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가난과 함께 성장했다. 한 번도 ‘여윳돈으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해본 적이 없을 만큼 어려운 집안의 장녀, 어릴 때부터 강릉 시내 백일장을 휩쓸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취직을 했다. <토지>와 <태백산맥>을 한 권씩 사 모으고 신경숙의 소설을 읽으며 “나도 이런 얘기를 쓰고 싶다”는 꿈을 묻어둔 채 시간이 흘렀다. 부엌가구를 취급하는 조그만 대리점의 여사무원으로 지내며 이십대도 중반을 지나버린 어느 날 우연히 잡지에서 신경숙이 졸업한 서울예대 입학생 모집 광고를 보고 피가 뜨거워졌다. 어머니에겐 “서울 사무소로 발령 났다”는 거짓말을 하고 집에 보태려고 모으던 천만 원짜리 적금을 타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길음동 꼭대기에 있는 전세방을 구했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첫 학기 등록금을 내 준 어머니는 서울예대를 ‘탤런트 되는 학교’로 믿고 졸업 때 딸에게 물었다. “넌 언제 텔레비전 나오냐?” 스물일곱에 들어간 학교에서 “매일매일 깨지고 매일매일 성장하며” 혹독하게 글을 썼던 그는 졸업 후 연극판에 뛰어들어 제법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지만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다. 방구석을 탈탈 털어 찾아낸 5백원으로 새우깡 한 봉지를 사서 사흘 동안 아껴 먹으면서도 ‘이대로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버티던 그에게 오랫동안 그의 연극을 지켜보았던 친구가 물었다. “드라마 한 번 써 볼래?”

그리고 거짓말 같은 인생 2막이 열렸다. 강은정 작가와 함께 집필한 데뷔작 SBS <태양의 남쪽>에 이어 <파리의 연인>이 시청률 40%를 넘기며 빅히트했다. <프라하의 연인>과 <연인>으로 ‘연인 3부작’의 흥행 성공을 이룬 김은숙 작가는 2008년 <온에어> 역시 히트시켰다. 최근 종영한 <시티홀> 역시 ‘정치’라는 무겁고도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수목 드라마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김은숙 작가가 지금 여기, ‘대중’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드라마 작가라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또 그것은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자라온 그의 인생 모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하려면 1등 하고 싶어요. 드라마를 끝내고 모두 행복해지려면 다들 자기가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 기준이 시청률이라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1등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세상에 다시없을 왕자님 같은 남자 주인공과, 달달하다 못해 ‘손발이 오그라드는’ 로맨스 판타지를 그려내는 것이 특기임에도 앳된 얼굴의 김은숙 작가에게서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드러난다.

“<연인>까지는 ‘해야 하는’ 드라마를 했고, <온에어> 때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고, <시티홀>은 ‘하고 싶었던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같이 해 본 드라마에요. 여러 가지로 가장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작품이지만 그동안 늘 고민했던 ‘깊이’의 문제에서 조금은 더 나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코 쉽지 않았을 ‘생활 밀착형 로맨틱 코미디 정치 드라마’ <시티홀>은 그가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져 왔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가 고른 세 편의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의 선택으로는 의외지만 ‘작가 김은숙’의 취향에 대해서는 새로운 힌트를 준다.

MBC <다모>
2003년 극본 정형수, 연출 이재규

“‘질투는 나의 힘’이 인생 두 번째 모토에요. 후배들에게도 늘 ‘너보다 나은 사람을 건강하게 질투해라.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저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하다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발전한다’고 말해요. 세상에는 제가 질투할 드라마들이 정말 많은데, <다모>도 그 중 하나였어요. <태양의 남쪽>을 쓰고 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작품인데 너무나 신선하고 영상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대의를 품고 큰 꿈을 꾸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세 주인공들의 사연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그들이 죽음으로밖에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 같은 게 사극이면서도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어요.”

KBS <마왕>
2007년 극본 김지우, 연출 박찬홍

“<온에어>가 끝나고 IPTV로 보기 시작했는데 1회를 같이 본 후배 작가들과 거실에 이불 펴고 밥도 시켜 먹으면서 사흘을 꼬박 지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이 작품 안에는 ‘단죄할 수 없는 죄’가 있고 ‘단죄해야 하는 악’이 있는데 악도 선도 죄도 다 이유가 있다는 걸 너무나 설득력 있게 그려냈더라구요. 그래서 슬펐고, 슬퍼서 아름다웠죠.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의 템포를 놓치지 않은 채 모든 캐릭터를 다 이해할 수 있게 작품을 끌어간 김지우 작가님에 대해서는 “천재다!”라는 찬사를 끊임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KBS <한성별곡-正>
2007년 극본 박진우, 연출 곽정환

“너무 좋아해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본방을 챙겨보고 심지어 마지막 회 방송에 맞춰 <한성별곡-正> 갤러리에서 준비했던 종방연에 후배들과 입장료 내고 다녀오기까지 했어요. (웃음) 곽정환 감독님과 박진우 작가님, 신인인데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진이한, 김하은 씨를 보니까 참 반갑더라구요. 정조에 대한 이 작품에서의 접근도 좋았고, 주제의식도 뚜렷했고, 또 이야기가 이렇게 촘촘하면 방영 도중 유입되는 시청자도 거의 없어서 시청률을 올리기 힘들 거라는 걸 아셨을 텐데 제작진들이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참 용감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왜 나는 이게 안 됐을까?’하는 질투도 좀 났죠. (웃음)”

“좋은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해요”

재보궐 선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과 맞물리며 <시티홀>을 둘러싸고 정치공세를 벌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김은숙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 혹은 살면서 지키고 싶은 가치는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좋은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은 마음이면 누군가에게도 그 마음이 전염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사람이 많으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조국(차승원)이 미래(김선아)에 의해 변한 것처럼.”

<시티홀>을 집필하느라 네 살배기 딸과 석 달이나 떨어져 지냈으니 당분간은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아내 역에 충실할 거라는 김은숙 작가는 그에게 처음 드라마를 써 보라고 권했던 친구, <태양의 남쪽>부터 <온에어>까지 제작 PD로 함께 일했던 윤하림 대표가 설립한 제작사 ‘화&담’과 차기작을 함께 할 예정이다. 내용은 아직 미정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넘친다. “그리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제 얘기를 좀 아프지 않게 할 수 있게 될 때 그걸 써 보고 싶어요. 짧게는 안 되고, 일일극으로. (웃음)” 지치지 않는 이야기꾼, 김은숙 작가다운 계획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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