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993년에 세상에 나온 것들 중 몇 가지만을 골라 타임캡슐에 넣어야 한다면 MBC <사춘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성장 드라마나 청소년 드라마라는 개념이 모두 낯설었던 시절이었지만, 춘천에 사는 평범한 중학생 동민(정준)의 일기처럼 일상을 담담한 펼쳐놓으며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많은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했던 <사춘기>는 여전히 추억이자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고, 공부 잘 하는 친구는 물론 엄마의 관심을 받는 형에게도 질투를 느끼고, 사춘기와 함께 찾아온 내적, 외적 변화 때문에 고민하면서 마음의 키를 조금씩 키워갔던 동민이를 그려낸 것은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의 박정화 작가와 당시 스물일곱 살의 신인이었던 이정선 작가였다.

“아버지의 기대를 받는 언니와 엄마의 사랑을 받는 남동생 사이에서 엄마의 관심에 목마른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다른 애들보다 유독 성숙했던 게 콤플렉스였고 본의 아니게 조숙해서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동민이에게 많이 투영되었던 것 같아요.” 개구쟁이에 천방지축, 남자아이들과 골목에서 뛰어놀며 축구며 야구를 했고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남자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며 매일 잠자리에 들었던 엉뚱하고도 씩씩한 소녀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나서도 그런 자신다운 캐릭터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순무식 사고뭉치 신데렐라로 사랑받았던 <굳세어라 금순아>의 나금순(한혜진)이나 결점투성이여도 결국은 그 진심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던 <외과의사 봉달희>의 봉달희(이요원)가 특히 그랬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막상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까지 글에 대해 까맣게 잊은 채 일종의 도피처럼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그의 진로를 바꾸어놓은 것은 한 동기의 따끔하면서도 진심 어린 충고였다. 그리고 “너보다 글을 잘 쓰는 애들은 많지만 니 글은 소박한 대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아” 라는 그 때 그 말은 지금까지도 이정선 작가의 작품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적절한 평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면서 영화관조차 한번 갈 수 없을 만큼 생활이 바쁜 보통 사람들에게 드라마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드라마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이정선 작가로부터 자신을 가르치고, 열정을 불태우게 하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드라마를 쓰게 만든 작품들에 대해 들었다.

MBC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1990년, 극본 주찬옥, 연출 황인뢰

“이혼한 엄마는 나중에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여자와 친구가 되고, 맏딸은 애인을 친한 친구에게 빼앗기지만 머리채 잡고 싸우는 대신 둘의 결혼을 지켜봐요. 어릴 때 결혼해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던 둘째딸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죽구요. 생각해 보면 그 전까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참 전형적이었어요. 엄마는 항상 희생적이어야 하고 친구의 애인은 절대 뺏으면 안 됐죠.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시절 한국에서 용인되지 않았던 여자들의 정서와 욕망을 굉장히 문학적이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어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냈는데 담백하고 아름답고 적당한 그리움과 쓸쓸함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게 주찬옥 선생님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SBS <어디로 가나>
1992년 극본 김수현, 연출 곽영범

“김수현 선생님은 치매, 혼수, 장기 기증 등 다양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특집극을 여러 편 쓰셨는데 <어디로 가나>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반신불수가 된 시아버지와, 평생 시아버지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만 받아 온 막내며느리의 이야기에요. 다른 자식 다 두고 굳이 자기 집에 와서 병수발 들게 하는 시아버지 때문에 며느리가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정말 리얼했고, 마지막 순간 어설픈 화해도 없어요. 하지만 시아버지는 ‘내가 빨리 죽으면 좋겠지?’ 하며 자식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돌아가시길 내심 바라기도 했던 며느리는 나중에 장례를 치르는 내내 울죠.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고 병들어 죽는데, 그렇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들이대는 걸 보면서 ‘드라마가 저런 걸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놀랐어요. 드라마를 쓰면 쓸수록 김수현 선생님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되죠.”

SBS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 극본 이선미-김기호, 연출 최문석

“이선미, 김기호 작가님들의 놀라운 점은 자신들의 전작을 복제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되 늘 일정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으신다는 거예요. 특히 <발리에서 생긴 일>은 사랑에 계급의 문제를 끌어들인 발상도 놀라웠지만 그러면서도 도식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고 절절한 멜로의 감정을 표현해내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을 부여잡으며 본 작품이에요. 그동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강요됐던 도덕적 순결주의 같은 금기들을 다 깨버리고 사람의 냄새를 그대로 입혀놔도 캐릭터나 작품에 아무 거부반응 없이 빠져들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주인공 하지원 씨가 매일 아침 싱크대에 선 채 김 하나 두고 밥 먹고 일하러 나가던 상세한 리얼리티까지도 너무 좋았어요. 두 분의 다음 작품이 참 기다려져요.”

“정말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계속 도전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이정선 작가는 올해 갑작스런 체력 저하로 여러 달 동안 앓았다. ‘다시는 드라마를 못 쓸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 때도 있었지만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요즘 그는 다시 기운을 내는 중이다. 작가 데뷔 17년, 이제는 ‘중견이 아니라 원로’라는 농담까지 듣는 이정선 작가지만 드라마에 대한 열정은 사춘기의 열병을 뛰어넘는다. “<외과의사 봉달희>때는 대사 그대로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마흔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나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나의 20대를 정리해보고 싶어서 쓴 게 <순수의 시대>였는데 벌써 마흔 셋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나의 30대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남들이 좋아해주는 게 가장 행복한 이야기꾼이면서 계속 도전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훌쩍 컸던 이후 그대로라는 작고 가냘픈 체구에서 지치지 않는 에너지가 쏟아진다. 그동안 그의 주인공들이 ‘무식할 만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혔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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