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게 주말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의 두 시간은 특별하다. 동시간대의 타 방송사나 평소의 편성 행태에 따라 드라마를 전후로 뉴스나 예능 등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것과 달리 SBS는 두 편의 드라마를 연속 방영하고 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로 시작해 <찬란한 유산>으로 마무리되는 두 시간. 두 편의 드라마 모두 가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시청률 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홈드라마가 꽉 쥐고 있는 주말 연속극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SBS 주말연속극의 세계로 위근우 <10 아시아> 기자와 김선영 TV평론가가 안내한다. /편집자주

캔디처럼 밝은 성격을 지닌 은성(한효주)은 싸가지 없는 재벌 후계자 환(이승기)과 가방이 뒤바뀌는 악연으로 얽히게 된다. 얼마 안가 은성의 집은 몰락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다시 환과 마주친다. 티격태격하는 와중에서도 환은 은성의 당당함과 자존심에, 은성은 환의 차가운 모습 이면의 순수함에 매력을 느끼고 서로 사랑에 빠진다. SBS <찬란한 유산>은 <오만과 편견>이 완성한 신데렐라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에서 출발한 드라마는 어느 순간 찰스 디킨즈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어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어머니를 통해 지속 되는 유산의 되물림

이 드라마에서 은성과 환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와 장숙자(반효정) 사장과의 관계다. 19세에 사별하고 유복자를 키우며 진성식품을 일궈낸 장 사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은성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다. 이 핏줄이 섞이지 않은 묘한 모계승계는 <찬란한 유산>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전 직원의 50퍼센트를 싱글맘으로 채용하는 진성식품은 장숙자라는 강력한 가모장을 중심으로 한 모계 중심 가족 체계가 기업으로 확장된 회사나 마찬가지다. 나눔을 진성식품의 기본 뿌리로 삼는 장 사장이 규모 확장을 중시하는 남성적 경영 사고를 대변하는 박 이사(최정우)와 대립하고 은성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그녀에게 자신의 ‘뜻을 물려주기’ 위해서다. 무례하게 구는 환에게 ‘난 우리 아빠 딸이니 막 대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의 그늘에 있던 은성은 장 사장의 모계승계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비로소 성장하고 환까지 변화시킨다.

장 사장과 은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모녀 계보의 극단적 대척점에 위치한 것은 “엄마처럼 살지 마”라는 낡은 대사를 공공연히 반복하는 성희(김미숙)와 승미(문채원)의 고전적 모녀 관계다. 흥미로운 것은 이 드라마가 신데렐라의 계모와 이복 자매인 이 모녀가 악녀로 변화하는 동기와 개인적 사연을 두텁게 그려내며 연민의 시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한 번 해보고 두 번 해봐도 결국 날 제자리에 돌려놓는 남자들 지긋지긋해”라고 말하며, “엄마는 왜 그렇게 독하냐”고 묻는 승미에게 “너도 나처럼 끼니 굶으며 살아봐. 내가 우선 살아야 돼”라고 대답하는 성희의 모습에는 생존형 악녀의 페이소스가 짙게 느껴진다. 그런 엄마가 모든 악행을 자신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는 모습에 치를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닮아가는 자신에게도 혐오를 느끼는 승미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를 승미의 입장에서 다시 쓴다면 환의 대사처럼 팥쥐는 은성이 될 수도 있다. 장사장과 은성의 모계가 가부장 전통의 대안이라면 성희와 승미는 그 어두운 거울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악행에는 일정한 개연성이 부여된다.

새로운 여성주의 로맨스 혹은 신데렐라 판타지의 한계

MBC <선덕여왕>, KBS <천추태후>, SBS <자명고>와 같은 여성영웅사극의 동시방영, 그리고 특별한 모계승계를 다루는 현대극 <찬란한 유산>의 출현이 논란이 많은 신모계사회의 새로운 징후가 드라마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증거인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드라마 속에서 늘어나고 있는 싱글맘 중심의 모계 가족 이야기나 여성 영웅의 묘사, 악녀에 대한 흥미로운 재해석 등이 남성 중심의 전통적 서사들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한 균열내기를 넘어선 새로운 여성주의 서사의 가능성이다. <찬란한 유산>이 여성 캐릭터는 꾸준히 주체적으로 변화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로맨스 장르 안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은성이 물려받게 될 ‘찬란한 유산’은 바로 그 가능성이 되길 기대한다.
글 김선영

