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부정의 힘’이 필요한 시대다. 유명인, 연예인, 방송인들은 말은 물론 생각도 조심해야 한다. 미니홈피에 적었던 몇 마디 글 때문에 피소당할 수도 있고,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가 밥줄이 끊길 수도 있고, 혹은 그냥 ‘만만하지 않아서’ 프로그램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든 것을 부정하라. 이것은 칼바람 부는 방송계의 매서운 심판으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다.

그들은 당신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얼마나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는 상관없다. 그리고 ‘보수’로 분류된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혹시 과거에 노조 활동에 참여했는지, 우연히 참여했다 사진을 찍힌 적이 있는지, 대학 시절 야학에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는지 등을 돌이켜보라. ‘진보’로 찍힐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가정교육을 받았다” 등의 균형 있는 멘트를 몇 가지 흘려주는 것이 좋다. 복장은 양복보다는 면바지가 진보다. 면바지보다는 청바지가 진보다. 진보적인 복장 또한 퇴출의 위험이 있다.

[예제] 올해 두 분의 전직 대통령 서거를 바라보는 심경은 어떤지.
모범답안 6년 전에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네요. 저희 아버님이 효자이셔서 할아버지와 20년 가까이 함께 살았거든요.

어떤 사적인 글도 공식적인 입장 표명으로 기사화시키고 싶지 않다면 미니홈피를 당장 닫기 바란다.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글을 쓰면 ‘표적’이 되고 미국산 쇠고기 먹기 싫다는 글을 쓰면 미 쇠고기 수입업체로부터 피소당한다. 미니홈피는 눈물 셀카를 올리거나 아무도 몰라줘서 안타까운 열애 사실을 공개하고 싶을 때만 이용하는 것이 좋다. 블로그나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김제동이 자신의 트위터에 “이란과 쌍용을 잊지 맙시다! 우리 모두가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해서 KBS <스타 골든벨>을 그만두었다고 믿는다면 기분 탓이겠지만 만사가 불여튼튼인 법이다.

[예제]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미니홈피에 쓰기 적절한 문구는?
모범답안 나는…채식주의자다…….고기는….모른다……

정치는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어도 관심이 간다면 집에서 혼자 기사 읽고 익명 댓글을 다는 것 이상 아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익명 댓글이라 해서 추적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국가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터지곤 하는 연예인 마약 복용 혐의자 명단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지 않다면 일기는 일기장에 써라. 미니홈피 다이어리 말고, 책상 서랍 밑바닥 깊숙이 넣어 둔 노트에, 가능하면 암호로 쓰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가택 수색을 당할 경우 간첩의 난수표로 의심받을 위험이 있으니 가장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

[예제] 혹시 촛불시위에 참가하신 적 있습니까?
모범답안 어릴 때 불장난을 치다 허벅지에 화상을 입어서 지금도 불이 무서워요.

눈치 없는 기자나 리포터들이 민감한 질문을 던졌을 경우 일단은 온화한 미소와 강렬한 눈짓으로 화제를 돌리게 하는 것이 좋다.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XXX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맞받아쳐 생각할 시간을 번다. 대북관계나 종합부동산세 등 민감한 사안의 질문이라면 골똘히 생각하는 척 한 뒤 세계 평화나 지구의 환경 문제 등 거대담론으로 확장시켜 논점을 피해 가는 방법도 있다.

[예제] 쌍용 자동차 노조 파업으로 요즘 언론이 시끄러운데 OOO씨가 보기엔 어떠신지.
모범답안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게 건강에 좋은 것 같아요. 지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했다. 위험한 이야기를 하는 곳에 가면 위험해진다. 시사의 ‘ㅅ’이 들어가는 프로그램은 위험하다. 특히 ‘토론’이 붙는 프로그램은 지뢰밭이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MBC <명랑 히어로>처럼 세상살이에 대한 가치관을 묻는 프로그램 출연 제의는 거절하는 것이 좋다. 특히 “대선 때 그 사람 왜 뽑았냐” 같은 질문으로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곤 하는 김구라의 프로그램은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출연하게 될 경우 차라리 성형 이야기를 하겠다고 미리 ‘딜’을 하는 방법도 있다. 아나운서나 기자라서 뉴스 앵커를 맡게 된다면 6하 원칙에 따른 팩트만 정확하고 간략하게 전달하는 것이 좋다.

[예제] 경찰의 철거민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화재와 사망 사건이 발생한 날 뉴스의 클로징 멘트를 해야 한다면?
모범답안 오늘 설악산 대청봉에는 불타는 것처럼 새빨간 단풍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단풍놀이라도 가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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