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어보는 거랑 똑같은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추천하고픈 5편의 영화를 묻자 엄지원은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질문처럼 좋아하는 영화 5편을 고르면 다른 좋아하는 영화들에게 미안”할 것 같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1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거쳤지만 아직도 배우이기 이전에 “영화를 분석하기 보단 느끼고”, “우디 알렌의 열혈 팬”인 열정적인 관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엄지원. 사실 그것은 대중이 그녀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엄지원은 연예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도 친한 배우의 결혼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연말 시상식에선 수상자의 소감 발표에도 눈물지었다. “저도 인정해요. 심지어 남들이 안 우는 상황에서도 눈물이 나요. 웃겨도 울고 날씨가 좋은 날엔 내가 이렇게 살아있어서 행복하다고 울고. (웃음)” 그렇게 남들 보다 풍부한 감정은 분명 배우에게는 득이 되는 자산이다. 최근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지적이고 똑 부러지는 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가도 술을 먹다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파르르 돌변해서 울분을 터뜨리는 이 기묘한 여자를 그런 감정을 가진 엄지원이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엄지원이라는 배우를 구축하고 있는 이미지는 그녀의 예측 불가능한 감정선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림자 살인>, <놈놈놈>에서처럼 정숙하고 단아한 모습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특별출연한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의 폭탄주를 마시고 미친 듯이 노래 부르는 여배우도, <극장전>에서의 새침하고 의뭉스러운 영실도 다 다르지만 어색하지 않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주변과 척 어우러지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풍경(風磬)처럼 엄지원은 어디서나 바람에 맞춰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 울림처럼 그녀가 고르고 고른 강렬한 영화들은 얼음송곳처럼 무더위를 시원하게 깨뜨릴 것이다.

1.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년 │ 토마스 알프레드슨

“작년 초겨울 문턱에 봤어요. 겨울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영화죠? 이 영화는 잔상이 강하게 남는데 극장 문을 나서면서는 오스칼의 사랑의 끝이 짐작되어서, 이엘리의 반복되는 사랑의 순환이 헛헛할 것 같아 마음이 시려왔던 기억이 나요.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특히 오스칼의 콧물 연기는 정말 명품이에요. (웃음) 슬픈 감정에 콧물연기는 금기인 법인데 콧물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좋은 감정전달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단 것을 각성케 해줬어요. <카모메 식당>을 보고서는 핀란드에 가고 싶었는데, <렛미인>을 보고서는 스웨덴이 가보고 싶어졌죠.”

이것은 동화 같은 예쁜 외피를 쓴 지독한 사랑의 악행에 대한 보고서다. 외로운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은 신비로운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를 만나게 되고, 곧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분명 소년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될 뱀파이어 소녀와의 운명은 스웨덴의 얼음같이 차가운 눈 위에 선명한 선혈을 남긴다.

2. <더 폴:오디어스와 환상의 문>(The Fall)
2006년 │ 타셈 싱

“처음엔 포스터가 땡기지 않아서 안 보려고 했어요. 사전에 관심이 있었던 영화가 아니면 포스터가 별로일 경우에 기대치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인지라 별 기대 않고 영화를 봤는데 감각적인 영상이 놀라웠어요. 역시 포스터가 전부가 아니었어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에 따라 펼쳐지는 광경은 입을 쫙쫙 벌리게 하면서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구요. 너무 아름답고 기이한 곳이 많아 CG도 많겠거니 했는데 100% 리얼 로케라니 더 놀라웠어요. 물론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병원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는 영화를 찍다 다친 스턴트 배우 로이(리 페이스)가 오면서 활기를 띈다. 로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청해 듣는 소녀는 점점 현실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된다. 하반신이 마비된 로이가 만들어내는 모험은 어두운 병원과 두 사람의 비관적인 처지를 잊게 만들 만큼 환상적이다. 스크린을 캔버스로, 카메라를 붓으로 화려한 색채를 연출해낸 감독은 무려 4년간 2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특수효과 없이 영화를 완성했다.