SBS <사랑은 아무나 하나>에서 딸만 넷인 집의 넷째 딸 봉선(손화령)의 핸드폰에는 엄마 애숙(박정수)이 빅마마란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애숙은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엄마지만 인자한 남편 갑수(임현식)가 유사 엄마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수장 역할을 한다. 공부 잘하는 둘째 딸 설란(유호정)을 의사 사위에게 시집보내는 것부터 유학 간 셋째 딸 금란(한고은)의 교수 자리를 미리 만들어놓는 것까지 딸들에 대한 애숙의 장악력은 절대적이다.

운명적 사랑도, 로맨틱한 엔딩도 없는 사랑의 맨 얼굴

하지만 작고 파급력 강한 바이러스를 만난 것처럼 금란이 인공수정으로 몰래 낳은 딸 장미를 데리고 등장하면서부터 애숙의 장악력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절대 권력에 누수가 생기는 순간, 권력을 통해 유지되던 집단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억눌렸던 개개인의 욕망이 형체를 드러낸다. 가족이란 집단도 마찬가지다. 둘째 사위 수남(윤다훈)이 남태평양 오지로 봉사를 갔다가 얀티(하이옌)를 만난 건 우연이다. 하지만 그가 순종적인 얀티에게 사랑을 느낀 건 장모와 마찬가지로 차를 사는 것부터 아들 찬(여진구)과 노는 것까지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는 아내 설란 때문이다. 성공한 소설가를 꿈꾸는 첫째 풍란(지수원)이 짠돌이 남편 세돌(이성민)을 속물 취급하고 인문학적 감성을 지닌 영하(선우재덕)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 역시 애숙의 독재 체제 안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가족제도 붕괴의 징후에서 출발한다는 면에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가족이 구성되는 과정을 그린 여타 홈드라마와 구별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정말 흥미로운 건 종적인 가부장제와 횡적인 결혼제도가 해체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가족애와 남녀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권위를 버리니 가정이 화목해지고, 구속에서 벗어나니 진정한 사랑이 오더라는 식의 낯 뜨거운 판타지는 아니다. 가령 풍란과 영하를 불륜으로 고소했던 세돌이나, 판사 앞에서 사랑한 사실을 부정한 영하 때문에 충격 받은 풍란 모두 사랑에 대한 슬픔보단 ‘쪽팔림’ 때문에 징징거린다. 하지만 둘이서 소주를 마시며 징징거리는 과정에서 세돌은 돈만 아는 자신이 결코 멋진 이성이 아니라는 것을, 풍란은 생활과 동떨어진 낭만적 사랑은 없다는 걸 자인하며 서로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하고 암묵적인 화해를 한다. 결코 예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봉합이지만 순수한 사랑이라는 실체 없는 개념보단 미운정과 미안함이 섞인 그 감정이야말로 사람이 사랑을 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혼 후 찬 때문에 설란과 식사를 하는 수남이 “예전 같으면 스테이크를 각 맞춰 썰었을 것”이라고 이죽거리고 이에 찬이 동의하는 장면은 드라마 전체에서 이 가족의 가장 단란한 한 때다. 애숙과 딸들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금란과 순신(박광현)의 결혼 준비 때문에 금란과 티격태격하며 조금씩 합의점을 찾아갈 때나, 이혼한 설란 때문에 화가 나면서도 그걸 속으로 삭일 때 애숙은 어느 때보다 사람 냄새 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 가벼운 단어 안에 갇힐 수 없는

법적 가족이 아닌 가족이 가장 가족적인 한 때를 보내고, 사랑한단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이 역설적인 장면들은 가족과 사랑이란 단어나 관념에 갇힐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한다. 중요한 건 실제 감정이다. 즉 이 드라마는 가족과 사랑이란 단어를 해체했지만 그것은 관념적이지 않은, 살과 살이 맞닿는 가족애와 사랑을 재구성하기 위한 생산적 해체였다. 때문에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가족제도 바깥을 그리지만 가족제도 너머의 새로운 가치를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키려 하던 것이 무엇인지, 오히려 그 이름에 집착해 정작 지키려던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을 던질 뿐이다. 과거 홈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가족과 애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느라 바빠 미처 던지지 못한 질문을.
글 위근우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글. 김선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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