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건축과, 삼성, 종합격투기, 한의사. 만약 성민수 프로레슬링 해설가를 하나의 포스팅으로 요약한다면 그 밑에는 이런 태그들이 붙을 것이다. 연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삼성 SDS를 다니다가 프로레슬링 중계를 시작, 일을 그만두고 수능 상위 0.3%의 성적으로 한의예과에 진학해 최근 한의사 자격증을 딴 그의 이력은 그 자체로 신기한 ‘엄친아’의 그것이다. 한방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XTM과 FX에서 프로레슬링 해설을 병행하는 존재라니. 하지만 직접 대화를 나눌수록 그가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그가 프로레슬링 전문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일반의 기대감을 배신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폭로가 있었던 70년대 김일, 천규덕 시대부터 너도나도 주말 오후엔 AFKN을 틀던 헐크 호건, 워리어의 시대, 그리고 최근 케이블 채널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존 시나, 에지의 시대까지 프로레슬링은 근육질 남자들이 링 안에서 마초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엔터테인먼트였다. 나이를 먹고도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이에게 ‘오덕’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성민수 해설가는 쇼에 흥분하는 오타쿠와는 거리가 멀다. “원래 무한 애정을 가졌던 건 프로레슬링이 아닌 건축이었어요. 그러다 그 길을 포기하면서 모든 걸 냉정하게 보자는 주의로 바뀌었죠.” 언젠가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면 뭔가 어두침침하고 외골수인 사람일 거라는 편견”을 깨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언더테이커와 바티스타의 대결에 가슴 두근거리는 열혈 마니아라기보다는 <레슬매니아>의 PPV(페이 퍼 뷰:따로 돈을 내고 봐야 하는 방송) 판매 수치와 대차대조표에 주목하는 냉정한 분석가에 가깝다. 최홍만의 이벤트성 경기 출전에 대해 격투기 마니아들의 비난이 거셀 때, 격투 단체의 수익 모델 안에서 그것이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걸 수치로 증명해 격투기 담론을 우물 안 개구리 싸움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시켰던 것도 그였다.

“프로레슬링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살아남아야 해설자라는 존재도 살아남고, 격투기 비즈니스가 무너지지 않아야 전문 매체도 존재할 수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이 현실주의자가 판타지보다는 개연성이 살아있는 드라마를 추천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그래서다. <벡터맨>을 추천해줬으면 대박이었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드는 건 사실이지만.




MBC <네 멋대로 해라>
2002년, 극본 인정옥, 연출 박성수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는 소위 막장드라마나 신데렐라 스토리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소매치기이지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고복수(양동근)가 전경(이나영)을 만나 좋아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진 <네 멋대로 해라>를 좋아해요. 다소 주류에서 벗어난 스턴트맨, 밴드 키보디스트, 치어리더의 모습이 더해지면서 각자의 입장에 대한 주장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버무려지면서 뭔가 억지스럽지 않은 여백도 느껴지고요.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주인공이 성공과 미녀를 동시에 얻는 성공 스토리와는 사뭇 다른 드라마라고 봐요.”



美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2005년 ABC

“한의예과를 다녀서 그런지 병원에서 일하고 연애하고 일상을 사는 <그레이 아나토미>가 흥미로웠어요. 보통 미드라고 하면 < CSI 라스베가스 >를 이야기하는데, 몇 년 전 실제 CSI와 드라마 속 명품 옷을 걸친 수사관 타입의 CSI가 전혀 다르다는 내용의 논픽션을 번역하면서 이 드라마가 굉장히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특히 자기 지역에서 난 사고를 담당하는 CSI 요원이 교통사고 당한 자신의 딸을 담당했다는 이야기를 접하니 < CSI 라스베가스 >의 사실성이 많이 부족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에 반해 <그레이 아나토미>는 의학적인 사건 사고 안에서 어느 정도 현실감 있게 벌어지는 일이라 즐겁게 볼 수 있었어요.”



KBS <추노>
2010년, 극본 천성일, 연출 곽정환

“어느 순간부터는 다소 힘이 빠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 드라마 중에서 가장 괜찮은 작품으로는 <추노>를 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보통 사극에서는 왕과 왕비 같은 정말 ‘잘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잖아요. 그게 아니면 <대장금>이나 <허준>처럼 밑바닥에 있는 주인공이 궁궐에 입성해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걸 보여주는데 그게 현대물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다른 게 없다고 봐요. 하지만 <추노>는 과거 역사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비주류였던 추노꾼이나 민중의 삶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어느 정도 균형감각을 찾은 드라마라고 봐요. 그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나 싶어요.”




“직장을 다니다가 짧은 시간 안에 수능 상위 0.3%에 오른 비결에 대한 수험 비법서를 쓰고 있어요. 요즘은 단기적으로 성적을 빨리 올리는 비법이 출판 시장에서 인기가 많나보더라고요.” 그의 특이한 이력이 하나 더 추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성민수 해설가는 기어코 여기에 현실의 무게를 얹는다.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만 가지고 먹고 사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에 안정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걸 업데이트해야죠.” 그가 해설가가 아닌 시청자로서 프로레슬링을 보는 이유가 새삼 궁금해진 것은 그래서다. 기적 따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가 판타지의 극한인 프로레슬링을 보는 이유에 대해. “현실과 분리된 취미 중 하나 같아요.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별로 심각하게 안 봐요. 그러려니 하면서 웃고 즐기면 되죠.” 답답한 하루하루에 대한 진통제로서의 프로레슬링, 그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처방일지도 모르겠다. 반칙하는 선수에 대해 “아! 저러면 안 되죠!”라고 탄식하는 그의 목소리가 처방전에 포함되는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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