3.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2008년 │ 아리 폴만

“다큐를 애니메이션에 어떻게 접합시켰는지,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러갔더니 의외로 극장이 시끌시끌하더라구요. 우리의 ‘유지태 감독과 지우히메’가 <스타의 연인>을 촬영 중이었던 거죠. 꾀죄죄한 몰골을 숨기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상영관을 향해 가다 유 감독에게 딱 걸렸어요. (웃음) <순정만화>는 안 보면서 이 영화는 보냐며 욕은 먹었지만, 영화는 정말 강렬하고 특별했어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터라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뒤늦게 레바논 전쟁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뚜렷하고 가치 있다면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은 어떤 모양이든 중요치 않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화법으로 전달하면서 관객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80년대 초 레바논 전쟁에서 복무했을 때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영화감독 아리는 공백으로 남은 조각들을 찾기 위해 나서고, 결국 애써 지워버렸던 악행의 흔적들과 다시 마주한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전쟁에 대한 진지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2009년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4.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년 │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 시절을 풍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유수 영화제에서 수차례 감독상을 수상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어서라기보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람이 사람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영화가 더 좋았어요. 좋은 영화란 결국 사람을,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성찰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어떤 분은 너무 뻔하고 식상한 연출과 엔딩이 아니냐고도 했었지만, 극장 문을 나서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할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런 생각이요.”

인종차별주의자에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총질도 서슴지 않는 월튼 스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리가 흔히 노인에게 기대하게 되는 지혜나 너그러움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그는 옆집에 이사 온 몽족 가족과 얽히면서 한국전 참전 이후 자신도 거기에 두었는지 모를 만큼 깊이 감춰둔 진심을 꺼낸다. 서부의 총잡이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권총을 휘둘렀던 그 어떤 마카로니 웨스턴 무비에서보다 성스러운 결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거장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작품에 2009년 칸 영화제는 명예 황금종려상으로 경의를 표했다.

5.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ristina Barcelona)
2008년 │ 우디 알렌

“한국 제목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였지만 원제가 백배 어울려요. 영화는 2년 전 1달간 여행한 스페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보는 내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죠.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이 마구 마구 그리웠어요. 그리고 우디 알렌의 유머는 역시나 절 시종일관 키득거리게 했구요. 아, 이 사람은 어떻게 저 나이까지 저렇게 모든 촉수들이 살아있는 걸까요? 언젠가 꼭 그의 모든 대사들을 암기하고 싶어요.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도 매우 인상적이에요. 그녀는 할리우드에 있을 때보다 자국에서 연기 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듯해요.”

성실한 약혼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비키(레베카 홀), 자유롭게 살고 싶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 이 둘은 바르셀로나에서 여름을 보낸다. 두 여자는 와인과 음악으로 가득한 여행지에서 필연적으로 연애사에 얽히고 이전의 일상과 가치관을 뒤엎을 만큼 강렬한 사람들을 만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 하비에르 바르뎀이 매력적인 화가로, 늘 아름다움의 정상에 있었던 페넬로페 크루즈가 광기어린 화가로 변신해 연기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태양에 듬뿍 절여놓은 것 같은 바르셀로나의 풍광이 더위를 잊고 여름을 사랑하게 만든다.

“어렵고 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래서 재밌어요”

“무대를 즐겼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긴장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제 안에 한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즐거워요. 그 과정들을 통해 발전하는 저를 볼 수 있구요. 익숙하지 않은 장르라 힘들고 어렵고 해야 할 것이 더 많지만 그래서 재미있어요.” 1년째 진행하고 있는 <한 밤의 TV연예>, 영화 <천국의 향기>등 엄지원은 데뷔 이래 가장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늘 자기 안의 모습들을 “재배치시키거나 확장”시켜서 특별한 인물로 되살려냈듯, 지금 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들은 그녀가 좋아하는 막걸리처럼 이로운 효모가 되어 그녀의 연기를 한층 그윽하게 발효시킬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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