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MBC <지붕 뚫고 하이킥> 에서 신세경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미녀의 술주정 자체가 그렇게 튀는 일은 아니다. 함께 출연하는 황정음은 이미 ‘해변 떡실신녀’로 화제를 모으지 않았던가. 하지만 신세경의 코미디는 ‘드디어!’내지 ‘너마저!’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세경은 <지붕 뚫고 하이킥>을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과 차별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고, 그래서 좀처럼 망가지지 않았다. 어떤 캐릭터든 인간의 ‘그저 그런 일상’과 맞닿아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모든 캐릭터는 미남이든 미녀든 아낌없이 망가진다. 하지만 신세경은 몇 천원의 돈에 마음 졸이고, 헤어진 아빠 생각에 한 없이 눈물을 흘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여자였다. 이 여자가 등장인물들 스스로 사랑도 명상도 “개뿔”이라 말한 서울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웃음과 눈물과 연민의 삼중주는 <지붕 뚫고 하이킥>을 MBC <거침없이 하이킥>과는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다. 신세경의 안타까운 생활고가 부각되면 <지붕 뚫고 하이킥>은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다루는 코미디가 됐고, 신세경이 청순한 얼굴로 정준혁(윤시윤)이나 이지훈(최다니엘)과 함께 있으면 알듯 모를 듯한 멜로가 됐다. 신세경의 술주정이 화제를 모은 것은 그만큼 그의 캐릭터에서 예상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었고, 그건 이 때묻지 않은 강원도 소녀가 ‘소주’의 맛을 알아가듯 조금씩 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신파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고전적인 감성의 여자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이었다.

만들어지지 않고 천천히 자라난 소녀

신세경이 오랫동안 천천히 자란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8살에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울었더니” 나온 서태지 첫 솔로 앨범 포스터 속 신세경의 표정은 그저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깊고 복잡했다. 그건 연예계에서 일종의 ‘취급주의’ 표시가 붙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긴 머리와 낮고 차분한 목소리, 가는 붓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 그리고 10대 시절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지막 장면을 가장 좋아하게 된 감수성. 그의 부모가 서태지의 앨범 포스터 출연 이후 그를 활발하게 활동시킨 대신, 10대로서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을 충분히 준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신세경에게 자라는 시간이 필요했듯, 제작자들이 고전적인 외모와 여느 10대와는 다른 감수성을 가진 그를 활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 하나 툭 튀기 보다는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매력을 알 수 있는 소녀. 신세경이 <신데렐라>나 <오감도>같은 영화보다 MBC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발견된 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차분하고 똑똑하며, 아름다운 공주가 어울리는 얼굴. 하지만, 신세경이 <선덕여왕>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지붕 뚫고 하이킥>의 중심이 된 건 그 차분한 얼굴 뒤로 드러나는 곧은 심지 때문이다.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미실(고현정)과 대적하고, 그의 앞에서 또박또박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도 이순재 앞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강단을 가졌다. 부드럽게 말하지만 물러나지 않는 성격.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천명공주는 사극의 전형적인 예쁜 공주님에서 벗어났고,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은 신파의 여주인공이 아닌 시트콤과 정극 양쪽을 책임질 수 있는 캐릭터가 됐다. 물론 이것은 드라마 속의 배역이다.

어린 연기자에게 깊이를 기대하게 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차분한 어조 속에 대사를 담아내면서 캐릭터의 분위기를 형상화 시키는 신세경의 연기는 그 자신의 것이다. 10대 시절 단지 많이 활동하는 것에 욕심내기 보다는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음악과 영화를 들었던 것이 가치 있다 믿었던 선택.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굳이 먼저 밝히지는 않지만 질문을 받았을 때는 차근차근 이야기할 수 있는 차분함. 신세경은 요즘 어린 연기자들 중 드물게 외모나 연기 이전에 ‘분위기’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배우다.

그래서 배우로서 신세경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기대는 조금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10대에 이미 조숙하다는 표현보다는 자기 세계를 갖기 시작한 배우가 앞으로 더해갈 깊이에 대한 기대. 그리고 오랫동안 꾸준히 배우 생활을 하며 다른 배우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색깔을 더해갈 아름다운 배우에 대한 기대. 물론, 이건 만 19살에게는 지나친 기대일 것이다. 하지만, 신세경은 인터뷰를 마칠 때 쯤 ‘살아가며 지키고 싶은 것’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위해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변한대요. 저는 그게 두려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 그게 두려워서 항상 겸손하고 어떤 상황이든 감사하려고 노력해요.” 잔잔한 물은 깊은 법이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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