 풍성한 코러스 위에서 때론 감미롭게 때론 통통 튀는 자유로운 리듬감으로 곡을 소화한다.



2. 롤러코스터의 <일상다반사>
“롤러코스터의 ‘어느 하루’는 정말 정말 많이 들었던 노래고, 아무리 들어도 이렇게까지 질리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한 노래예요. 노랫말이 아닌 흥얼거림이 주를 이루는데, 그걸 들으면 저도 굉장히 한가로워서 저절로 따라 흥얼거리게 돼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곡이에요.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롤러코스터의 2집 <일상다반사>은 타이틀곡 ‘힘을 내요, 미스터 김’처럼 경쾌하고 펑키한 감성을 담아낸 곡도 매력적이지만 ‘어느 하루’처럼 연주도 노래도 기름기를 쫙 뺀 미니멀한 감성의 곡도 인상적이다. ‘너를 만나면 하고 싶던 말/많았었는데/오랜만이야 라는 말밖에 못 한/내가 미워져’라는 가사처럼 어떤 감정의 과장이나 과잉도 없는 이 감수성은 담백하고 심지어 때론 경쾌하기까지 하다.



3. 김윤아의 <유리가면>
“김윤아 씨의 노래에는 항상 그분만의 메시지가 있는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그분 노래 중에서는 ‘증오는 나의 힘’처럼 극단적일 정도로 우울한 느낌의 곡을 좋아하는데, ‘Girl Talk’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곡이에요. 성장기의 혼란스러운 여자아이에게 해주는 얘기인데 단순히 괜찮을 거라는 위로의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과 너 만나게 될꺼야/울고 웃고 느끼고/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세상은 위선에 가득 찬’이라며 너에게 이렇게 힘들 일이 닥칠 거라고 미리 얘기해주는 건데 그러면서 결국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사랑한다 말하고 싶어’라며 위로해줘요. 정말 좋지 않아요?” 1집 < Shadow of Your Smile >부터 김윤아의 솔로 활동은 자우림의 ‘파애’ 같은 곡의 성격을 극대화한 것이었고, <유리가면>은 특히 그렇다. ‘Girl Talk’ 역시 조금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소녀들 혹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곡이지만 그렇기에 그 모든 걸 껴안는 마지막의 감동은 더욱 크다.



4. 신소희의 <그랬단말이야>
“차 안에서 들으면 최고”라는 말과 함께 유인나가 소개한 네 번째 곡은 신소희의 ‘지금 만나러 간다’다. “제가 직접 운전을 하건 버스를 타건 차를 타고 갈 때 들으면 정말 좋은 노래예요. 제목 그대로 ‘넘어지면 좀 어때 캄캄한 밤인걸’이라며 지금 너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인데 가사와 함께 곡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돼요. 실제로 이 노래를 틀어 놓고 제가 운전을 하며 누굴 만나러 간 적이 있는데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밤공기와 노래의 신선함이 하나가 되어서 제 기억 속에 더 인상적으로 남아 있어요.” 사실 가사도 곡의 분위기도 경쾌하거나 명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곡은 아니다. 하지만 헤어진 남자에 대한 직설적인 감정의 표현과 스트레이트하게 감정이 고양되는 구성은 의외로 시원한 질주감을 담아낸다.



5. 리사의 < Featherlight >
그녀는 리사의 ‘My Melody’에 대해 “되게 묘해요”라고 표현했다. “개인적으로 리사 씨가 스케치하는 음을 좋아하는데 가사 없이 허밍으로 이뤄진 이 곡은 정말 그분의 묘한 목소리와 어울리면서 진짜 자기만의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들어보면 아, 이래서 ‘My Melody’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죠.” 1분 29초의 짧은 러닝 타임인 곡이지만 유인나의 소개대로 리사라는 가수의 가장 본질적인 면을 들여다본 느낌을 주는 곡이기도 하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건반의 멜로디를 타고 흐르는 그녀의 허밍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멜로디 안에서 끊임없는 즉흥적 변주를 통해 매초, 새로운 음악처럼 들린다. 과연 한 번 더 녹음해도 같은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일회적인 느낌은 일회적이기에 유일무이한, 진정 그녀만의 멜로디인 셈이다.




“청소해서 집 안이 깨끗해졌는데 마침 비가 올 때, 깨끗하게 씻어서 내게서 향수 아닌 자연스런 향기가 느껴지고, 제가 말했던 곡이 흘러나와 정말 오감이 충족될 때” 그녀는 설렘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모든 요소가 절묘하게 들어맞는 타이밍이, 그래서 일상적이지 않은 떨림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신인 배우인 유인나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 건, 김병욱 감독이라는 마에스트로와 <지붕 뚫고 하이킥>라는 좋은 작품을 만난 덕도 있겠지만 그녀 스스로 인나라는 캐릭터에 사랑스러움을 부여하며 앞서 말한 모든 요소와 함께 어우러진 설렘의 순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떨리는 경험이다. 가능한 것은 설렘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설렘일 뿐이다. 그렇기에 작품의 종영이 아쉬운 한 편, ‘보여줄 게 많이 남은’ 그녀와의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는 것이다. 아니, 기대만으로 설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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